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악역을 구해버렸다.

*

이글거리는 열기, 쨍쨍한 태양, 숨이 턱턱 막히는 습도.
볏짚모자를 투과한 뜨거운 열기는 정수리를 후끈하게 데웠다.

나는 턱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땀을 거칠게 닦았다. 눈에 땀이 들어가는 바람에 시린 눈을 꿈벅거리며 알록달록한 장미의 수를 헤아렸다.

“이십육 송이, 이십칠 송이, 이십팔 송이, 이십팔 송이, 이십팔..십팔, 시팔, 시발.”

문득 열심히 일하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한 나는 육두문자와 함께 손에 들린 장미 줄기를 꺾어 버렸다.

형형한 헤드라이트를 킨 1톤 트럭에 받은 후 생판 처음 보는 여자가 되었다. 꿈인지 생신지 구분도 못 한 채 주변 상황에 떠밀려 원예일을 한 지도 벌써 3일 째다.

3일간 안 정보라고는 이 정원은 2황자궁의 후원이라는 사실과 내 이름이 베키라는 사실이 다였다. 숙소에 있는 이력서 아니었음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다.

황자궁에 들어가려면 이 후원을 지나야 할 터인데 어딘가 화려한 황성과 동 떨어져 보이는 이 곳은 하루 종일 방문하는 이 하나 없었다. 그늘진 상아색 궁은 음산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무튼 왜 내가 이런 곳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난 한숨을 내쉬며 말라비틀어진 장미 잔해가 담긴 바구니를 들고 끙차 일어났다. 오랫동안 앉아 있는 바람에 허리에서는 뚜두둑 뼈 마찰음이 크게 들렸다.

다 시들어 버린 장미를 자르고 나니 장미 정원이 휑해보였다. 겨우 제 잎을 달고 있는 장미도 갈색으로 점점 변하는 게 곧 죽을 거 같았다.

“한 번 비료나 줘볼까.”

금방 죽어버릴 것 같은 장미 잎을 조심스레 매만지다가 나는 자조적인 미소를 자아냈다.

“허.”

헛웃음이 났다. 제 일도 아니면서 꽤 원예일에 충실한 자신이 우스웠다. 나에게는 이럴 여유가 없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문득 애써 부정해온 죽음을 의심했다. 무섭게 달려오는 트럭에 치였으니..

“나 이미 죽어버린 거 아니야?”

아니 일단 부정하자, 살아있을 거야. 우울한 생각을 떨치기 위해 뺨을 가볍게 치고는 지난번 비료를 본 곳이 어딘지 골똘히 생각했다.

“..비료가 어디 있었더라.”

곧장 비료가 있을 것 같은 창고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길마다 즐비한 사철나무를 보자 괜히 뿌듯해졌다.

어제 하루 종일 삐죽빼죽 제멋대로 자란 사철나무 가지를 친 보람이 느껴졌다. 훨씬 길이 깔끔해 보였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이 몸 주인이 다재다능한지 손끝이 야무져서 정원을 가꾸는 보람이..아, 이 몸 주인이 너무 일을 잘해서 탈이다. 저도 모르게 일에 재미를 붙이고 있으니 말이다.

나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을 동생을 생각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코너를 돌려던 순간이었다. 사철나무 담을 경계로 웬 손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이 여자가 되고부터 본 사람이라고는 나이 지긋한 시녀 한명에 불과했다. 저 뽀얗고 아담한 손은 절대 주름이 짙은 시녀의 손이 아니었다.

오만가지 생각을 했다. 살인사건인가?

잔뜩 경계태세를 취하고는 천천히 손의 주인에게로 다가갔다. 나는 예상치 못한 인물에 짐짓 놀랐다. 웬 시커먼 머리칼을 가지고 있는 야윈 소년이었다.

쥐 죽은 듯 그는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호흡으로 여리게 움직여야 할 가슴팍은 미동도 없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쳐봤지만 그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호흡을 안 해.”

들고 있던 바구니는 내동댕이 쳐진지 오래였다. 기도를 열기 위해 그의 턱을 들어 올리고는 코를 가볍게 그러쥐었다.

