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입학식

밤에는 숙소를 잡아서 쉬고, 일어나서 아침먹고 마차를 하루종일 타는 일정을 며칠내내 소화해낸 나는 상당히 지쳐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고된 일정은 어제로 막을 내렸고, 지금 나는 켈른과 맞닿은 로아의 국경마을, 라노아의 숙소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 그녀의 부재를 증명이라도 하는 듯 몰린 학생들 때문에 늦게까지 빈 방을 찾아다닌 우리는 자정을 넘어선 시각에 겨우 숙소를 찾을 수 있었다. 오빠도 나랑 똑같이 늦게 잤는데 어째서인지 나보다 일찍 일어나 아침을 먼저 먹었다. 하루에 시작을 혼자 한다는 건, 상당히 별로였다.

애써 별로인 기분을 무시하며 로비에서 아침을 먹고 나갈 준비를 마치고 나니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초췌한 얼굴에 어두운 남색 머릿결, 먹구름이 잔뜩 낀 듯한 눈동자를 가진 여자아이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생기잃은 눈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내 기분 상태를 솔직하게 드러나는 눈동자는 몽환적으로 보이게 만들 수 있었다. 살짝 홍조를 띄고는 입꼬리를 올려 보니 이정도면 누가 나한테 먼저 말을 걸어올 정도의 호감형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얼굴이 되었다.

오빠가 잘 때도 몇번씩이나 웃는 연습을 한게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하며 오빠와 만났다. 둘 다 일찍 나온 상태였기에 여유롭게 학교로 들어갈 수 있었다.

펄럭거리는 정문에 크게 걸린 현수막.

<윈프레드 입학을 환영합니다.>

꽤나 시끄러운 한 해가 될 것을 직감하며 안내방송을 따라 교정을 찾아갔다.


"아아. 흠, 안녕하십니까, 윈프레드를 방문하신 여러분. 본교를 대표하여 학생회장 비앙카 인사드립니다. 올해는 각별히 엘라이스와 라이오네에서 학생분들을 본교의 학생들과 더불어 교환학생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우리 3학원은 마녀들을 칭송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마법이 뛰어난 엘라이스는 빙설의 마녀를, 검술이 뛰어난 윈프레드는 바람의 마녀를, 힘의 질서를 중시하는 라이오네는 힘의 마녀를. 이제부터 우리는 사회의 계급은 잊고 모두가 평등한 학원 생활을 하게 됩니다. 국적도 계급도 학원 안에서는 통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니까요."

안쪽으로 말린 핑크색 단발머리와 착해보이려 애쓰는 표정, 그러나 핑크색 눈동자는 오만함으로 가득차있었다.

대놓고 험담하지는 않았지만 난 이미 리아를 통해 저 여자에 대해 조사해서 알고 있었다.

비앙카 로즈코코 로아임, 로아의 1왕녀이며 윈프레드의 학생회장. 실제로 만난적은 없지만 과거와 인간관계, 스펙등을 완벽하게 조사한지 오래였다. 과거의 어느시점을 보든 한결같이 귀족사회에 찌든 오만함을 자랑하던 그 여자는 지금 안어울리게 '평등'을 주장하고 있었다. 헛소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겁없는 누구누구가 험담을 시작했다.

"웃기시네, 로아의 왕녀인거 내세워서 학생회장이 됬는데 평등은 무슨 평등? 온 대륙의 왕족과 귀족, 평민들이 모였는데 그게 가능하겠어?

"그러니까!"

오빠의 뺨에 난 갑질의 상흔을 살펴보며 조용히 찬성했다.

누가 겁도 없이 험담을 하는지, 그 얼굴이 궁금해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재학생으로 보이는 두 남학생이 기둥에 기대서 뒷담을 까고 있었다. 내가 워낙 빤히 보기도 했고, 그 둘도 윈프레드의 학생이긴 한건지 눈이 마주쳤다. 둘의 눈동자의 당황이 서려있었지만 난 동요하지 않고 싱긋, 웃어보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어지간히 얼굴을 붉어졌는지 고개를 돌려도 붉은 기가 보였다.

'이거 괜찮은데?'

시험삼아 해봤는데 의외로 효과만점이라며 들떴다가, 이제 나랑 관계없는 아이들이라 생각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앞쪽에선 왕녀가 가식적인 연설을 계속하고 있었고, 그 뒤엔 학생 회장이 미소짓고 있었다.

'영업용 미소.'

