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비정상과 성실 사이

바다의 뒷덜미를 향해 무언가가 달겨들었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짐승처럼, 매섭게 돌진해왔다.

'뭐지?'

날카로운 소리를 들은 바다의 뒷덜미가 서늘하게 굳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정확히 바다를 표적삼은 것이었다. 눈동자를 굴려 확인하려 해도, 염력을 써서 막으려 해도. 무엇 하나도 늦지 않은 것이 없었다. 1초라도 더 빨리 텔레포트가 되길 비는 수밖에 없었다.

'빨리 좀 되라. 빨리!'

바다가 간절히 두 손을 모았음에도, 주변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일렁거림 하나도 없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미 늦었다.


"악!"

결국 외마디 비명과 함께 앞으로 고꾸라졌다. 뱀이 목덜미를 콱 문 것처럼, 붉은 피가 새어나왔다. 손가락을 타고 내려오는 붉은 색감에 가슴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귀까지 파고들었다. 어느 새 온 몸은 빳빳하게 굳어있었다.

바다는 천천히 숨을 삼키고 내뱉었다. 목을 할퀴었던 주사기가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옥상바닥을 나뒹구는 부서진 유리파편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온 몸의 피가 말라붙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부들대는 손을 휘저었다. 그리고 익숙한 느낌이 몸을 감싸안았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느꼈던 알싸한 분위기.

'특기가 안 나와.'


"안녕?"

얼굴로 향한 희미한 불빛에 바다는 눈을 찡그렸다. 곱게 구부러진 노란 머리가 피부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가 어지러워 곧장 일어나지도 못한 채, 바다는 다시 한 번 비틀거렸다. 어디서 본 듯한 기분나쁜 미소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러니까 오르카가 데려올 때 그냥 따라오지 그랬어. 난 징그러워서 이 방법만은 쓰기 싫었는데."

목이 갈라질 듯한 고양이의 울음소리와 함께, 몇 번이고 되내었던 남자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바다는 피가 떨어지는 오싹한 소리를 무시한 채 고개를 들었다. 오르카의 검고 흰 머리카락이 서늘하게 밤하늘을 더듬었다. 다쳤던 눈동자가 다시 쓰라렸다.

'언제 온 거지?'

바다는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언제부터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건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 순간 메두사가 머리를 붙잡았다. 바다는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 빳빳하게 그녀의 두 눈을 마주보았다.

"머리굴리는 소리 여기까지 다 들리네. 특기가 안 나오게 하는 약이라서, 지금은 아무것도 못 해."

타이밍 좋게 오르카가 부서진 주사기를 밟았다. 약하게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메두사가 오르카에게 턱을 까딱이자,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새카만 털에 노란 눈동자가 새벽녘 보름달 같았다.

"....이거, 놓으세요."

고작 메두사의 한 손에 목이 붙들린 바다는 겨우 숨을 내쉬었다. 그녀에게서 빠져나오려 메두사의 손목을 할퀴고 흔들었다. 그럴 때마다 뒤에 서 있던 오르카가 움찔거렸다. 메두사의 팔에는 선명한 손톱자국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아픈 내색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손에 들린 고양이를 점점 얼굴로 들이밀었다.

"괜찮아, 잠깐 자고 일어나면 돼."


고양이의 입이 점점 벌어지더니, 바다를 한 입에 삼킬만큼 거대해졌다. 질린 낯에 파래진 얼굴로 바다가 두 다리를 버둥거렸다. 마지막 발악이었다. 소름끼치게 끽끽대는 울음소리가 온 귀를 파고들었다. 메두사는 태연한 얼굴로 바다를 내주었다.

"나중에 보자."

소리 지를 틈도 없이, 두 눈이 새카만 입 속으로 가로막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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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 오빠!"

혜나가 활짝 웃으며 나가를 맞이했다. 옆에 같이 서 있던 키네시스도 웃으며 나가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렸다. 그대로 퇴사하는 줄 알았는데, 라며 호탕한 웃음을 짓자 나가는 민망함에 머리를 매만졌다.

"나이프로 갈 둘 아라떠..."

"너무 극단적인 거 아녜요?"

사사의 혀짧은 소리도 가볍게 웃어넘겼다.


"아 참, 나가 군. 회사 수리비는 걱정마세요. 원인제공한 사람들이 내기로 했거든요."

'사람들?'

나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귀능의 설명을 들었다.

