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 나는 이 소설의 내용을 모릅니다

폐허, 추움, 배고픔, 어둠. 모두 내가 살던 곳을 칭하는 말들이었다. 버려진 땅. 이미 바이러스로 잠식되어 황폐화가 되어버린 그 땅에서 사람의 온기는 잊혀진지 오래였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남을 죽이는 행위가 정당화되던 그 곳. 그래, 그 곳이다. 내가 있던 곳, 내게 어울리는 곳. 하지만 지금 내가 밟고 있는 이 땅은? 생기가 넘치는 푸른 식물들이 가득한 숲. 처음 느껴보는 따뜻한 온도. 처음으로 보는 하얀 구름과 태양. 어느 순간 눈을 떠보니 이곳이었다. 전부 책에서만 봤던 것들... 가만, 책?


아, 맞아. 나는 죽었었다.


***


내가 있던 세계는 바이러스로 종말의 위기에 처해있었다. 바이러스에 걸리면 초반에는 두통, 어지러움 등의 가벼운 증상이 나타나다가 후에는 폭력성과 공격성이 두드러지며 점점 인간으로서의 이성을 잃어가게 된다. 그렇게 바이러스의 증상이 심화되어갈 즈음에는 어느새 사람의 형체는 잃어버리게 되며 결국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그 살을 탐하는 괴물만이 남는다. 나는 그런 괴물들을 죽이는 소녀병이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렸을적, 부모가 구호물품을 얻기 위해 나를 노예로 팔았던 것 같다. 그렇게 팔려간 노예경매에서 나는 홀로 늑대 여섯마리와 싸워 그 가치를 인정받아야했다. 단지 '얼마나 튼튼한지 보고싶다'는 한 고객의 요구 때문이었다. 부자들이 튼튼한 노예를 원하는 이유는 자신을 괴물로부터 지켜줄 또 다른 괴물을 얻기 위함이었으니. 처음에는 무서워서 덜덜 떨었지만 늑대들이 나를 향해 달려오자, 그냥 주변에 잡히는 물건들로 아무렇게나 쥐어팼던 것 같다.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저 정신을 차려보니 그렇게 크고 무서워보였던 늑대들은 내 아래에서 피를 흘리며 늘어져있었고, 고객들은 환호하며 내 값을 불렀다. 내 손에 쥐어진 다 잡히지도 않는 커다랗고 무거운 돌맹이에는 늑대들의 피로 보이는 붉은 액체들이 묻어있었다. 내 손에도, 옷이라고는 할 수도 없는 낡은 천쪼가리도. 그때 내 나이 아홉이었다. 그렇게 나는 괴물을 죽이는 부대에 들어왔다. 정말 지옥 그 자체였지만. 허구언날 상사에게 맞고, 목숨을 걸고 괴물들과 싸워 그들의 살을 뚫고 죽이고. 때때로 생존품을 위한 세력간의 전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전장에 나가 나보다 훨씬 큰 어른들부터 내 또래의 어린 병사들의 피까지 손에 묻혀야했다. 살기 위한 살인. 결국 나는 어른들이 원하던대로 '괴물을 죽이는 괴물'이 되었다. 그렇게 21살까지 12년 동안 군에서 괴물과 적을 죽이는 '살상병기'로서의 임무를 다했다. 하지만 딱 21살이 되던 해, 나는 동료를 구하다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고 괴물이 될 바에야 그 뭣같던 생활을 끝내고 싶어 인간으로서의 죽음을 맞이했다. 총구를 머리에 가까이했을 때는 순간 닥쳐올 죽음이 두려웠으나 그마저도 나름 익숙해졌기에 곧 망설임없이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다. 종국에는 오히려 후련했던 것 같다. 그렇게 끝났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끝났어야할 인생이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왜 이렇게나 아름다운 곳에서 눈을 뜨냐는 말이다. 조금 짐작이 가긴 했지만 그럴리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예전에... 아니, 이젠 전생이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내가 병사였을 무렵, 내 몇 안되는 취미 중 하나는 시체더미나 죽인 괴물들의 옷가지에서 찾은 책을 읽는 것이었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괴물들을 죽이던 전장에 낡은 서점이 있었던 것 같은데 거길 못 간게 한 맺힐 지경일 정도로 나는 책을 좋아했다. 그야 피와 살생만이 가득한 그곳에서 내가 유일하게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동료들과 책 뿐이었으니까. 시간이 날 때마다 밤을 뜬 눈으로 보내더라도 최대한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한창 유난히 책에 빠져있던 시절, 죽인 괴물의 옷에서 작은 소설책을 발견해 가져온 적이 있다. 그 책을 줍자마자 다른 때보다도 유난히 전투나 습격이 많아져 매일매일, 하루에도 몇 번이고 전장에 나가 목숨을 걸고 괴물들을 죽이고 다녀야했기에 그 소설책은 거의 건들지도 못했지만. 제목이 뭐였더라, '쫓겨난 황자가 용사가 되었다가 다시 황제...' 아무튼 뒤에 또 뭐라고 더 있는데. 제목이 무슨 끝날듯 끝나지 않는 끝말잇기를 하듯이 엄청 길었다고. 진짜 엄청. 거의 소설 줄거리 요약문 수준이었는데. 쉬는 시간에 아주 조금 읽었던 그 책의 첫페이지의 배경묘사는 이러했다.

