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 균열(2)

“어쨌든 당신은 나를 따라 돌아가야 합니다. 지금 이렇게 말다툼 할 시간도 없다고요.”
“대체 뭘 어쩌려고..!”
“뭘 어쩌려는게 아닙니다. 계속 이렇게 시간 끄시기만 할거면 강제로 모시겠습니다.”
“간다, 간다고 이 망할 놈아!”

아를로가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이자 그제서야 빌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 * *

“미켈, 너 괜찮은 거 맞지? 내가 셰이드 한 대 때리고라도 올까?”
“…괜찮아요.”

물에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베키시가 열심히 그런 미켈을 얼렀다.

“셰이드 그 새끼가 나빴어, 그치?”
“제가 애입니까...”
“내 눈에는 애야. 그러니까 맘껏 어리광 부려도 돼. 그렇게 억누르고 있을 필요 없어.”
“…….”

베키시가 그 마음, 다 안다! 라는 성녀의 표정을 지었다. 그 꼬꼬마 키로, 앳된 얼굴로 그렇게 웃으니 웃길 다름이였다.

“나는, 괜찮아요.”
“거짓말.”
“정말입니다.”
“너 울고 있었잖아. 지금도 울고 있잖아.”
“눈물 한 방울 안흘렸거든요?”

새초롬하게 말하자 베키시가 피식 웃었다.

“얼굴이 울고 있으면서 무슨.”
“…….”

미켈이 무릎을 세우고 팔을 둘렀다. 숙인 고개가 무척이나 작아보였다.

“나도 그랬어, 그러니까 괜찮아질거야. 라는 가식 섞인 말은 하지 않을게.”

베키시의 머리카락이 길게 흐드러졌다. 평소보다 크고 길어진 손이 미켈의 고개를 들어올렸다. 새파란 눈이 얕은 바다에 햇빛이 들듯 반짝였다.

“동생 때문이지?”
“…!”
“걱정마. 그 애는 내가 어떻게든 네 곁에 돌려줄게. 나는 너를 복종시키고 싶어하는 셰이드 새끼랑은 다르니까.”

나는 무해하단다!

“쿡ㅡ”

미켈이 작게 웃었다. 볼에 닿은 타인의 체온에 고개를 기댔다.

“말 뿐이라도 고마워요.”
“…….”

베키시가 미소를 머금었다. 말 뿐이였다는 사실을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힘으로는 할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뭣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미켈, 내 어머니가 사라졌어.”

…응?

“스칼렛 쟌이라고- 아마 너도 알겠지. 뭐, 여러가지로 유명하시잖아?”

쟌 가문의 1대 가주, 나이는 세아릴 수 없을 정도라고 불리우는 대현자. 그녀에 대한 설화는 엄청나다.

듣기로는 셰이드와 베키시의 스승이라고도 전해지더라.

“널 공격한 자들의 뒤를 쫓다가 연락이 두절됬어. 아? 그런 표정하지마. 널 탓하려는게 아냐.”

어느새 다시 쪼그만 베키시로 돌아왔다. 그 작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위험한 건 너야. 최근 잠자리는 어때? 누가 와서 죽이려 들거나 그러진 않아?”
“아, 아직은요...”
“그건 다행이네. 그런일 생기면 꼭 나한테 말해, 알겠지? 내가 다 없애줄게!”

다시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키득거리는데, 그 내용만큼은 순진무구하지 않아서. 소름이 돋는 건 어쩔 수 없는 생존반응인가보다.

“어쨌든. 일단 넌 꼭 탑에 붙어있어. 나도 남방탑장으로서 밀린 일이 많아. 어머니도 찾아야하고... 아 그리고, 빌이라고 알아?”
“네?”
“…아냐아냐, 잊어버려. 그냥 희망론이야.”

빌. 빌이라. 굉장히 흔한 이름이다. 그리고 조직 내에서도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녹색 매...”
“응?”
“제 집단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녹색 매라는 별칭을 가진 사람이 있었어요. 이름이 빌이였죠.”
“…성은?”
“그건 잘 모르겠네요. 빈민촌 출신이라고 했으니 어쩌면 성이 없을지도요?”
“성이 없다, 라.”

베키시가 재미있다는 듯 입고리를 올렸다. 사악해보이기도 하고. 어린 아이가 장난이라도 치는 것 같기도 하고.

여러가지 의미를 담은 웃음을 한껏 지어보인 베키시가 미켈을 짧은 두 팔로 안아 토닥였다.

“얘기해줘서 고마워. 미켈은 이만 쉬어.”
“네. 아, 혹시 세르반 바크 경은…?”
“아아, 그 놈?”

네…그러니까…그놈이요.

“감히 탑의 제약을 무시하고 너를 그곳에서 머물도록 묵인하려했잖아. 처벌은 피해갈 수 없을걸. 아무리 바크 가문이라고 해도 처벌이 없으면 이래저래 말이 많아질 거야. 이해하지?”

부드러운 손길이 조심스럽게 몸을 벗어났다. 저를 보고 웃는 베키시를 마주보았다.

“하지만, 경은 제 말을 따라준 것 뿐이에요. 잘못이 있다면 저죠. 그러니까…”

“미켈.”

아아, 미켈.

“너는 정말로 착한 아이로구나.”

쓸데없이. 정은 많아서.

“하지만 말이야.”

그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네 위치는 어디지?”

가장 위잖아.

우리를 통솔해야 하는, 다섯탑의 주인. 세계의 주인이자 희생양, 재물. 우리 모두의 미래.

