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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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짝, 한 발짝씩 주저함 없이, 머뭇거림 없이 계속해서 나아갔다. 이 길 앞엔 뭐가 있을까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당장의 일에 모든 것을 맡기고 그저 묵묵히 나아갔다.

운이 좋지 않게 굶주린 이들을 만났다. 그들은 생존에 필요 없는 의료용 도구들을 빼고 모조리 가지고 가버렸다.
오늘 밤은 괜찮았다. 하루뿐이니까. 어쩔 수 없이 차가운 바닥에 몸을 누이고 잠을 청했다. 실로 너무 오랜만에 마주한 차갑고 딱딱한 바닥을 내 몸이 아우성치며 거부하였지만 억지스럽게 바닥에 몸을 밀착시켰다.
배가 고팠다. 오늘 먹은 것은 딱딱한 빵 두 덩이와 걸쭉한 스프 한 그릇뿐이었다.
주린 배를 부여잡고 억지로 현실에서 멀어진다.

간만에 꿈을 꾸었다.
언젠가 내 손에 반지를 끼워주었던 남자.
그가 나오는 꿈이었다.
그의 방, 그의 침대, 그의 품은 푹신하고 따뜻했다. 그와 함께하는 모든 식사는 만족스럽고 배불렀다.
그것이 오히려 꿈이었다는 듯이.

꿈에서 깨어나자 다시 잠들 수 없었다.
달 하나,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이었다.
어두웠다.

나는 그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내가 그를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내 길을 바꾸고 싶었던 것인가.
만약 아무 일 없이 그와 결혼을 하고 애를 낳고 가정을 꾸린다면 과연 행복했을까.
그건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이혼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거대로 위자료를 두둑이 받고 색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단 한 순간이라도 그를 보며 행복했던 적이 있나.

나는 그를 사랑했나.


다시 잠이 왔다.


그를 ‘사랑’하여 풍족했던 시절이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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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3-22 12:42 | 조회 : 1,149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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