색바랜 쪽빛같이 환한 하늘에 안개같은 구름이 빈 곳을 채우고
투명한 산새들이 숲의 온기에 숨어 마치 시 같은 노래를 조용히 흥얼거리며
푸른색과 보라색이 웃도는 신비한 나무들이 줄을 세운 그 숲.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놀라운 건 내가 생각나는 대로의 내용이 맞다면, 내가 지금 있는 이 숲의 묘사를 그대로 읽는듯이 아주 정확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나무나 산새는 책에서 말고는 직접 본 적도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숲에 서서 숲의 모든 것을 보고 느끼고 있는 나에게는 너무나도 와닿고 알 것 같은 표현이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처음 들어보는 작은 노래들과 보라빛이 도는 나무들. 뿐만 아니라 생전 알지도 못하는 신기하게 생긴 생물들이 가득했으며 고개를 올려 바라본 하늘은 생전 처음 보는 아름다운 푸른 색의 하늘이었다. 우연의... 일치일까? 그렇지 않은가, 살다살다 소설 속으로 환생하다니 말이야. 말도 안된다. 증거도 별로 없...다기엔 정황상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지만...

하지만 정말 내가 소설 속으로 들어온 거라면? 제목도 다 기억나지 않는 그 과거 인간들의 심심풀이용 소설 속으로 환생한거라면? 그게 다 진짜라면 이건 신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전생에 내가 너무 힘들게 살았으니까. 괴물이라고는 해도 너무 많은 인간을 죽였으니까. 남을 괴롭게 하고 나도 괴롭게 했으니까. 행복이란 단어를 느껴보기는 커녕 21년이라는 인생 동안 그저 잊고 살았으니까. 그래서 그 보답으로 주는 안식 같은 것이 아닐까. 새 삶을 시작하라는. 만약 그런거라면 진짜 기쁘고 잘 살아볼 의향이 충분히 있는데...그런데 만약 그게 정말이라면 걱정되고도 불안이 되는 요소가 하나 있다.

나 그 소설 한 장 밖에 안 읽었는데...


