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나비가 나타났다

"당장 돌아와!"

유나는 다나의 호통소리에 놀라 전화기를 떨어뜨릴 뻔 했다. 가까스로 나가의 염력이 그것을 받쳐들었다. 유나는 인상을 구긴 채 물었다.

"또 왜 그래? 우리끼리 놀아보려고 했는데, 그 사이를 못 참고 또 뭘 시키려는거야!"

"지금 서울에만 8군데가 불이 났어. 아무래도 누가 일부러 그런 것 같은데, 내가 그럼 전화 안 하게 생겼냐? 얼른 애들 챙겨서 돌아와. 기억 지우는 거 꼭 필요하니까 바다도 데려오고!"


유나는 끊겨버린 통화음에 허무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이 나가는 곧바로 주위를 두리번거려 바다를 찾았다. 때마침 비슷한 전화를 들었는지, 바다가 절벽에서 천천히 걸어내려오고 있었다. 그보다 한참 앞에서 키네시스도 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대충 상황을 파악한 듯 어깨를 으쓱였다.

"마음 편하게 쉬지를 못하네. 이런 게 히어로인가봐. 나중에 꼭 다시 한 번 제대로 놀자."

그때는 대낮에 바다구경이나 오는 거지. 그는 낮은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옆에서 바다가 그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가의 시선을 느끼고 곧 부드러운 눈망울로 돌아왔다.

"일단 화재장소는 귀능 씨가 보내주신다 했으니까 문자 받고 바로 출발해요. 그리고 바람특기는 잘못하면 불씨가 옮겨붙을 수도 있어서 위험이 커요. 제이랑 유나는 아지트나 스푼에 남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까 서장님한테서 듣기론 장소가 많아서 기억소거도 많이 해야될 거래요. 그럼 불을 직접 끄는 건 저랑 키네선배 두 사람이 하고, 마무리를 바다 선배가 하면 괜찮을 것 같아요."

"난 한 번에 범위 잡으면 돼서 큰 상관은 없어요. 그러니까 불 끄는 건 다 같이 하고, 마지막에 내가 고층에 올라가 전부 다 범위로 하고 기억제거하면 돼요. 우리가 조심해야할 건 cctv같은 것 뿐이에요."

말을 끝내기 무섭게 알림음이 울렸다. 바다는 귀능으로부터 온 지도를 자세히 살폈다. 군데군데 붉은 색으로 칠해진 곳이 방화장소였다. 바다는 그 주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찾았다. 그리고 그 주소를 노려보며 머릿속에 새겨넣었다.

"그럼 출발해요."

나가의 긴장한 목소리가 퍼졌다.


-


"그러니까 인원 좀 늘리라니까요."

헤이즈는 휠체어를 끌어당기며 무심하게 말했다. 골치아픈 머리를 싸맨 다나가 그를 흘겨보았다. 그리곤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 말했다.

"어디 특기자 찾는 게 쉬운 일인가. 특기도 없는데다가 비밀유지도 해주고, 거기다 일까지 할 람 찾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도와줄 거 아니면 그만 가."

"영정 님은 잘만 찾으시던데요. 이번에도 신입 엄청 많이 데려왔다면서요. 그리고 전 돈만 주면 다 합니다."

"성질 긁을거면 나가라고!"

다나가 손에 쥔 종이들을 구겨 헤이즈에게 던졌다. 헤이즈의 손바닥에 가로막힌 종이는 애꿎게도 아래에 앉은 랩터에게 향했다. 랩터의 귀가 쫑긋거리었다. 헤이즈는 빨개진 그녀의 이마를 무심히 문지르며 말했다.

"이거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에요. 예전에도 인원 많은 줄 알고 갔다가 다 죽을 뻔한 적 있었잖아요."

그는 제 머리부분을 검지로 가리켰다.