“그런 네가 마음데로, 탑의 제약을 무시하고, 계약과 질서를 위반하고. 안그래도 얼마 전에 공격당한 것으로 위신이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 밝혀지고 처벌을 받는다면. 그 여파가 얼마나 클지, 너를 사냥감으로 잡아 달려드는 자들이 얼마나 많을지, 네가 그리 소중히 여기는 조직이 어떤 위험을 고수하게될지.”

너는.

“아니?”

네게 짊어지어진 짐이 얼마나 많은지. 이미 벅차서 감당할 수 없는 주제에.

“…….”

네가 그걸 짊어질 힘이 있다면 모를까.

질책하는 푸른 눈이 평소의 가벼운 분위기와는 상반되어서. 미켈은 입을 다물었다.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베키시는 다시 싱긋 웃어보이고는 다른 말 없이 방을 나가버렸다.

“…하.”

나이만 먹었지, 머리는 꼬마아이가 된 기분이였다. 알고 있다. 지금 내가 어떤지.

하지만 도저히 가만히 베길 수는 없었다.

“이유만 생기면.”

내가 그 처벌에 끼어들 수 있는 무언가의 이유만 생긴다면.

평소에 굴리지도 않던 머리를 굴렸다.

“경은, 세르반 바크는. 내, 기사지.”

그래. 내 기사고, 내 소유물이다. 나는 그의 두 번째 주군이 되었으니까.

“뒷바라지 하러 가야겠지.”

역시 총책임자라는 직책은, 이럴 때 써먹어야 제맛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낀 미켈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베키시의 경고가 머릿속에 아른거렸지만 이내 말끔히 지워버렸다.

[후회할 짓은 하지마]

그래서, 오늘부터 후회할 짓은 안 할 생각이다. 미련 남을 짓도, 그만둘 생각이다.

어쩌면 베키시와 척을 지더라도 상관없다.

어차피 나는 죽을테니까. 멍청하게 죽음만 기다리다간 내 손의 것을 빼앗길 것 같아서. 나만 죽으면 될 것을, 내 사람들까지 잃게 만들까봐.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은 강해진다.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은 강해진다.
자신을 포기한 사람은, 강해졌다.

나를 포기한 대신 다른 이들을 포기할 수가 없어서, 이왕 희생할 겸 좀 나대보기로 했다.

* * *

말갛게 꽃이 피었다. 산들바람에 흐드러지는 꽃이 피었다.

누군가가 꽃에 물을 주었다.

[나의 분신, 나의 피사체.]

너를 마지막으로, 이 세계의 벌은 끝을 맺으니까. 나를 향한 벌은 끝을 맺으니까.

나를 탓하라고 이르고 싶었다.

하지만 닿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대신 물방울이 맺힌 꽃을 쓸어내렸다.

신이라고 불리는 자신이였지만, 사실 신은 아니였다. 이 세계의 신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저 방관자만이 존재할 뿐이였다.

방관을 하다보면, 수많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제발! 제 아이를 살려주세요… 신이 있다면!’
‘젠장, 신은 저딴 놈을 왜 살려두는 거야!’
‘미천한 신의 종이 비옵니다. 제발 노여움을 푸시고 비를 내리시어 주시옵소서…’

가끔은 애절한 사랑을, 가끔은 누군가에 대한 원망을, 또 가끔은 모두를 위한 바람을 외치면서 신을 찾는다.

[미안합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미안해요. 정말, 내가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제게 세계에 개입하는 힘이 있었다면. 그대들을 어떻게든 도와드릴 수 있었을텐데. 제가 약한 탓입니다.]

울었다. 아무 힘도 없는 내가 미워서.

그렇게 수백년을 울면서, 그간 축적되어 있던 모든 힘을 덜어, 하나의 신언을 내렸다.

[은빛 나비는 바위에 내리앉을 것이며 그 바위는 반짝이는 칼리스(제국어로, 보랏빛 다이아몬드)이니, 쪼개어 푸른 하늘이 쏟아질 것이다.]

그들에게 숭배되던 은빛 나비의 빛깔과 신의 눈 색을 가진 인간을 찾아라. 그 피가 푸르다면 하늘의 뜻을 이어받은 자이니 추앙하라.

그리고 희생시켜라.

세계를 위해 나의 일부를 죽이고 죽여,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일종의 순환. 그 순환의 고리가 이토록 긴 족쇄가 되어 옭아맬 줄은 몰랐다.

고통 속에서 죽어갔던 나의 분신들은 나에게 되돌아오기를 거부했다.

‘당신이, 나를 죽인거야! 내가 당신의 장기말도 아니고, 어째서 이딴 악질적인 짓을…!’
[나는 세계와 인간을 구하기 위해 방법을 찾아냈던 것 뿐입니다.]
‘소수의, 나의 희생은 뭐가 되는 거지? 나는 인간이 아냐? 이렇게 의지를 가졌고 생각을 가졌는데, 너라는 신 새끼의 일부라는 이유로 당신이 바라는 염원의 주체에서 출퇴당한거야?’

같은 색의 눈동자. 인간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아들과 딸 같은 나의 아이들을 마주했다. 원망으로 얼룩진 그들을 마주했다.

[나는… 모두가 행복하길 바랬습니다.]

나의 아이들은 그 말을 부인하며 정처없이 떠돌다가 흩어져버렸다. 나는 하염없이, 내 일부가 흩어지면서 남긴 그 원망의 목소리와 울분의 감정을, 떠안을 뿐이였다.

[곧, 모든게 끝이 난다.]

저 소년을 마지막으로 그토록 쏟아부웠던 신언의 효력이 다하게 된다.

[지쳤어.]

비난을 듣는 것에는 도가 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대면한 상태에서 막말을 듣는 건,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막말의 파편이 온몸을 햘퀴고 지나가는 느낌.

[이제.]

그만 아프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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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1-02-09 08:34 | 조회 : 815 목록
작가의 말
하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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