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5 백색 꽃(1)

ㅡ17년 전

[파랑새, A2. 흰 쥐 H7.]

노란 꽃이 말했다. 일명 달맞이 꽃. 금발의 머리카락이 달빛에 비추어 반짝였다. 손에 들린 마나활은 꽤나 비싸보였다.

그쯔음, 파랑새의 이름으로 활동하던 청색은 노예 경매장을 부수러 가는 길이였다.

“A2, 도착.”

나지막하게 공유기를 향해 입을 뗀 후 흰 쥐가 먼저 잠입할 때까지 기다렸다. 경매장은 지하에 있었으며, 그것도 바로 빈민가 아래여서 처음부터 날뛰기는 힘들었다.

흐윽.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작지만 확실한, 비명에 가까운 신음소리.

이제 겨우 애의 티를 벗은, 21살이였던 청색은 열의에 불타올라 있었다. 소리는 그의 뒤에서 들렸다. 어쩌면 탈출한 노예일지도 몰랐다. 결론적으로 이 작전은 노예를 풀어준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었기에, 청색은 소리가 들린 곳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흐윽, 끄, 흑.

미세하게 들렸던 소리가 더 커졌다. 신음이 아닌 울음에 가까웠다. 청색이 마른침을 삼키며 골목길을 돌았다.

작은 아이였다. 고작 세네살 정도 되보이는 아이가 바닥에 웅크려있었다. 덜덜 떠는 몸 군데군데 검푸른 피가 묻어있었다. 낡은 옷가지는 피를 가릴만한 것이 못 되었다.

“…야.”

잿빛 머리카락이 땟국물에 절어있었다. 마치, 닦아두면 희게 빛날 것처럼. 울어서 부은 눈은 보랏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로는, 피가 새파랬다. 달빛에 반짝이는 그 색이 다이아처럼 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노랑아.”

[뭐.]

“…내가 좋은거 하나 찾은 것 같은데.”

[임무 중에? 뭔데.]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가장 낮은 곳에서 웅크려 있는걸 찾았어.”

[개소리 말고.]

진짠데! 청색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부인하려다 가끔 허풍을 당당히 떨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입을 닫았다.

“…….”

[뭐야. 왜 그렇게 조용해. 설마 진짜냐?]

“…어.”

꼴깍.

노란 꽃의 마른 침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이번 한 번만 마지막으로 속아주자. 저 미친 파랑이가 뭘 찾았는지는 감이 안오지만. 진짜, 딱 한 번.

[그걸 믿습니까, 대장?]

어이없어하는 듯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흰 쥐는 이 상황이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임무는 점점 뒷전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번 임무로 반드시 점수를 따가야 하는 그에게는 꽤나 예민한 일이였다.

“야, 하양아.”

청색은 은근하게 물었다.

“총책임자 구출이랑 임무까지 성공시키자.”

[미친.]

[뭐?!]

두 사람이 경악하는 소리를 들은 청색은 느긋하게 미소지었다.

“아이는 내가 챙길게. 잠입 작전은 진행이다. 철수 아냐.”

[그걸 왜 네 마음대로!]

“마음대로 안하면 어쩔건데?”

[…….]

“내 말 믿어봐, 대장. 내가 이런 큰 건수로 설마 거짓말을 하겠어?”

청색이 바닥에 쓰러진 아이를 깨질새라 조심히 안아들었다. 제대로 먹지못해 드러난 뼈마디가 가늘었다. 여기저기 구타의 흔적도 보였다.

[…믿을게. 하지만 너, 그건 알아야 할거야. 이 사실이 거짓이라면 너는 퇴출을 면치 못할 수도 있어. 알지?]

“물론.”

흰 쥐는 별 말이 없었다. 사실 두가지 공적을 세울 수 있다는 것부터 그는 이미 물들어 있었다.

[일단은 작전을 약간 변경해야겠는데요. 총책임자는 어떻습니까. 반항은 않습니까? 혹시 기절시켜서 납치라도 해야하는 건 아니죠? 아까 아이라고 한 걸 보니 납치하는거 쉬우려나요. 아마 애지중지 키워지고 있을텐데 괜찮을까요? 아니 애초에 총책임자니까 겁나 세려나. 우리가 감당은 될까요..?]

버릇이 나왔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그대로 다 지껄이는 버릇. 흰 쥐 본인도 말을 하고 난 뒤 뻘쭘해졌다.

“괜찮을거야.”

으, 작게 신음을 흘리며 아이가 청색의 품속에서 몸을 슬쩍 뒤척였다. 잿빛으로 물든 옷이 거칠었다. 약간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이, 상처를 쓸린 것 같았다.

“응, 괜찮아.”

확실히 못을 박은 청색이 품 안에서 차갑게 식어있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당장 상처를 치료하기에는 마나가 부족했다. 애초에 청색은 마법사라기보다는 전사이자 검사였기에, 치유에는 재능이 없었다. 투박한 손이라 아이를 어르는 것 밖에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아이는 게슴츠레 반쯤 뜬 눈으로 청색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커멓게 죽은 눈이 묻고 있었다.

ㅡ당신은 나를 어떻게 할거죠.

