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하늘, 세계(가제)-4화

그렇게 하루 일과를 마치고 달빛이 어스름한 밤,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는 길목에 만신창이가 된 창천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위라도 하려는 셈이라면 소용 없어. 난 돌아가지 않을 테니까.”

내 말에 그는 마른 웃음을 흘리더니 비척비척 내게 다가와 전쟁이 끝난 그날처럼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앞에 간신히 서서 어깨에 이마를 대고 내게 의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아무리 매정하게 굴고 있는 나라고 하더라도 마음이 약해지지 않기는 힘들었다.

“무거우니까 이거 하지 말라고 했잖아.”

내 말에 그는 낮게 웃음을 흘리더니 몸을 바로 세웠다. 하지만, 힘겨워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청해, 하늘 결계에 균열이 생겼다. 하지만 지금의 바다는 고작 이천 년 차, 너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지. 그 덕에 힘이 부족해서 내 모든 힘을 갈아 넣고 오는 길이야.”

그토록 완벽하던 결계에, 균열이 생겼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결계가 깨지기라도 하면 이 세상은 멸망이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가 손수 설계하고, 당시 우리 힘의 대부분을 소진해서 만든 결계야. 그 결계 만들고 한동안은 온몸에 삭신이 쑤셨다고. 그런 결계에, 균열이라고?”

“말했잖아. 신계에 문제가 생겼다고. 그가 정점에 군림해 있던 시절만 이십만 년이야. 그가 직접 세계를 창조하고, 정점에 군림하며 평화를 지켜왔지. 지칠 수밖에 없어. 나도 꽤 오래 하늘이었고.”

하기야, 결계의 일이 아니라면 그가 저렇게까지 만신창이가 된 것이 이해가 되지 않기는 했다.

“...일단 집으로 들어와. 얘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겠네.”

나는 그를 내 집으로 안내했다. 서울 외곽의 100평짜리 주택. 2층에 다락, 작은 지하실까지 있는, 평범한 열여덟의 고등학생이 혼자 살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방이었다. 물론 나와 그에게는 턱없이 비좁을 뿐이었지만.

“청해 너도 한 물 갔나 보군. 이런 조그만 집에서 살고. 너무 좁아서 숨이 다 막힐 지경인데.”

“창천, 인간계를 모르는 무식함을 그렇게 알리려고 애쓰지 않아도 돼. 이런 위치에 이런 넓이면 너도 구하기는 쉽지 않을 걸.”

내 말에 그는 만신창이인 몸으로 킬킬 웃음을 흘렸다.

“인간계에 살더니 인간을 닮아가는 건가. 하긴, 만 년을 인간계에서 보냈으니 그럴 수도 있겠어.”

“기껏 들여보내 줬더니 비꼴 거면 도로 나가. 알다시피, 바쁘거든.”

“바빠 보이긴 하더군. 한 때 바다이던 자가 고작 인간의 평가에 휘둘려 그렇게 열심히 손을 놀리는 모습을 나는 처음 봤어.”

그는 지치지도 않는지 키들거리며 소파에 비스듬히 앉았고, 나는 그런 그에게 물을 건네주었다.

“내가 힘을 다 잃지 않았다면 체력을 쌓는 것을 도와줬겠지만, 알다시피 추방당해버려서. 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야.”

“이거라도 받을 수 있으니 감사하지. 사실 쫓겨날 각오를 하고 왔거든.”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 아마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나 또한 처참하게 무시당할 각오를 하고 그를 찾아갔으리라. 그는 깔끔하게 물을 다 마셨고, 나는 그에게서 컵을 받아 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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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7-22 20:20 | 조회 : 828 목록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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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는 오늘 정식으로 시험을 던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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