Ep.4 까마귀의 성배(1)

“넌 어때?”

바랗게 물들어가는 눈동자가 기묘했다. 온 신경이 다 흐트러지는 느낌이 파도처럼 덮쳐왔다.

이게 진짜, 훈련된 총책임자의 힘. 그 힘을 떠안고 있기는 커녕 훨씬 뒤로 밀려나는 기분이 들었다.

이래서는 안되는건데. 더 무리하기 전에 저 맹목적인 시선을 피해야겠다고 느껴 뒤를 돌아보았지만, 이번만큼은 셰이드 역시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그건.”
“그건?”

겨우 내뱉은 한 마디를 따라하며 아레우스가 말고리를 끌어올렸다.

어째 블리아드 집안은 다 저렇게 재수가 없는 걸까. 셰이드도 재수얼탱이로 벅찬데. 형제가 쌍으로 지랄이다.

그래서, 조금 심술이 났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아레우스의 표정이 황당무개함에 물들어갔다.

“……?”

침묵에서 드러나는 물음. 내면을 다 헤집어 버릴듯 공격적이던 시선은 사라져버린지 오래였다. 대신 얼굴에 물음표가 잔뜩 띄워졌다.

“나한테 관심 끄라는 말이에요.”


“허…?”

아레우스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맹랑한 꼬맹이 같으니라고. 이거 정말 골 때리네?”

미켈의 볼에 손을 대고는 쭈욱 늘리자, 놀란 눈을 둥그렇게 뜨며 미켈이 그의 손을 떼어내려 애썼다.

“윽, 아! 아프다고요!”
“알았어 알았어. 그러게 왜 말을 그런 식으로 해?”

나름의 벌이라며 싱긋 웃은 아레우스가 볼에서 손을 떼며 운을 띄웠다. 그 웃음이 보기보다 불안해서, 문제인거지.

“이 형님이 재밌는 거 하나 알려주랴?”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댄 아레우스가 소곤거렸다. 미켈이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도리질치기도 전에, 그닥 듣고 싶지 않았던 진실이 흘러들어왔다.

“너, 이용만 되다가 갈갈이 찢겨진 후 정신도 신체도 분열되서 버려질거다. 그렇게 비참하게 죽는게 우리, 총책임자들의 진짜 책임이지.”

진실인지 아닌지.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을 정도로 살벌한 말이 흘러들어왔다.

대의를 위한 숭고한 희생이라는 커튼 속에 가려진 진실을 살인이라 정의한 아레우스에게, 총책임자의 의미란 그랬다.

망할 대의에 의해 벼랑 끝에서 떠밀려진 누군가의 자살이 숭고하다니. 축제가 벌어지는 세상을 뒤로하고 처절하게 죽어야한다니.

“죽는게 아니라, 죽임을 당하는 거야.”

누구보다도 네가 아끼게 될 그 누군가에 의해, 필요성에 의해, 네 목숨은 사라질거야.

잔혹한 말임을 알면서도 제 입을 늦추기에는 이미 늦어버린 아레우스가 소곤거렸다.

잠깐이지만 총책임자의 자리에 머물며 느끼고 배웠던 것이 많았던 그는, 그만큼 후대에게 위험성을 경고하고팠다. 조금 풀어말한다면 겁을 먹이려 했다.

마음같아서는 함께 도망가자고 하고 싶을 정도로.

“가장 잔인하게ㅡ”

속삭이는 말들이 바라지 않아도, 듣고싶지 않음에도, 귀를 타고 머리를 타고, 심장까지 넘어올라온다. 숨이 북받힐만큼 잔인한 그것이.

“잊혀지는 거야.”

아레우스가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무릎을 폈다. 입안을 깨물고 무언가를 참아내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아, 신이시어.

왜 우리를 이토록 괴롭게 하시는 겁니까.

나는 무슨 잘못을 했고
저 아이는 무슨 잘못을 했으며
지금까지의 모든 희생자들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우리에게 잘못이 있기는 한겁니까.

우리는 축복인겁니까 재앙인겁니까.

어째서.

어째서 우리인겁니까.

수만번 되내이고 답도 없는 신에게 했던 질문들을 무수히 나열하여 앞의 아이에게 전달하고자 애썼다.

절망, 갈망, 공포, 비통, 피로감과 우울감.

“도망가.”

길고 긴 적막의 문답 속에서, 고요를 깨뜨리며 아레우스가 내뱉었다.

그 입모양만큼은 알아보았던 셰이드가 입술을 비죽 올렸고, 미켈은 굳은 얼굴이였다. 바들바들 떨리는 주먹을 애써 진정시키려는 모습이 우스웠다.

“내 충고, 잊지 않는게 좋을거야. 두개 다 말이지.”
“…네.”

반항 없이 답하는 아이의 새하얗게 샌 머리칼을 뒤로 살짝 넘기고, 이마에 입을 마추었다. 동시에 방음마법이 와장창 깨졌다.

이마의 부드러운 촉감이 가시고, 미켈이 머리카락을 정리하면서 뒤를 돌아보자 눈에 핏발이 선 셰이드가 보였다.

“내가 분명 얘기만 하라고 허락해줬던 것 같은데요…?”

왜인지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가 들리자 아레우스가 펄쩍 뛰었다.

“아냐, 아냐! 별거 안했어!”
“이마 키스가 별겁니까?”
“아, 형, 미쳤어? 축복의 의미인거 몰라?”
“네가 하면 다 사심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입이 험하네요. 말 좀 가려하지.”
“형도 다를바 없잖아!”

