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5 백색 꽃(2)

“미켈?”
“그래, 미켈.”

아이가 눈을 빛내며 청색을 올려다보았다. 궁금증에 가득 찬 눈빛이 무슨 뜻이냐고 묻고 있었다.

“미켈은 고대어로 미카엘이라고 해. 옛날에는 그런 이름의 대천사가 있었다고 하지. 여전히 세상에 남아서 등불이 되고 있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아이가 작게 감탄사를 뱉었다. 그리고 방긋 웃었다. 작은 두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온전한 내 이름이야.

아이는 행복했다.

ㅡ과분해.

알고 있어.

ㅡ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

그래도, 한 번쯤은 괜찮지 않을까. 오롯이 내 것이 생기는 것도.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들은 내게 친절했다. 모두가 나를 잘 보살펴주었다. 그들의 사랑에 힘입어 나는 금방 서클을 개방했고, 금방 대마법사의 8서클까지 열었다.

나를 탑에 팔아버릴 거라는 개소리, 아니 헛소리를 늘어놓았던 청색은 결국 날 팔지 못했다. 정확히는, 팔지 않았다.

“10바퀴 추가!”

대신 내 체력 선생 담당을 맡았다. 마법사의 자질은 차고 넘쳤지만 유약한 몸이 견디지 못해서 툭 하면 쓰러져버렸기 때문이였다.

그 외에도 기초 검술, 간단한 정령술 등을 집단의 사람들로부터 익혔다. 그들은 흔쾌히 좋은 친구이자 스승이 되어주었다.

내가 10살이 되었을 때 쯔음에는 전투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청색의 울타리 안에서 간단한 마법적 도움을 주는 것에 그쳤지만, 집단의 마법사 중에서는 최강이였기에 꽤나 유명했던 모양이였다.

그때 붙었던 칭호가 백색 꽃, 대외적으로는 에리카다. 비슷한 때에 청색 역시 파랑새에서 청색 꽃으로 승급했다.

“청색.”
“스읍, 왜 자꾸 반말질이냐.”
“옛날부터 반말 썼잖아.”
“그때는 네가 어렸을 때고, 제국어를 잘 모를 때였으니까 넘어가준거거든?”

고개를 갸웃, 했다가 그냥 웃었다.

“나 아직도 어려요.”

청색의 시선이 잠시 내 정수리에 머물렀다. 그의 허리깨를 맴도는 키를 보고 청색은 혀를 쯧, 찼다.

“그래, 어리지.”
“응, 맞아. 그러니까 반말 쓸래.”
“그러던가.”

억지를 섞은 주장이였지만 청색은 작게 웃기만 할 뿐이였다. 그리고는 나를 슬쩍 흘겨보았다.

“네 말마따나 넌 어리니까 제발 나서려고 하지 좀 마.”

얼마 전에도 전투에 나갔다가 청색이 날아오는 암기를 맞을 뻔 했을 때, 그를 대신해서 몸을 날렸던 전과가 있었다. 물론, 장장 3시간동안 청색한테 잔소리 들었다.

“뱁새 주제에, 버릇없어 보이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혼자 놀라서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느껴졌다. 내가 무슨 개복치인 줄 아나. 그정도로 막 눈물 글썽거리면서 상처받았다고 할 줄 아나보다.

“흥, 청색도 똑같잖아. 전에 지하 암시장에서 노예들 풀다가 6서클 만났을 때, 괜히 나섰다가 임에게ㅡ”
“아악, 그만! 내가 미안하다, 뱁새야.”
“뱁새라고 안부르면 생각해볼게.”
“정말 미안하게도, 그건 못하겠는데.”

입에 공기를 빵빵하게 넣어 부풀리니, 청색이 크게 웃었다. 으하하핫, 하는 호탕한, 청색 특유의 넉살스러운 웃음.

화목한 오후였다.

실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청색과 수다를 떨고 있는데 갑자기 막사 안이 시퍼런 빛으로 찼다. 수정구가 빛나고 있었다.

[청색님, 백색님, 임의 전언입니다! 누군가가 국경을 넘어, 울타리에 침입했다고 합니다. 은밀히 움직여 포획한 후 필요시 사살하라 하시더군요.]

방의 가운데에 위치한 책상 위의 수정구를 중심으로 소리가 울렸다.