지팡이로 때릴건가요. 상처를 헤집을건가요. 그게 아니면,

ㅡ나를…

죽일건가요.

소름이 돋았다. 새삼스레, 이제야 높은 존재를 제 손에 들고 있다는게 느껴져서, 손바닥이 너무 무거워졌다. 청색이 표정을 구겼다.

툭 치면 죽어버릴 것 같은 소년이 눈을 감더니, 축 늘어졌다. 청색은 그런 아이를 품속에 단단히 안아들었다.

* * *

작전은 성공이였다. 많은 노예들이 풀려나갔고, 총책임자, 그러니까 죽어가던 아이는 구출되었다.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할 이야기였다.

“여기, 있을래.”

아이가, 집단에 들어오게 된 이후로 단 한마디도 하지 않던 그 아이가, 처음으로 말을 내뱉기 전까지는.

“뭐..?”

어디서 개가 짖는 소리가. 아, 세상에. 청색이 왠 황당무개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두 눈을 깜빡였다.

“머물게, 해줘.”

제국어를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건지 띄엄띄엄 아이가 말했다. 아이는 어깨까지 다다른 흰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휘휘 돌리다가, 몸을 쭈그리고는 청색을 바라보았다.

청색은 당황했다. 전대 총책임자가 자리를 비웠다. 새로운 총책임자가 이리 빠르게 나타났으니 아이를 탑에 넘기고 돈을 떼먹을 작정이였다. 아이도 좋고, 탑도 좋고, 우리도 좋고.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절대로, 안갈거야, 탑.”

아이의 손가락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얼굴이 창백했다. 흔들리는 보랏빛 눈동자는 치료 받은 이후로 조금 생기가 돌고 있었다. 그 얼굴로, 작은 몸집으로, 청색의 옷가지를 붙잡고 있었다.

“야… 꼬ㅁ, 아니 애기야.”

전에 꼬맹이라고 불렀다가, 아이가 발작을 해대서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그 애를 학대하던 자가 쓰던 말이였던 걸로 추정됬다.

울면서 어눌한 발음으로 살려달라고, 잘못했다고 온 몸을 덜덜 떠는 아이를 보며 청색은 죄책감이 일었다. 좀 더 말을 걸러서 해야겠구나, 느끼면서.

“나 착한 놈이지?”
“응, 착한 놈, 이야.”
“탑에는 나보다 착한 놈 많아.”
“아니야. 너가, 제일, 착해.”

청색이 한숨을 뱉었다. 그마저도 아이가 몸을 웅크리며 움찔거리자 그 자세 그대로 얼었다가, 곤란한 듯 웃음을 지어보였다.

“애기야. 사실 나는 나쁜 놈이야. 너를 탑에 팔아버릴 거라서 말이지.”
“개소리.”
“…?!”

청색이 드물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나도 순수하고 청아한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게, 개소리라 일컫던 아이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뎅, 하고 커다란 종이 머리를 강타한 것 같았다.

“그, 그 말은 누구한테 들었냐. 그런 말 하면 못써.”
“아…”

침대에 걸터앉은 아이의 작은 손가락이 이불을 거머쥐어 주름을 만들어냈다.

“죄송,...”
“아냐, 사과하지… 말라고 하기엔 욕을…”

청색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이가 겁먹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게 떠올랐기 때문이였다.

“어쨌든 그건 좋은 표현은 아니니까. 그나저나 개소리라니, 너 내가 한 말을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거냐?”
“응.”

아, 그냥 커다란 철판이라도 하나 깔아놓은 거 같네. 단호하게 응, 이라니. 나도 상처라는 걸 받는단다.

“아이구, 됐습니다, 됐어. 것보다 애기야. 너 이름 뭐냐? 언제까지나 애기라고 부를 순 없을 거 아냐.”

저 맹랑한 꼬맹이를 어떻게든 탑에 넣어버려야겠다고 굳게 다짐한 청색이 물었다. 아이는 잠깐 침묵했다.

“…없어.”
“어?”
“내 이름, 없어. 그냥, 야, 라고만 불려서.”

청색이 비틀어진 미소를 지었다. 대체 누군진 몰라도 미친놈들. 어떻게 어린애한테. 그러다가 의문이 떠올랐다.

아무리 미친놈들이라도 정신머리가 아예 없진 않았을 거다. 총책임자로 태어난 아이를 탑에 넘기면 보호자로서 합당한 대우와 돈을 거머쥘 수 있다. 재물욕이 없는 놈이 애를 이지경으로 패서 밖에 던져둘까? 무슨 의미가 있다고?

“또,”

ㅡ이 형아는 자꾸 혼자 멍을 때려.

작게 내뱉은 아이가 침대에서 내려와 쪼르르 저를 향해 달려왔다. 손을 뻗는 아이에게 청색은 기꺼이 품을 내어주었다.

“지어줘.”
“뭐를?”
“내 이름.”

아이가 바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았다. 새하얀 백발이 들어오는 햇빛에 반짝거렸다.

청색은 홀리듯이 대답했다.

미켈(Michael, 발음을 달리하면 미카엘), 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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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10-28 15:51 | 조회 : 969 목록
작가의 말
하젤

점점 분량이 줄어드는 것 같다고요..?....기분탓이라고 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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