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백일몽

백일몽:
白日夢, daydream 
대낮에 꾸는 꿈이라는 뜻으로, 실현될 수 없는 헛된 공상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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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지키지 못했던 약한 것들의 피로 물든 땅이, 빛나 보이기 시작했다.
피를 철철 흘리는 마물들이 풍기는 역한 냄새가, 상쾌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이러니 했지만, 바람에 흩날리고 있는 은빛 머리카락의 주인 때문일거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네잎 클로버의 꽃말은 알고 있을 거야. 그렇지?"


처음 침식과 마주한다면 바로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이런 광경을 한 두 번 본게 아닌 그녀는 머리카락이 방해되는지 귀 뒤로 넘기며 태연하게 물었다.


"....."


'알고 있잖아. 뭐하는 거야. 말해. 말하라고! 기다리시잖아...!'


입이 안떨어지는 이유를 알고 있으면서 스스로를 몰아세웠다.


 "..행운, 아닌가요"


몇초가 지나고 난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니, 정확히는 태연해 보이려 했다. 내가 내뱉은 목소리는 마치 내 것이 아닌 듯 어색하기만 했다.


 "맞아! 우리 희야 똑똑하네!"


생전과 똑같은 그녀의 모습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짐짓 화난 척을 했다.
그래야 나도 그녀가 살아있을 때처럼 보일테니.


 "..지금 장난하십니까!..."

 "아하하! 그럼 세잎 클로버의 꽃말이 뭔지도 알아?"

 "......"

 "그럴줄 알았다니까! 아하하하!"


호탕한 그녀의 웃음소리에 더는 화낼 수 없었다. 그저 쓸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응? 우리 희야, 화났어..?"


말이 없는 나 때문에 고개를 돌리려 하는 그녀에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린다면, 우린 서로를 제대로 마주하게 되겠지.
그녀에게 이런 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이런 날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속마음과 대조되게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내 모습에 안심이 되신건지 말을 이어가셨다.


"세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야.
참고로 클로버는 각 잎마다 다 다른 의미도 가지고 있어. 첫번째 잎은 믿음, 두번째 잎은 소망, 세번째 잎은 사랑, 네번째 잎은 행운. 몰랐지?" 


믿음, 소망, 사랑, 행운이라...
어떻게 이렇게까지 나랑 안어울릴 수가 있을까. 어차피 그녀가 떠나면 더이상 난 다른 사람에 대한 믿음도, 다른 사람을 위한 소망도,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도, 그 모든 걸 이어줄 행운도,
모두 잃을텐데.


 "보통은 모를거야. 다들 관심이 없거든. 행운처럼 흔치 않은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래. 정작 힘들게 행운까지 찾을 필요도 없이 주위를 둘러보면 행복이 가득한데 말이야."


참 그녀다운 말이었다.
고개를 살짝만 돌려도 참혹한 장면이 펼쳐지는 이런 침식 속에 있어도 언제나 미소를 유지하던 그녀에게 어울리는 말이었다.


 "....그런가요...."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는지 알겠어?"

 "..글쎄요..."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단 1초라도 이 공간에 머무르고 싶었다. 그녀가 다음 말을 내뱉는 순간, 현실로 돌아갈텐데. 이곳이 현실이고 돌아갈 곳이 꿈이기를 바랬다.


 "네잎 클로버는 아주 극소수야.
행복은 네잎 클로버처럼 찾기 힘든게 아니야. 난 네가 세잎 클로버 처럼 남들의 기대에 미치치 못하더라도, 행복하면 좋겠어. 알겠지?"


그 말을 끝나고 눈을 한 번 깜빡이자, 어느새 나는 해가 없는 곳이라도 한 없이 빛나던 그녀의 주변이 아닌, 아직은 동이 트지 않아 어둡기만 한 내 방에 있었다.

아, 오늘도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구나.


"하아..."


숨소리가 꽤나 거칠었다. 입안은 바싹 말라서 쓴 맛으로 가득 찼다. 진정해야 한다.

하압...!

숨을 참았다. 이렇게 하면 진정이 되리란 걸 경험을 통해 알고있었다.


"하아..."


아무도 반겨주지 않았던 나를 향해 웃어주던 당신의 모습이 선한데, 눈을 감으면 그런 당신이 아직도 날 지켜주고 있는 것 같은데, 어째서 눈을 뜨면 당신의 바람 향기만이 가득할까.

조금 더 숨을 참고, 몸을 움직일만한 상태가 되자 서둘러 냉장고로 뛰어가려 했다. 머릿속에선 할 일을 재촉했지만, 내 육체는 처절하게 기어갈 뿐이었다.

서럽움, 슬픔, 우울함,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몰아쳐 눈물이 앞을 가려도 꿋꿋히 기어가 얼굴이 눈물범벅이 될 무렵, 화장대에 도착했다. 서둘러 머리띠를 손에 쥐고 머리에 꽂았다.


"하아... 하아..."


진정제 효과를 추가해 특별제작한 머리띠는 효과가 좋았다.