혹시라도 수리비가 어마어마하게 많이 나와서, 돈을 벌기 위해 스푼으로 돌아가야한다는. 그런 만일의 사태가 일어나진 않을까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다니. 나가는 그것만으로 만족하며, 사소한 것에 신경 끄기로 했다.


"너희들. 바다랑 전화된 사람 있어?"

어제보다 더 수척해진 모습의 다나가 다가와 말을 건네었다. 이유는 분명 텅 비어버린 통장잔고 때문임이 분명했다.
그녀의 질문에, 처음에는 모두가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다나는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그 일은 이틀로 이어졌다. 그리고 또다시 3일이 지났고, 4일, 5일, 마침내 일주일이 되는 날까지도 계속되었다. 그제서야 상황이 점차 이상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혹시 바다랑 연락되는 사람 있어?"

유나가 머뭇거리며 휴대전화를 매만졌다. 며칠 전부터 전화를 해보았지만, 신호음만 쭉 이어지다 이내 끊기곤 했다. 집에 찾아가보려해도 주소를 몰랐다.

'그러고보니 바다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

유나는 그제서야 바다에 대한 무관심을 자각했다. 가족은 어떻게 되는지, 어디서 살고 있는지, 하다못해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도 묻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바다또한 그러한 것들을 먼저 얘기하지 않았다.


"어제 연락해본 사람은."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바다와 사적인 연락을 하고 다니는 사람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 어떤 대답도 나오지 않자, 다나는 한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처음에 듄이 전화를 했는데 몇 번을 해도 안 받았단다. 저번에 일도 있고 하니까 혹시 차단한 건 아닌가 싶어서 묻던데, 단순히 그렇다기엔 며칠동안 회사를 안 나오고."

"하지만 일주일정도 쉬라고 했다면서? 근데도 나오는 나가오빠가 비정상 아냐?"

"비정상....
성실하다고 해줄래, 혜나야."

나가가 눈물을 머금은 듯한 목소리를 냈다. 다나는 혜나의 당당한 말에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연락이 하나도 안 되는 건 이상하잖아."

"그럼 그 발신기로 확인하면 되는 거 아니야? 여기에 몰래 넣어뒀잖아."

혜나가 발뒤꿈치를 두어번 내리치며 가리켰다. 다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해봤지. 집이라고 뜨기까지 했고. 근데 혹시나 해서 다른 직원한테 부탁해서 확인해봤는데, 집에 없더래."


'확인? 집에 찾아가서 어른한테 물었나?'

나가는 어렴풋이 듄이 집에 찾아온 때를 떠올렸다. 듄이 돌아간 이후, 특기인지 나발인지를 가졌는데 말도 안 했냐고 호되게 혼이 난 기억이 있었다.


"........"

다나는 말없이 허공을 쏘아보았다. 가슴 한 쪽이 찜찜한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상찮은데.'

무언가 잘못 되어가고 있는 기분이 들던 찰나였다.


쾅!!

땅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천장의 시멘트 가루가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폭탄이라도 쏘아진 듯 굉음이 수차례 지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푼의 약한 전화벨 소리가 겹겹이 쌓였다. 세상이 뒤집힌 것 마냥 시끄러운 소음이 고개를 내밀다 못해 온 몸을 들썩였다.

"뭐야?!"

당황한 듯 신경질적인 소리를 지르던 때, 한 직원이 다나를 향해 달려왔다. 커다란 토끼 귀를 출렁이며 다가온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내쉬었다. 앞뒤 말을 모두 잘라낸 그녀가 소리쳤다.

"폭탄테러에요!"


-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키네시스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듯 했다.

'감이 안 좋아.'

그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이어폰을 꽂았다. 치직거리는 기계음이 잠시 이어지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키네시스는 곧바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제이. 폭발직전 지하철역 cctv분석 부탁해. 범인을 잡아야 해."

"알겠어.
그나저나 바다 행방이 묘연하다며. 시간 남으면 내가 주변 찾아볼까?"

"그래주면 고맙고.
나가!"

신호가 끊긴 이어폰을 빼내고 고개를 돌렸다. 바쁜 걸음을 걷던 나가가 얼굴을 들었다.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쪽 방향을 검지로 가리켰다.

"넌 이쪽으로 가, 내가 지하 입구로 갈게."

"네!"

나가의 뒤로 소방관들을 돕는 시민들이 보였다. 몇몇은 히어로였고, 다른 시민들의 눈을 피해 조금씩 특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가끔 소방관의 눈에 띄이는 경우는 있었으나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곤 했다. 그곳의 소방관 대부분이 아마 스푼과 관련이 있는 듯 했다.