난 잘 알고 있는 미소였지만, 다른 학생들은 관리를 잘한 듯한 긴 레몬색 머리카락과 그에 어울리는 시원시원한 터키색 눈동자에 빠져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아, 그래. 이름이 '일리아' 였던가. 침식된 땅에서 데리고 왔다는 로아에서 다음 바람의 마녀라고 밀어주고 있는 아이.

마녀임을 증명하는 건 '각성'일 뿐일텐데. 징조와 함께 힘이 개방되는 1차 각성부터 모든 힘이 완성되는 2차 각성까지. 각성도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의 확실한 '증거'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짜증나.'

역겨웠다. 그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텐데 멀쩡히 다른 사람들 앞에 서서 그녀의 흉내를 내는게. 양심이 있기는 한건가.

"다음으로 엘라이스 대표의 인삿말을 듣겠습니다."

잘보이려고 한껏 힘을 준 목소리가 내 상념을 깼다. '엘라이스 대표'라는 말을 듣자 여자아이들은 정말로 황태자가 나올지 기대하며 근처의 친구와 자신의 궁금증을 나누었다.

'글쎄. 내가 알기로 엘라이스 대표는...'

"안녕하십니까. 엘라이스 대표 시리우스 린."

"리네 입니다."

시리우스 가문의 두 자매. 그들은 추운 켈른에서 와서 그런지 털이 붙어있는 동복을 입고 있었다.

언니임에도 키가 작은 린은, 자신의 연보라빛 머리카락을 흰 장미로 고정해 내린 양갈래머리로 묶었고, 반짝반짝 빛나는 두 눈동자는 기대에 가득차 있었다.

동생임에도 키가 큰 리네는, 자신의 연보라빛 반묶음 머리를 똑같이 흰 장미로 고정해놓았고, 반짝반짝 빛나는 두 눈동자는 자신의 언니에 대한 애정을 보여줬다.

"우린 서로 모든게 다르지만, 화합하면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둘이 발표를 끝내자 학생들이 술렁였다. 이야기의 주제는 대부분 왜 황태자가 나오지 않았냐, 였다.

"왜 황태자가 아니지?"

얼굴을 돌렸던 남학생 중 한 명이 다른 학생에게 물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생각해보니 그동안 붉어진 얼굴을 가라앉히고 있었나 보다.

"뻔하지. 이미 마녀가 있는 켈른인데, 황태자를 보내겠어?"

옆에 남학생이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설명했다. 질문했던 남학생이 순순히 납득하자 '재미없어졌다' 라고 생각하던 순간, 두 학생의 어깨의 웬 팔이 올라왔다.

'?'

남학생을 살펴보니 아는 사이는 아닌 듯 한데, 불청객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낯이 얼마나 두꺼운거지.'

태양처럼 찬란한 금발, 햇빛을 담아 만든 듯한 빛나는 눈동자. 꽤나 수려한 외모였다. 나름 눈여겨보고 있던 장소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자 꽤 재미있어졌다.

"흐음.."

어느새 나는 턱을 괴고 그들을 구경했다.

"그래서만은 아닐걸... 소문 못들었어? 제국의 황태자가 밖에 내놓기 창피할 정도로 망나니라던데? 학원은 예저녘에 때려쳤고, 제국정세엔 관심도 없는데다, 여행광이라 지금 어딨는지도 모른다더군!
거기다 허구한 날 여자나 꼬시고 다닌다지?"

사실에 가까운 소문을 건들건들거리며 설명을 끝낸 그 아이는, 황태자가 어떻게 행동한다는지 직접 보여줬다.

"이로케. 후우~"


그의 희생양은 귀에서 느껴지는 숨결에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우와아악! 소름끼쳐! 넌 누구야!?"

"나? 길 잃은 신입생~☆"

방긋,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친한척을 하던 그는 어느새 사라진 둘이 있던 자리를 보며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봤자 다 들리긴 했지만.

"말도 안 끝났는데.. 디게 팍팍한 친구들일세.."

정말 왜 그들이 자리를 떴는지 모르는 걸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의 눈에 우리가 들어왔다.

"여어, 혹시 너 교정 가는 길,"


여어, 라고 말을 걸어왔을 때 혹시 나한테 하는 말인가 의심했지만, 곧 오빠에게 하는 말이란 걸 깨닫고 급히 내가 말해줬다.

"신입생이니? 교정은 이 복도 따라가서 왼쪽으로 꺽으면 나와."

