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버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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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도 못한 만남이었지만, 막상 보니까 반가웠다. 꽤.
물론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R이 준 액체를 마시고 나니 역시나 다시 상태가 좋아졌다.

"아오 이제 살겠네...그나저나 너가 여기서 왜 나오냐? 코빼기도 비치지 않더니."

"왜, 보고싶었어?"

"네 그 빌어먹을 주둥이는 여전하구나?"

"매력적이라고 해줄래?"

"매력 다 죽었네. 그 우스꽝스러운 망토는 또 뭔데..."

R은 토끼눈을 뜨고 자신의 망토에 새겨진 문양을 가르키며 반박했다.

"우스꽝스러운 차림이라뇨...이 문양 몰라? 아니 여기 이제 11년차 고인물 아니냐며..."

"알아야 돼?"

"황국 소속이라는 상징이잖아 이 아저씨야."

"허? 재밌네. 너가 왜, 어떻게 황궁 소속이냐??"

"모처럼 고객님의 첫 발현인데 살짝 도와줄겸? 손 좀 봤지."

"세상이 망해가네. 그래서 왜 온건데?"

"나는 포털 열어주는 거 거들어주러 온 나부랭이 정도랄까..."

"어, 잘 어울려."

띵- 띵-

광장에는 여러차례의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종소리에 R의 재수없는 얼굴에는
상당히 불쾌하고 오싹한 미소가 번졌다. 그러곤 주위를 살피더니 다짜고짜 내 옷깃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곧 시작인가 보네...슬슬 가보자고."

정말 알다가도 모를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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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은 나 말고도 몇몇의 다른 애들을 데리고 광장 중앙으로 갔다.
중앙은 생각했던 것보다 넓었고 아이들의 발현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많았다. 그래봤자 황태자 능력 구경하러 온 사람이 태반이겠지만.
황태자라는 자리가 꽤나 귀하긴 한가보다. 대신관까지 온다라.
아주 삐까뻔쩍하게 꾸며놓았네. 쓸데없이 신관 놈들만 잔뜩 불러가지곤.
주위에는 눈치보면서 덜덜 떠는 애송이들 천지.
아 정말,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상황이다.
R은 보조 마법사라 그런가, 나를 데려다주고는 바로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렇게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몇십분을 기다리니
대신관이라는 놈의 얼굴을 드디어 볼 수 있었다. 퍼져가지곤.

"제 430회 바라크 의식을 시작하겠습니다. 호명한 아이들은 한 명씩 제 옆에 있는 포털로 들어가주십시오."

저 놈의 포털은 어쩜 이렇게 한 번도 내 눈 앞에서 안 빠지지.
정말 질긴 악연인가보다.
대신관 옆에는 전에 보았던 포털들과는 다르게 아무런 빛이 안 뿜어나오는
나름 심플하고 작은 포털 하나가 열려져있었다.
그렇게 내 옆에 있던 애송이들은 하나 둘씩 불려갔다.

전에 여기저기서 엿들은 바로는...
저 포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들어가고 눈을 떠보면 거짓말처럼 자신이 포털 밖에 쓰러져있었고 하나 같이 전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고 말했다고 들었다. 발현이 된 아이들에게는 정신을 차린 순간 푸른 색 불이 몸을 감싸돌며 춤을 춘다고 한다.
참고로 이렇게 한 명씩 들어간다고 해도 마지막 한 명까지 들어가고 나야 하나 둘씩 쓰러진 채로 돌아온다고 한다. 황태자 능력만큼은 먼저 보고싶었지만 이런 세세한 상황까지는 내가 설정할 수는 없기에. 주위에 황태자 발자국도 안 보이는 거 보니 딱봐도 마지막에 들어갈 사람은 황태자인가. 소심하다고는 얼핏 들었는데, 고작 동년배들 앞에서 먼저 들어가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나 원 참.

"시오 크레데레!"

드디어.

나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 대신관을 지나 별 볼 것 없는 포털 앞에 섰다. 짜증나는 다홍빛을 안 내서 그런가, 거부감이 들지 않은 포털이었다. 호명된지 꽤 되었는데도 아직도 앞에서 거슬리게 머뭇머뭇 거리는 애송이들을 지나 나는 거침없이 포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동시에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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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염병...대가리 깨지겠네. 거부감이 안 들긴 개뿔...과음한 다음 날이랑 다를 게 없는데...? 마시지도 않은 소주가 올라올 것 같다. 그래도 오랜만이네...이 느낌. 전생 기억이 아직도 이렇게 선명하게 날 줄이야.
아픈 대가리 부여잡으면서 엎드린 저세로 전생 감성팔이 하던 중에 갑자기 내 앞에 한 그림자가 나타나며 한 마디 했다,

"엄살 부리긴."

충격 앞에는 다른 충격이 약이라고 하던가. 이거 왠지 그 놈 목소리랑 비슷한 거 같은 것은 기분 탓이겠지? 목소리까지 기억할 정도라니 소름이 끼치군.
그렇게 난 충격에 눈알도 굴리지 못하고 온 몸이 굳었다.

"뭐야. 귀 먹었어?"

자꾸 환청이 들리는 거 같은데 하하.
현실부정 하려고 발악하는 사이 그림자는 점점 나에게로 다가왔다.
정적이 흐르고 난 눈알을 겨우 굴리는데 성공해 조금 올려다볼 수 있었다. 그리고 올려다 본 그 순간 후회를 했다.

"악!!!"

"아!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하...주황색 머리카락...
몇 분의 정적이 흐른 후 나는 겨우 한 마디를 꺼낼 수 있었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R은 전에 본 적이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글쎄...이 세계가 그렇게 찬양하고 섬기는 신이 나라서?"

"...버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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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1-07-14 14:18 | 조회 : 867 목록
작가의 말
힐링투데이

이러다 1년에 1화씩 올라가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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