더 깊은 지하로 들어온 키네시스는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네.'

폭발은 지하 1층에서 발생했다고 전해들은 것관 달리, 전쟁이라도 난 듯 지하철이 처참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인기척은 하나도 없는 것이, 사람은 없음이 분명했다.

'이상한데.'

키네시스는 만약을 위해 주변을 샅샅히 뒤지면서도, 찝찝함을 떨쳐낼 수 없었다. 이렇게나 엉망이 되었는데도 시체 한 구 나오지 않았다. 현재까진 지하 2층에서 부상자도 없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시민들이 이곳을 빠져나간 후 지하철 내부의 폭탄이 터졌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유가 뭐지? 테러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건가?

덜컥.

"........."

인기척.
무언가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은 소리지만, 터널을 지나 더 명확하게 들렸다.

키네시스는 발걸음에 숨까지 죽이며 선로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리고 열린 문으로 조심스레 지하철에 탑승했다. 모든 문이 열려있어 운전석까지 훤히 보일 수 있는 것이, 뜯어져 너덜너덜한 전구 때문에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번쩍이는 불빛 사이. 저 멀리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누구야?!"

한참이 지나서야 정적을 깨고 대답이 들렸다.

그리고 수없이 되내이고 또 곱씹던, 첫만남에서 들었던 바로 그 말과 똑같았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말.

굵다란 목소리는 대답했다.

"제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


나가는 한쪽 손을 휘저으며 눈 앞의 먼지들을 없애나갔다. 한걸음씩 발을 디딜 때마다 돌덩이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집채만한 돌덩이를 들어내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하나 더 보였다.

'저쪽은 키네시스 선배 쪽이었지.'

나가는 돌을 들어 옆으로 옮겨두었다. 내려갈 출구는 만들어놓되 굳이 그 길로 가지는 않기로 했다.

그는 염력을 사용함과 동시에 두 손으로 볼을 가볍게 쳤다. 정신 똑바로 차려, 나가. 한참을 그리 되내었다. 바다의 무소식에 집중된 신경은 빨리 떨쳐내야만 한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제뜻대로 되지 않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돌을 내려둘 때의 소음에 누군가의 비명이 섞여들리자, 나가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도와주세요, 다리가 깔렸어요!"

헝클어진 머리카락의 꼬마가 몸 위의 돌을 밀어내려하고 있었다. 몸에 비해 한참은 더 커서인지, 낑낑대며 안간힘을 써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가는 그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시민이야. 특기를 사용하면 안 될텐데.'

이럴 때 바다 선배가 있었다면.
나가는 바다를 찾는 자신의 모습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내가 이토록이나 선배에게 의존하고 있었나.

".....그래."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며 눈동자를 굴리던 그가 다짐한 듯 말했다.

"일단 구조대원 불러올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

꼬마는 나가의 계단을 올라가는 뒷모습을 주시했다. 건물 안을 울리는 발소리가 완전히 멎고 나서야, 꼬마는 돌덩이 뒤의 빈공간으로 기민하게 빠져나왔다.


".....야. 너...."

더 깊은 지하에선 말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를 향한 외침에 대답도 있었으나, 멀어서 잘 들리지 않았다.

'보스야 알아서 하시겠지.'

세월은 자리를 벗어났다.


-


목소리. 목소리가 들렸다.
중간에 무슨 막이라도 씌인 듯 갑갑하게 막혀 들렸다. 무어라 말하는지 제대로 알지는 못했으나, 상대방에게 악을 쓰고 있음은 분명했다. 목소리에 힘이 강하게 실려있었다.

'어지러워.'

술이라도 먹은 듯 어지러운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눈도 떠지지 않는 상황에서 쏟아질 듯 내리치는 잠에, 잠시만 넋을 놓아도 잠들어버릴 것만 같았다.
바다는 틈 하나 없는 좁은 공간 속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두 손을 꽉 쥐어서라도 정신을 맑게하려했다. 별 효과는 없었지만, 적어도 잠에 들지는 않았다.

"바다!"

익숙한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다는 자꾸만 가라앉은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올렸다. 얇은 막 너머로 침체된 색의 키네시스가 보였다.

"정신차려, 지금 잠들면 죽는거야!"