옆에서 오빠가 한숨을 쉬려다 멈칫, 한 것 같지만 일단 제쳐두고 내 앞에 서 있는 이 해맑은 아이에 집중해야했다.

"이야, 고맙다! 난 렌이야!"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주고 악수하자는 듯이 내미는 손에 잠시 움찔했지만, 곧 반갑다는 듯이 웃으며 악수했다.

"그래, 반가워 렌. 나는 베키라고 해."

이름 정도야 상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알려주었다. 우리가 통성명을 하던 그 때, 안내방송이 다시 들려왔다.

"마지막으로, 라이오네 대표 힘의 4대. 뮬의 인삿말입니다."

아무말 없이 악수하던 우리 사이를 깨고 들려온 왕녀의 목소리 덕분에 렌의 신경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쟤가 뮬이구나. 얼마전에 전승받았다는.. 키가 좀 작네. 저런 소녀가 괴력의 마녀라니."

그 뒤론 이미 알고 있고, 묻지도 않은 잡다한 지식에 대해 늘어놓았다. 란테 왕국 공작가의 딸이라느니, 그래서 란테를 수호국으로 정했다느니, 덕분에 란테는 경사났다느니.

"글쎄..."

"어?"

"아니, 별건 아니고. 정말 좋을까, 싶어서. 역대 힘의 마녀는 모두 이실라 출사이었잖아. 혹시 출신 때문에 따돌림을 받는 건 아닐까?"

렌은 멍 해보였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줄 몰랐겠지.

뮬이라는 아이는, 많이 긴장하고 있었다.

"에.. 어... 음..."

분명히 대본을 보고 외웠을텐데 말을 꺼내지 못하고 더듬거리기만 하는 게 명백한 그 증거였다.

"으므으므으므...!!"

괴상한 소리를 내며 마이크를 꽉 잡자, 그대로 마이크가 부서졌다. 시끄러운 굉음이 교정 전체에 울리자 뮬은 연신 사과를 해댔고, 아까 이렇게 될 걸 예상하고 잡담하던 라이오네의 교환학생들이 호탕하게 비웃어댔다.


"지병이 있어서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였다는데, 마녀의 힘을 전승받고는 저렇게 건강해졌대."

나처럼 가만히 구경하던 렌이 말을 시작했다.

"마녀의 힘은, 곧 죽을 사람도 살릴 정도의 마력.. 마녀를 가진 나라는 부강해지지.."

'그래서 켈른이 그렇게 강한 거였나..'

"가지고 싶어."

'!'

"너, 방금 뭐라고.."

충격받아서 중얼거린 내 말을 못들은 건지, 계속 말을 이었다.

"이 학원 안에 있을까. 그렇다면 과연 누가 각성하게 될까."

그래, 여기까진 이해해줄 수 있다.

"그리고 그 강대함을 차지하게 되는 건 누구일까."

'표정 관리 때려쳐.'

내 표정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노골적인 적의.

"그래, 기필코 내가 가지고 말겠어.. 그리고 내 힘으로.."

옆에 오빠의 안색이 나빠졌다.

'안좋아.'

내가 나서야한다. 오빠와 룸메이트의 사이가 벌써 나빠지면 안돼.

"자, 그만. 헛소리는 거기까지."

렌이 말하던 걸 끊고 내가 손으로 렌의 입을 막았다. 렌이 당황한 게 보였지만, 깔끔하게 무시하고 말했다.

"네가 뭔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 데, 그녀들은 물건이 아니야. 그녀들의 능력도 그녀들의 것이지, 타인의 것이 될 수 없어. 그녀들도 사람이니까."

렌도, 오빠도, 당황한 게 보였다. 렌은 아까처럼 내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해서일 거고, 오빠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내가 대신해서 이겠지.

"자, 입학식도 끝난 것 같으니 기숙사 배정표 받으러 갈까?"

다시 한 번 싱긋, 웃어주고 고개를 돌려 기숙사 쪽으로 걸어가니 둘 다 순순히 따라왔다. 오빠는 아까 렌이 말한 것 때문에 악감정이 생겼는지 둘이서 투닥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나를 의식했는지 크게 떠들지는 않았다.

오빠는 렌과 같은 방, 한 명이 더 있었지만 그건 올라가면 알게 될거니까 따로 신경쓰지 않았다. 나는 꼭대기방을 고집했고, 성공했다. 안타깝게도 내가 그 방을 고집한 의미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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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9-06 23:59 | 조회 : 997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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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모네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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