“우리보고 그런 전언을? 우리는 밖의 담당일텐데.”

[임께서 그리 전하라 하셨습니다. 저도 이유는 잘…]

“…알았다. 그러도록 하지.”

청색이 수정구 아래의 검은 화면을 터치했다. 곧 수정구가 꺼졌다. 꺼진 걸 확인하자 청색이 곧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임은 대체 무슨 생각이신건지.”

누가 들었으면 바로 쫓겨날지도 모르는 말을 서스름 없이 내뱉은 청색이 침대에서 뒹굴거리던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뱁새야.”
“아, 쫌!”

쏘아붙이면서 웃었다. 청색이 옆에 있어서 좋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나의 구원자이며, 스승이며, 친구이며, 가족인 그가.

* * *

“…꼬마?”

청색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것도, 다크 엘프의?”

그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적잖게 당황했다. 울타리 안으로 침입했다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다크엘프의 아이였던 것이다.

검은 피부와는 반대로, 백색의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대략 해봤자 5살 정도 되보이는 아이가 내게 손을 뻗었다.

“살려주세요.”

그리고 기침을 몇번 했다. 할때마다 검붉은 피가 모래바닥에 흩뿌려졌다. 멍하니 그 장면을 보고 있는 사이, 아이는 고꾸라졌다.

청색이 조심스레 다가가 아이를 안아들었다. 어쩌다보니 포획은 쉽게 했다. 우리가 투입된다는 말을 들었는지 이 구역의 멤버들은 보이지 않았다.

“…사살, 할 거야?”

내가 청색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청색은 나를 놀란 눈으로 내려다봤다. 뭐야, 왜?

“당연히 아니지.”
“어? 어, 응.”
“임께서 그랬잖아. 필요 시에만 사살하라고. 얘는 그냥 꼬마인데 뭘하러 사살해. 게다가 아파보이기도 하고.”

감정이 기묘하게 뒤섞였다.

“응, 그렇네.”

저 애가 내가 가진 사랑을 전부 빼앗을 것 같아서 두려우면서도, 동질감이 들었다. 나도 저렇게 바닥에 쓰러져 있었겠지. 그런 생각에.

속이 울렁거렸다.

“일단 걔 치료부터 하자.”
“그래야겠네.”

청색에게 안겨가는 동안 아이는 몇 번을 더 각혈했다. 아이의 온몸이 사늘했다. 죽은 것도 아닌데 죽을 것 같아서 겁이 났다.

“확실히 이건 문제입니다만.”

의무병인 녹빛 매가 말했다. 어깨까지 오는 감색 머리카락이 꽁지깃처럼 묶여있었다. 쓰고 있는 안경이 삐뚤어진 것 하며, 후줄근한 태도는 허당미를 키웠다.

예전의 나도 그에게서 치료를 받았었다. 그 후에는 딱히 아픈 곳이 생기질 않아서 자주 안왔었는데, 이렇게 보니 느낌이 달랐다.

다른 의무병과 다르게 유일하게 매의 자리를 가진 의무병. 한마디로 신성력이 이 집단 최강이란 것이다. 소문에 따르면 임의 전담 의사라는 말도 있으니, 말 다했다.

“이 애, 얼마 못갈겁니다.”

…뭐?

“이 병은 불치병입니다. 속이 점점 시커멓게 썩어들어가다가 결국 녹아버리는 병이죠. 방어 장비 없이 흑마법에 오래 노출되면 발병하는데, 100퍼센트 죽는다고 보면 됩니다.”

머리가 멍해졌다. 청색이 몇마디를 내뱉는게 보였다. 하지만 들리지 않았다.

“아마 발병한지 꽤나 오래ㅡ”
“다른 방법은 없ㅡ”
“병의 진행을 늦추는 것 밖에ㅡ”

삐ㅡ

이명이 들렸다. 잊고 있었다. 나는 행복한 곳에서, 밖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무섭다는 것을 핑계로 대면서.

“...켈?”

내가 멍청했지.

“미켈?!”

사실 다 알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해왔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도.

“정신차려라, 미켈!”
“좀…”

좀 닥쳐봐!

숨이 막힌다. 외면했던 공포를 직면했을때 받는 충격의 크기는 컸다. 다리에서 힘이 풀리는게 느껴졌다. 심장을 움켜지고 헉헉대는 내 숨소리가 멀어져갔다.