***


정말 아깝군. 난 왜 그 소설을 끝까지 읽지 않았던 걸까. 만약 내가 소설 속으로 환생한 것이 아니더라도 그 소설과 지금 내가 있는 세계가 아예 연관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비슷한 구석이 있으니 최소한의 단서가 될 수도 있었겠지. 그 소설을 완독했다면 지금 내가 이곳에서 이렇게 시간만 허투루 보내지는 않았을텐데 말이다. 우선 확실한 것은 내가 이 소설 속으로 환생했다는 것이 거의 기정사실이라는 것이다. 숲 곳곳을 돌아다닐수록 소설 속 내용이 생생히 떠올랐다. 마치 다시 그 소설 속 내용과 내가 보고 있는 이 광경들을 매치시켜주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뭐 그래봤자 결국 난 소설을 한 장 밖에 안 읽었지만. 사실 아까까지만 해도 신의 기회니 뭐니 하긴 했지만 정말 내가 소설 속으로 들어왔으리라고는 마음 한 켠으로는 좀... 안 믿었다. 안 믿고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안 믿기고. 아무튼 내가 소설 속으로 온 것이든 아니든 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정보가 필요하다. 그 어떤 정보든 말이다. 해서 내가 요 며칠동안 이 근방을 돌아다니면서 알게 된 것들을 정리해보자면...

1.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내가 소설 속으로 환생한 것은 거의 맞는 듯 하다. (원래 세계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희귀하고 신비한 생물들이 이 숲에 가득하다. 물론 전부 소설 속에서 나왔던 생물들과 생김새가 일치한다.)

2. 나는 어린 여자아이이다. 이름은 '멜리아'로 현재 여덟 살.

3. 이러한 정보들을 알려주는 것은 어떠한 '시스템'이다. 내가 궁금해하는 것들이 생기면 머릿 속에서 이미지 창 같은 것을 띄워 알려준다. 마치 게임처럼. 때때로 목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잡담에는 대답하지 않는다. ('시스템'이라는 이름은 이것을 딱히 뭐라고 부를 말이 없어 내가 정한 이름이다.)

4. 특별한 일 없이 무료한 하루를 보내고 잠에 들면 '시스템'이 [해당 페이지의 모든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다음 페이지로 넘어갑니다.] 라는 창을 머릿속으로 띄운다. 약간 꿈 같은 개념인 듯 한데 그 창이 띄워진 후 다음 날로 눈이 떠진다.

5. 가끔 손에서 검푸른 색의 물질이 나온다. 딱히 만져지지는 않지만 뭘랄까, 음... 연기 같은거라고 해야하나? 왜 나오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것의 형상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면 바로 손에서 나온다.

뭐, 대충 이 정도이다. 특히 '시스템'과 내 손에서 나오는 정체 모를 검푸른 것이 제일 신기하다. '시스템'한테 말을 걸어보기도 했지만 사소한 수다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오직 내 생존과 관련된 궁금증에만 반응하는 것 같다. 검푸른 물질은 나도 아직 잘 모르겠다. 처음에는 신기해서 매일 꺼내고 놀았지만 지금은 이걸로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그저 심심할 때 이걸로 그림이나 그리며 놀 뿐... 하지만 이 정도로는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숲에서 나가보려 해도 길을 잃어 헤메다가 다시 있던 곳으로 돌아오고. 그나저나 이 '멜리아'라는 애, 그러니까 내가 환생한 이 아이는 왜 이 숲에 있었던 걸까. 소설 속에서 중요한 인물인가? 아, 나는 왜 그 소설을 한 장 밖에 읽지 않았을까. 생각할수록 아깝고 원통하다. 그래도 한 장 밖에 안 읽었지만 천천히 내용을 되짚어보자. 음, 첫 페이지에서는 성에서 쫓겨난 황자가 도망치다 내가 지금 있는 이 숲까지 다다른다는 내용이었지. 그 다음 페이지에서는 그러한 황자가 어찌저찌 밤까지 숲에서 버티다가 '마물'이라는 것과 만나고 전전긍긍. 그러다 숲에 있던 다른 누군가가 나타나 마물을 죽이는... 그런 내용이었는데. 그 누군가가 대체 누구인지도 내가 읽었던 페이지까지는 나타나있지 않고.. 하, 어쩐다. 내용이 너무 애매하게 끊겼어. 게다가 내가 며칠간 숲을 나름 구석구석 돌아다녀보았을 때 소설 속 황자의 옷차림과 일치하는 아이는 본 적이 없다. 하물며 밤에 그 '마물'이라는 생명체도, 다른 사람들도 전혀 마주친 적이 없단 말이다. 아직은 소설의 내용이 시작되지 않았다는 건가? 아니면 정말 우연의 일치로 장소만 유사한 것 뿐? 그것 말고 다른 단서는 없을까.