"자고로 머릿수는 많아야 하는 법. 싸움엔 정정당당이고 뭐고 없단 거 동의하잖아요. 쪽수로 밀어붙여야 되니까요. 지금 같은 때에 일 터지면 방법 없어요."

"···일?"

"서장님 왜 그래요?"

랩터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다나를 올려다보았다. 다나는 한순간에 썩어들어가듯 서늘한 낯빛으로 창가에 다가갔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일부러 동시다발적으로 발생시킨 화재. 그것도 스푼에서는 골고루 떨어진 곳. 다나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혹시, '시선 분산' 이 목적이었을까.


건물 건너편에는 다 쓰러져갈 듯한 폐건물이 있었다. 조만간 건물을 새로지을 거란 소리가 분분했었다. 아무도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한걸음만 더 걸으면 무너질 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랬기에 다나는, 아닐거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런 미친···!"

불쑥 나타난 기다란 팔 끝에 싱글벙글 웃는 메두사가 나타났을 땐, 이미 늦었다는 생각 뿐이었다.

다나는 창틀에 발길질을 거세게 한 번 했다. 이미 화가 나서인지 별 효력이 없었다. 소리만 큰 울림이 바닥을 타고 휠체어로 올라왔다.

"넌 비행팀 애들한테 연락해서 얼른 모이라고 그래."

귀능은 곧바로 1층 로비로 달려갔다. 다나는 당장이라도 뛰어내릴 듯 창가에 바싹 붙었다. 손 뻗으면 닿을만한 거리인데, 쉽사리 움직일 수가 없다. 그녀가 혀를 차는 소리를 내자 랩터가 손을 꼼지락거렸다. 주머니 속에 든 작은 칼등이 그녀 손에 닿았다. 랩터는 나지막히 말했다.

"내려가자. 할 말이 있나본데."

힐끗 본 랩터의 눈에, 새하얀 붕댈 감은 백모래가 있었다. 그녀는 그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직접 듣자."


-


키네시스는 귓가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삑 거리는 신호음이 이어지더니, 이내 나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곧바로 말했다.

"나가, 그쪽 끝났어? 내가 있는 곳은 마무리했어."

"한 곳 남았어요. 근데 이거 다른 사람들 눈치 안 보고 해도 괜찮은거에요?"

나가는 건물아래에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무언가에 빨리듯 한순간에 사라지는 불덩이를 보고 있었다. 나가의 염력에 사그라드는 것이었다. 그들의 시선에선 불길에 숨은 나가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걱정이 되었다. 혹여나 카메라를 들고 촬영이라도 한다면, 나가의 모습이 찍힐지도 몰랐다.

"괜찮으니까 계속해요."

바다의 얇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그녀는 가파른 곳을 오르는 듯 숨을 허덕였다. 난간을 붙잡은 그 손이 잘게 떨렸다. 가까스로 올라온 옥상에는 안전방범용 방충망이 거대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바다는 염력으로 가볍게 걷어낸 후 그 자리에 곧게 섰다.

'장소를 찾아야 돼.'

그녀는 얼굴에 가까스로 걸쳐진 안경을 내렸다. 그 아래의 크고 망울진 눈방울이 헤매는 것 없이 목표를 찾았다. 방금 전까지의 화재로 거대한 연기가 나는 곳. 바다는 그곳들만을 찾아 정확히 기억해두었다. 전부 그녀가 서 있는 건물는 꽤 멀리 있었다.

"···후."

바다는 두 손을 마주잡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아, 할 수 있어. 특기를 광범위하게 쓰는 것 따위 아무것도 아냐. 그리 중얼거린 그녀는 주변경계를 떠올렸다. 아까 전 눈여겨본 곳까지를 범위로, 기억제거의 한계치를 주욱 넓혀갔다.
바로 옆의 스푼, 그 옆의 병원, 그녀의 집, 그리고 그 옆의 아지트를 지나,

'범위는 서울 시 전체.'