바다는 자꾸만 떨어지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막에 손바닥을 붙이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눈동자를 천천히 돌려 오른쪽을 바라봐서야, 그 자리에 한 남자가 서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피부, 새하얀 머리카락, 셔츠. 그에게서 하얗지 않은 것은 말끔히 차오른 푸른빛 눈동자 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하얀 달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빛을 빚어내 사람으로 만들었다면 그런 형태였을까. 그녀는 한치의 의심도 할 수 없었다.

'이 사람이 하얀마법사구나.'

바다는 무심결에 그런 생각을 했다. 백모래를 하얀 마법사로 착각한 것은 어쩌면 크나큰 실수였을지도 모른다고. 하얀 마법사의 순백은 백모래와는 차원이 달랐다.


"제안을 하죠. 선택지는 세 가지입니다."

하얀마법사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바다를 살리면, 당신의 소꿉친구인 유나는 죽습니다. 자기 특기도 제대로 못 다루는 사람은 상대가 안 되겠죠."

"미친 소리를,"

키네시스의 말이 끊겼다.

"이곳을 벗어나 스푼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바다가 죽습니다. 약물이 효과가 좋더군요. 특기가 전부 사용되지 않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맹수같은 포효가 울렸다. 키네시스는 주먹을 꼭 쥐고 그를 노려보았다. 유리조각같은 회색빛 눈동자에 붉은 빛이 아른거렸다. 아슬하게 달려있는 전등의 불빛이 번쩍이며 눈을 가렸다.


"지금 나보고 순위라도 매기라는 거야? 사람 목숨을 가지고?
아니, 제일 좋은 선택지가 있네. 여기서 하얀마법사 널 죽이고 둘 다 구해내는거지!"

부서진 쇳조각들이 바닥을 뒹굴었다. 달그락거리며 공중에 잠시 떠올랐다 이내 다시 떨어졌다.

'젠장, 너무 가까이 있어서 쓸 수가 없어.'

하얀마법사도 상황을 직시하고 있었는지, 두려움은 전혀 없는 기색이었다. 화가 치민 키네시스는 시선을 옮기는 척 하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고양이인지 뭔지, 거대한 동물의 투명한 배 속에 바다가 축 늘어져있었다. 안색이 좋지 않았다.

"전 아직 마지막 선택지를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하얀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바다는 눈을 아래로 내리깐채,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저희에게 협력하고 도와준다면, 그렇다면 둘 모두를 살리겠습니다. 협상 내용은 당장 말할 수 없지만 아마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누구라도 이야기를 들은 자라면 공감할 겁니다.
순혈이든, 혼혈이든, 영물이든."

"....하. 하하."

키네시스가 웃음을 지었다. 이마를 받치고 고개까지 숙인 채 어깨를 들썩이던 그는 얼굴을 들었다.

"나도 정신나갔단 소리는 제법 들었지만, 너 같은 놈은 처음본다. 넌 제정신이 아니,"

키네시스의 말이 가로막혔다.

"키네시스. 지금 당장 스푼에 도움 요청하세요."

바다의 힘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혀를 움직이는 것조차도 힘에 겨워 느릿한 속도로 말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말은 독을 품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를 겨냥한 독을.

"나였다면 고민없이 유나를 선택해요. 겨우 몇 달 만난 인연보다야 10년지기 친구가 더 가치있으니까요."

"헛소리 하지 마, 사람목숨을 가치로 판단할 수 있었으면 진작에 그랬어. 넌 죽고 싶은 것도 아니잖아!"

"안 죽어요!"

젖먹던 힘까지 모두 짜내어 소리쳤다. 기껏 해봐야 키네시스의 목소리보다 작았지만, 강인했다. 숨소리를 내는 것조차도 조심스럽게 만드는 외침이었다. 하얀마법사와 키네시스는 동시에 숨을 죽였다. 바다의 거친 호흡이 그들이 발 디딘 공간을 가득 메웠다.

"나 안 죽어요. 이대로 못 죽어요. 누구 맘대로 날 죽이고 살려요, 뭔데 날 가지고 협상을 하니 마니 그러냐고요."

비가 내린 후 맑은 호수처럼, 투명한 눈물이 조금씩 고였다. 바다는 입술을 꼭 깨물어 눈물이 흐르려는 것을 참았다.
절대 못 죽지. 내가 왜 죽어. 바다는 속으로 수십번을 반복하며,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난 살거에요."

2
이번 화 신고 2020-04-27 00:15 | 조회 : 939 목록
작가의 말
화사한 잿빛얼굴

키네시스는 에어팟나와도 절대 안 씀 무조건 이어폰임..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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