눈물이 마르자 앞이 보이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찰랑거리던 어깨를 조금 넘는 남색 단발머리는 푸석푸석했고, 눈은 퉁퉁 부어서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고, 온 얼굴이 눈물자국으로 어지럽혀져있었다.


"하...!"


'추하다' 라는 말을 제외한 그 어떤 단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또다시 눈물이 흘러넘쳤다.

알고 있었다. 현실에서는 다시 볼 수 없는 그녀였기에, 그녀의 머리카락을 보자마자 직감했다.

잔혹했다. 미치토록 보고 싶은 그녀였지만, 이런 꿈은 그녀는 이제 없다는 걸 상기시킬 뿐이니까. 확인사살 당하는 게 이런 기분일까.

그래, 백일몽이었다. 그녀는 내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나아가기를 원할테지. 나도 알고 있다. 이 모든게 헛된 일이란 걸. 내가 한심하다는 걸.

그럼에도, 난 그녀를 놓아주지 못했다.
그녀가 내가 만든 환상에 불과하더라도 1초라도 더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다.
수백번 같은 꿈을 꾸었고, 수백번 같은 선택을 했다.

휘잉-

살짝 열린 창문 틈새로 들어와 내 뺨을 긁고 가는 칼날같은 새벽의 바람은, 그녀의 곁에 있을 때 항상 느낄 수 있었던 따스한 바람이 아니었다. 그 날선 바람은 따스했던 그녀가 꿈이었다는 것, 이제는 그 꿈에서 깨었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이미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살짝 긁혀버린 볼에 흘러들어가 따끔거렸다. 그 상태로 멍하니 눈물만 흘러내리며 몇시간 동안 앉아있었다.


"베키! 베키!!"


변성기가 지났음에도 남들처럼 걸걸하지 않은 오빠의 목소리가 복도를 따라 울려 퍼질 때, 내 머리에도 울려서 머리가 아팠다. 오빠의 충격요법이 통한 것인지, 얼빠져서 울고만 있던 내가 정신이 들었다.

정신이 들었음에도 내려갈 생각은 커녕, 세실리아 님에 대한 생각만 하며 넋이 나간 내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건지, 이번엔 정당한 이유를 들어서 날 깨우기 시작했다.


"베키! 일어나! 윈프레드 안갈거야?!"

"아... 윈프레드..."


멍하니 중얼거리던 나는 오빠의 말을 뒤늦게 이해하고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윈프레드는 왕국 로아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대륙에 위치한 3개의 마법학원 중 하나로, 바람의 마녀를 칭송하기 위해 세워졌다. 현존하는 6명의 바람의 기사들 중에서 무려 3명이 교수님으로 계신 곳.

가고 싶지만, 또 한 편으로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서 온몸으로 느끼게 될 그녀의 부재가 불러일으킨 파장들이 싢었다.
자신이 8대 바람일지도 모른다고 설레발치며 엘라이스, 라이오네에서 도착한 수많은 교환학생들. 학교 특유의 시끄러운 분위기, 말도 안되는 소문들. 세실리아 님 대신 돌아온 우리 남매를 향한 교수님의 싸늘한 눈빛.
그 모든게 싫었다.

그러나 가야했다.
이대로 오빠만 혼자 간다면 관계가 더욱 멀어질까 두려웠고,
어쩌면 그녀의 가족들과의 관계가 호전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고,
무엇보다 그녀의 유언이었다.


"빨리 내려와! 놓고 간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신경질적인 오빠의 목소리가 내가 있는 위층을 향해 들려왔다.

***

세수를 하고 고개를 드니 거울에는 어제 보았던 그 소녀가 날 살피고 있었다.

피식-

명백한 '어이없음' 에서 비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렇게 추했던 얼굴이 겨우 세수 좀 한 거 가지고 원상복귀 되다니.

꿈을 꾼 탓인지 잠옷이 많이 흐트러져 있길래 옷매무새를 정리한 후 계단을 내려왔다. 언제나처럼 남색 머리칼을 가진 오드아이, 우리 오빠, 블레어가 오믈렛을 접시에 옮겨담고 있었다. 그 익숙한 광경은 나의 기분을 풀어주는데 도움이 되었다.

오믈렛은 맛있었다. 나와 서먹하긴 하지만 꼬박꼬박 매끼니를 잘 차려주기에 오빠가 날 계속 챙겨준단 걸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밥 먹을 때가 그나마 우리가 ''대화''를 하는 시간이었다.


"...어느 쪽으로 갈거야?"

"......"


오빠의 얼굴이 굳어가길래 내가 한 말을 되짚어 보았다. 그리고는 놀라 입을 막았다. 내가 무슨 말을...!

오빠한테는 마법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자신이 자각하고 있지 않고, 그 중 다른 하나는 저주로 여겨진다. 그 능력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있다고 해도, 그 능력이 없었다면 애초에 삶의 위협따윈 없었을 터이다.
그런 능력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건 당연할테고, 오빠는 검술도 잘하니 일반학생으로 가는 건 당연하다.


"... 그냥 조용히 밥이나 먹을게."


'실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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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9-04 00:37 | 조회 : 1,045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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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모네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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