눈을 뜬 그녀의 눈동자에 밝은 빛이 아른거렸다.



"···와. 이게 뭐람."

키네시스는 눈앞에 펼쳐지는 진풍경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약속이라도 한 듯, 모든 이들이 한순간에 길바닥에 주저앉다 못해 널브러졌다. 그들은 곧 깊은 잠에 빠지듯 두 눈을 꼭 감았다. 이제 도시에서 들리는 소리라곤 높게 메아리치는 사이렌 소리와 남은 특기자들의 목소리였다.

"이게 가능할 줄은 몰랐는데."

키네시스는 몇 십층 높이 건물에서 단번에 뛰어내렸다. 가볍게 땅에 닿은 발을 두 어번 내리친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반대방향에선 나가가 하늘 위를 유유히 날아오고 있었다. 나가 또한 그런 모습은 처음 봤는지 적잖이 놀란 듯 했다. 그는 키네시스의 옆에 내려와 무전을 켰다. 그와 동시에 귀능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서장님이 전부 모이래요!"

귀능은 다급한 듯 말을 쏟아뱉었다. 앞건물에 나이프가 모여있는데, 지금 아니면 적절한 때가 없을 거라며 열변을 토했다.

"거기 오르카도 있냐고 물어봐줘요."

무전을 통해 귀능의 귀따가운 소리가 전달된 모양이었다. 바다의 한숨섞인 목소리가 기계음에 섞어 들렸다. 키네시스는 귀능에게 말을 전했다. 귀능은 당연한 걸 묻냔 듯이, '백모래가 나타난 이상 그 옆엔 항상 생선대가리가 붙어다녀요'라 대답했다. 바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난 지금 출발할게요."


-


"안녕~."

"안녕하세요."

나가는 둘에게 손을 흔드는 랩터에게 고개숙여 인사했다.

노린 것도 아니었는데, 랩터를 포함한 출장조는 바다가 입원한 당일 스푼으로 돌아왔다. 바다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전부 그들을 소개받았다. 현재 출장조의 얼굴도 모르는 이는 스푼에선 바다가 유일했다.

"멀뚱히 서 있지 말고 얼른 가. 지금 걔네 놓치면 답 없다."

키네시스는 귓가에 울리는 다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어폰를 바로고쳤다. 다른 이들도 연결된 무전을 자세히 들으려 꾹 누르는 모습이었다. 랩터는 내리깐 두 눈을 들어올려 건물을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형체가 희미하게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랩터는 두 눈을 찡그렸다.

"아직 안에 있어. 어서 가자."

"바다 선배가 아직 안 왔어요."

"서장님 말 들었지? 놓치면 안돼. 우리는 먼저 들어가있을 테니까, 바다 오면 같이 들어와."

랩터는 키네시스에게 가자는 눈짓을 보냈다. 헤이즈는 랩터의 휠체어를 끌고 갔다. 나가는 그 모습을 보다가 몸을 돌려 건물을 등지고 섰다.

휠체어의 바퀴 소리는 희미해졌고, 이윽고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의 푸르른 머리칼이 보였다. 그녀는 근처 다른 건물로 텔레포트하여 뛰어오는 듯 했다. 나가를 발견하고서 바다는 차오른 숨을 내뱉으며 물었다.

"왜 나가만 여기 서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요?"

"늦을까봐 먼저 들어갔어요."

"우리도 어서 가요."

당당한 걸음으로 나가의 손목을 끌고 간 바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건물 2층 복도를 샅샅이 살피던 두 사람의 앞에 한 여자가 해맑게 웃고 있었다.

"나가 씨!"

커다란 나비의 날개가 달린 모양. 청록색 눈동자와 머리카락이 반가움에 덩달아 흩날렸다. 레이디는 날아갈듯 가벼운 걸음으로 나가에게 달려와 손을 붙잡았다.

"연락이 잘 안돼서 슬펐는데, 여기서 만날 줄이야!"