아니다. 이것만으로도 꽤 큰 수확을 낼 수 있다. 만약 내가 제목도 잘 기억나지 않는 그 소설 속으로 환생한 것이 맞다면 가까운 시일, 멀더라도 언젠가는 꼭 그 황자와 마물이 이 숲에 나타날 것이다. 그들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된다면 내가 이 소설 속으로 들어온 것이 확실해지는 것. 그렇다면 이곳에서 그들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건가? 그들이 빠른 시일내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나는 평생 이곳에서 황자만 기다려야하나. 그러다가 그가 오지 않으면? 마물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내가 소설 속으로 환생한 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나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의 상태에서 무엇을 할 수 있지? 이 숲을 나갈 방법도, 설령 나간다고 해도 그 앞에 어떤 것들이 있을지 모르는데. 십 년이 넘도록 전장에서 피 냄새를 맡고 자란 나의 감이 말해준다. 이곳은 위험하지 않아. '아직'은 말이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평화로움 속에 곧 닥쳐올 폭풍우가 숨어있는 듯 했다. 워낙 어릴 때부터 적을 감지하고 인간의 몇 배에 달하는 신체조건을 가진 괴물들을 빠른 순발력으로 죽여야했기에 그런 쪽의 감은 한번도 틀린 적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쩌겠는가. 여기는 이전에 있던 세계와는 영 다른 곳 같은걸. 결국 난 모르는 것 투성이다. 이 '감'도 이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래, 믿을 수 없는 것 투성이기도 하고.

하... 모르겠다. 알 방법도 없는 정보들을 찾을 수도 없고. 우선 그냥 흘러가는대로 두어보자.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다보면 언젠가 내가 해야할 일이 생기겠지. 그러니까 어디가지 말라고 날 여기 붙잡아두는 것이 아닐까, 이 세계는. 어차피 오늘 하루도 지루하리만큼 평화롭고 심심하고 무료한 이 일상을 끝마치고 자면 내일 아침으로 이어질 것이다. 늘 그랬듯이. 잠시 생각하던 것을 멈추고 그 자리에 털썩 누웠다. 예쁜 색깔의 풀들이 푹신하게 내 등을 받쳤다. 누워보니 어느새 어두워진 밤하늘이 보였다. 반짝거리며 빛나는 별들이 이곳저곳 사방에서 춤을 추는 듯 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정확히는 못 하고 있는 나를 약올리는 것 같기도. 이전 생에서는 절대 볼 수 없었을 광경들, 그리고 절대 누릴 수 없었을 일상들. 평화, 지루함, 나른함. 이제 나도 그런 단어들이 익숙해지는 삶을 살 수 있는 건가. 생각보다 더 괜찮을 걸지도 모른다, 이 세계에서의 새로운 삶은. 오히려 전생에 비하면 더할나위 없는 행복이겠지. 내가 지금껏 바래왔던 것이니까. 그러니 하루빨리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해야 할 일들이, 하고 싶은 일들이 생겼으면 좋겠다. 눈을 감았다. 풀벌레들의 소리가 자장가 마냥 들려왔다. 곧 있으면 잠에 들 것만 같다.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있어도 결국 하루는 가는구나. 그렇게 잠에 들었다.

아니, 잠든 줄 알았다.


[해당 페이지의 모든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셨습니다. 해당 페이지의 시작으로 귀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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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8-27 00:37 | 조회 : 906 목록
작가의 말
몽시.

첫 작입니다. 미숙하지만 오랫동안 뵙고 싶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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