내가 행복할 때 나를 대신해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나는 쳐다보지 않았다.

나는 잘못을 저질렀다.

수많은 생명을 죽였다.

알고 있음에도, 내가 행복하다는 사실 하나에 만족해버리고 말아서.

“내, 내 탓이야…”

울음이 나왔다. 내가 울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처음으로 펑펑 울었다. 그 느낌은, 그저 비렸다. 저 애처럼 내가 피를 토한 것도 아닌데 입 안에 피라도 잔뜩 고인 듯, 비릿한 맛이 났다.

“무슨 소리야, 미켈!”

청색이 나를 안아들었다.

“네 탓이 아니다. 그만, 진정해.”
“흐윽…”

위에서 당황한 녹빛 매의 시선이 느껴졌다.

“저 애… 꼭, 살려주세요…”
“…알겠습니다. 살리는 건 모르겠지만, 더 악화되지 않도록 막아는 보죠.”

입 안에서 굴리던 말을 뱉었다. 역시 비릿했다.

청색에게 안겨 헐떡이는 사이, 녹빛 매의 두 손에서 빛이 뿜어져나왔다. 커다랗게 응집된 순도 높은 신성력이 죽어가는 아이를 감쌌다.

“아윽, 흐으…”

아이는 버거운지 몸을 뒤틀었다. 눈물로 흐릿한 눈동자로 끝까지 아이를 응시했다. 신성력에 싸여진 아이의 숨이 고르게 변할 때까지, 나는 그녀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온하게 잠든 아이가 보일 때까지.

청색이 나를 응시했다. 그가 투박한 손으로 눈물에 젖은 내 얼굴을 쓸어내렸다.

“미켈, 무엇 때문에 네가 그렇게 반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네가 잘못한게 아니란 거다. 걔가 죽어가는 게 왜 네 잘못이냐?”

그가 짧게 숨을 뱉었다. 그리고 나를 번쩍 들어올려 다크 엘프 아이가 잠든 침대에 내려놓았다. 친히 눞혀서 이불까지 끌어올려준 그가 씨익 웃었다.

“좀 자라.”
“…응.”

그때부터, 내 옆에 누워있는 이 작은 아이는 내 동생이 되었다.

* * *

“대충 그렇게 지냈지. 그런데 내가 13살이 됬을 때 쯔음, 탑에서 내 위치와 정체를 알아냈어. 엄청난 군대를 몰고 이곳으로 왔고, 그들에 의해 많은 사람이 죽었어. 집단의 최고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임은 몇몇 센 놈들만 데리고 도망가버렸고, 남겨진 사람들은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서 맞서 싸웠지.

탑의 군단은 엄청나게 강했어. 이길 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절반 정도가 몰살당하자 그제야 탑은 제안을 해왔어.

나를 내놓는다면 나머지는 살려주겠다고.

청색을 비롯한 몇명은 절대 안된다고 했지만, 난 그냥 자진해서 나섰어. 대신 중앙탑장인 셰이드와 계약을 하나 맺었지.

내가 탑의, 세계의 희생양이자 왕이 되는 대신에 내가 죽기 전까지 날 극진하게 대우해주고, 살아있는 멤버들을 위해 매달 100골드씩 지원해라고.

셰이드는 흔쾌히 계약을 이행했고, 그 후로 나는 이 집단이 잘 유지되고 있다는 소식만을 들을 수 있었을 뿐, 다른 소식은 듣지 못했어. 그런데 그 다른 소식중에 내 동생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이 있었던건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세르반이 당황해서는 헛기침을 했다.

“그렇게 되신 거군요.”
“그래.”
“꽤나 담담하시네요.”
“시간이 약이라고 하잖아. 처음 탑에 들어왔을때는 몇번이고 혀 깨물고 죽으려 했었단 말이지. 근데 이제는 다 놓아버려서, 그런 충동마저도 들지 않아.”

웃기지?

세르반은 돌이라도 씹은 듯한 표정으로 또다른 자신의 주군을 바라보았다.

노을이 다 지고,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중앙탑장님께 연락 안하셔도 됩니까?”
“아, 맞다. 내가 한댔지.”

미켈이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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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11-01 12:08 | 조회 : 931 목록
작가의 말
하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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