그녀는 온 세상의 은방울꽃을 모아 만든 것 같았다. 그만큼 청초하며 가녀린 모습이었다. 사소한 것에도 웃는 순수한 사람 같았다. 하지만 나가는 레이디가 마냥 그런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나가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눈만 둥그렇게 떴다. 그 사이 바다는 나가의 옷깃을 잡아 끌어당겼다.

"나가. 아는 사람이에요?"

일반인이 이 건물에 있을 이유가 없단 생각이 불쑥 들었다. 좋지 않은 예감에 바다가 뒷걸음질을 치게 되던 때, 레이디와 눈이 마주쳤다. 나가를 보던 시선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레이디는 바다를 주시하며 나가에게 물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좋기는 한데···옆에 붙은 이 날파리는 누구죠?"

"···날파리."

바다의 온화한 얼굴이 단번에 불이 꺼지듯 훅 식었다. 긴장감이 분노에 눌리는 모습이었다.

바다는 나가를 잡던 손을 놓고 천천히 팔짱을 꼈다. 그 순간까지 레이디를 주시하던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둘 모두 서로를 벌레보듯한 시선으로 난도질하고 있었다.

"거슬리는데······."


먼저 주도권을 잡은 것은 레이디였다. 그녀는 품에 둔 단도를 잡아채 바다를 향해 달겨들었다. 사과같이 푹 익어 발개진 얼굴은 사라져있었다.

바다는 망설임 없이, 곧장 손바닥을 펼쳐들어 레이디를 가로막듯 들었다. 손을 한 번 휘두르자 레이디가 반대편 창틀로 튕겨졌다.

'이상해.'

바다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예상하던 강도보다 훨씬 약했다. 창문 밖으로 날아가 땅바닥에 꽂히기를 생각했다. 건물 안에 그친 것이 기이했다. 하지만 다시 고개들어 쫓아오는 레이디를 바라보며, 그런 것을 생각할 틈은 없다 싶었다. 이미 품에 칼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으로서 레이디는 나이프로 낙인찍혔다.


"연적은 사양이에요."

레이디가 떨어진 건물파편을 들어올려 바다에게 던졌다. 염력에 가로막혀 다시 땅으로 떨어지는 소리는 묵직했다. 그 굉음 속에서도 바다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그녀는 흔들림 없는 감정으로, 약간의 상냥한 웃음을 내비치며 대답했다.

"그쪽이나 실컷 하세요."


"그만하세요!"

"그만 해, 이 지지배야!"

나가는 바다의 앞을 막았고, 다른 꼬마는 레이디의 앞을 막았다. 세월이 손가락질을 해가면서 레이디를 뜯어말리고 있었다.

"너 같이 싸우면 어쩌자는 거야, 보스가 쟤는 그냥 보내랬잖아."

"하지만 연적인 걸."

"말이 안 통해!"

바다가 나가의 등에서 고개를 살짝 내밀어 물었다. 그 표정에 결연함이 가득찼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머리를 쥐어뜯는 세월은 분명, 바다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그리 말했다. 보스가 '쟤' 는 그냥 '보내'랬다고.


"날 데려오라던 사람이 누군가요?"

옆에서 나가의 근심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바다는 안심하란 듯 나가의 등을 토닥이며 세월의 입을 바라보았다. 세월은 한 손으론 레이디의 옷깃을 잡고, 남은 한 손으론 천장을 가리켰다.

"옥상에 가봐. 계실거야."

"가면 안돼요!"

바다는 나가의 외침에 옮기려던 걸음을 멈추었다. 바다 자신도 알고 있었다. 이건 분명 함정이었고, 속셈이 있었다. 바다에게 좋을 일 하나 없음에 분명했다.

"나가."

그래도 그녀는 걸어갔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볼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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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6-08 01:48 | 조회 : 957 목록
작가의 말
화사한 잿빛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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