티격태격거리는 형제의 모습을 미켈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음이 복잡했다.

그렇게 도망쳤던 총책임자 아레우스는, 어째서 그가 가장 증오할 이 탑으로 다시 돌아온걸까.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건가.

그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대부분 나쁘게 평가되어 왔기 때문에, 미켈 역시 ‘그’ 집단에서 생활할 때만 해도 그가 천하의 망나니인줄 알았다.

“하하…”

옅게 웃은 미켈이 여전히 서로 쥐어뜯느라 바쁜 형제를 중제하려 팔을 뻗었다.

“그만하고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우리가 먼저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흐음?”
“응?”

똑 닮은 두 얼굴이 미켈을 향해 틀어졌다.

“찾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과거에 주워들었던 이야기에 불과하지만요.”

새카만 보랏빛 눈이 반달을 그린다.

“까마귀의 성배를 알고 계십니까?”

까마귀의 성배. 이 대륙에서 태어난 어떤 아이라도 한번쯤은 듣고 접해보았을 옛날 이야기. 노래와 책, 시, 심지어 한 가문의 문장 모델로 쓰이기도 했으니 모를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 미켈의 ‘알고 계십니까’는 다른 의미였다. 그 이야기가 아닌, 실제로 존재할리가 없는 그 성물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걸 깨달은 셰이드가 잡고 있던 아레우스의 머리끝을 놓고는 언제 다퉜냐는 듯 소파에 앉았다. 그런 형을 향해 몇 번 헛소리를 지껄인 아레우스가 맞은편 소파에 앉자, 미켈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실제로 까마귀의 성배는 존재합니다. 과거에 제가 집단에 있기 전, 전해들었던 사실이죠. 그 성물은 다크엘프들의 성유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형태는 어떠한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다크엘프가 그 성유물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하죠. 우리가 까마귀의 성배를 알듯이 말입니다.”

아레우스가 턱을 괴더니 물었다.

“그게 사실이라는 걸 우리가 어떻게 믿어?”

전대 총책임자다운 날카로운 질문이였다. 미켈이 찬찬히 설명했다.

“이유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믿으셔야 합니다.”

음, 사실, 설명은 아니였지만.

“그냥 믿었다가 뭔가 일이 꼬이면? 사실 그런게 없으면 어떡할건데? 네가 책임진다고 해서 탑의 병력을 움직이는게 편히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건 알지?”

아직 탑의 병력을 움직인다고는 안했지만. 맞기도 한 말이였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였으니까.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제-”
“목숨은 안됩니다.”

말하기도 전에 가로 채였다. 미켈이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목숨을 건다고 안했는데요.”
“클라우드군이라면 충분히 그런 말을 할 것 같아서. 미안해요. 자꾸만 목을 내놓고 다니니까 나도 걱정되어서 말이죠.”

저거 나 까는 거지? 그치?

“큼. 목숨까지 걸 생각은 없습니다. 제 말은 근신하겠다는 말이였습니다.”
“근신?”

생각보다 속편한 처벌에 아레우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에 반해 셰이드는 눈을 치떴다.

“근신이라.”

왠지 장난기가 듬뿍 담겨진 것 같은데.

“성유물이 있어도 없는 척하고 싶을만큼 달콤한 제안이군요.”
“엥?”

아레우스가 저게 무슨 헛소리냐는 눈으로 셰이드와 미켈을 번갈아보았다.

“그러니까 제게 근신이란… 적어도 그쪽들이 절 죽음으로 몰기 전까진 사고도 안치고 인형처럼 여기에 잘 붙어살겠다는 의미입니다. 당장이라도 여기서 박차고 창문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저를 잘 억제할 수 있는 제안이죠.”
“…….”

미켈이 아무렇지도 않은 채 설명하자, 아레우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후후. 클라우드군은 이래서 참 재밌어. 스스로를 함부로 대하는가하면 또 언제는 마치 내게 스스로를 잡아달라고 말하는 듯한 제안을 해온단 말이죠.”

셰이드가 짙은 눈초리로 미켈을 바라보았다. 분명 웃음을 띄고 있었지만 가라앉은 녹빛 눈은 어두웠다.

“어차피 제가 이길 제안이라서.”

성유물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것을 확신한 미켈은 딱 잘라 말했다.

“그럼 스승님에 대한 일은 일단 베키시에게 맏겨둬야겠군요. 병력을 움직여 다크엘프들을 겨누어야 할테니까요. 재밌네요. 분명 누군가를 공격할만한 위인이 못되는데, 우리 클라우드군은.”
“맞아요. 뭘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필요 없습니다.”

병력은 최소한으로 움직일 것이다. 결코 검과 마력탄은 다크엘프들을 향해 겨눠지지 않을 것이므로.

“성유물을 위한 우리의 적은, 따로 있습니다.”

아직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분명히 기억한다. 때를 기다리던 그들이 드러날때까지, 아직은 휴식기간이였다.

“어릴 적 저를 데리고 있었던. 그 자들을 상대할겁니다.”

‘그’ 집단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어릴 적. 아버지를 집행관으로 알고 있었던 그때. 그를 실험했던 자들. 수시로 피를 온몸이 새파랗게 될때까지 뽑아갔던 자들.

그들의 목표는 분명,

“그 자들은 신을 만드려합니다.”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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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1-03-02 10:36 | 조회 : 1,256 목록
작가의 말
하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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