숨을 들이 마신 후 그의 입을 맞춰 숨을 불어넣었다.


*


“일어났어?”

그의 적안이 슬며시 드러났다. 나는 가는 그의 팔에 붕대를 감아주다 말고 물었다.
그의 눈은 짐짓 커지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하는 짓이야.”

앳된 그는 퍽 성숙했지만 낮고 차분한 음성에는 날이 잔뜩 서있었다.

“너 치료 하는 중인데, 안 보여?”

붕대의 매듭 묶는 걸 마친 나는 그의 얼굴에 난 생채기 부분에 약을 발라 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나의 손은 매정하게 내쳐졌다.

꽤 세게 내 손을 쳤는지 손등에는 얼얼한 통증이 맴돌았다.

“뭐하는 짓이야?!”

그의 음성은 날카롭게 삑사리가 났다. 아까전만 해도 차분했던 그는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눈을 부라리며 날 쏘아봤다.

“너야말로 뭐하는 짓이야. 네 목숨까지 살려준 사람한테.”

동생이 생각나서 잘해줬건만 하나밖에 없는 내 침대를 그에게 내준 것이 후회가 됐다. 나는 얼얼한 손등을 매만지며 말했다.

“숨도 안 쉬고 정원에 쓰러져 있길래 내 숙소로 데리고 온 거뿐이야. 호흡이 돌아오고 나서는 열나서 간호해줬는데, 이런 식으로 은혜 갚을래?”

치료되어 있는 몸과 제 이마에 올려 있는 물수건을 둘러보고는 이제야 상황파악이 된 건지 그는 급 조용해졌다. 갑자기 그가 흥분해서 그럴까 나도 억울한 마음에 짐짓 격양되었지만 아까 낮에 죽을 고비를 넘긴 아이에게 너무 소리친 건 아닌지 돌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배고프지 않아?”

입을 앙다물고는 바닥에 떨구고 있던 그의 적안은 어느새 나를 마주 보고있었다.

*

너무 간소해 잘 먹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기우였다. 고작 당근과 버섯을 넣은 죽을 그는 그릇 바닥이 뚫릴 정도로 싹싹 긁어 먹었다.

“천천히 먹어.”

게 눈 감추듯 허겁지겁 음식을 먹는 그에게 물 잔을 내밀었다. 경계의 눈초리로 나와 물잔을 번갈아 보던 그는 물잔을 내 손에서 낚아채고는 벌컥벌컥 마셨다.

반찬투정 없이 잘 먹는 그가 기특한 한 편 이제껏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건지 앙상하게 마른 몸이 안쓰러워졌다.

“우리 애기는 몇 살?”

나는 별님반 유치원 선생님마냥 귀여운 목소리를 내기 위해 비음을 잔뜩 섞었지만 여자치고 낮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베키가 흉내 내자니 꽤나 우스꽝스러웠다.

죽을 푼 숟가락을 제 입에 넣지도 않은 채 그는 창백해 보일정도로 희멀건한 미간을 와락 구겼다. 얼마나 인상을 쓰는지 흰 도화지가 쪼글쪼글해진 것 같았다.

“미안.”

뻘쭘해진 나는 빠르게 사과했다. 청아한 목소리를 가진 원래 세계의 나라면 모를까 베키의 음성으로는 무리였던 것 같다. 내가 사과를 하자 그제야 그는 죽을 푼 숟가락을 제 입에 넣었다. 한참동안 작은 방안에는 식기 움직이는 소리만이 채워졌다.

*

두 눈을 뜨자마자 햇살을 가려주던 아담한 그림자는 사라졌다. 강한 아침 햇살에 나는 눈을 찌푸렸다. 손을 어정쩡하게 들고 있는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깼어?”

나는 그의 물음에 대답하기도 전 그의 이마를 짚었다. 흥건한 땀 때문에 이마에는 까만 머리칼이 몇 가닥 붙어있었다.

“다행이다.”

미지근한 이마 온도를 확인한 나는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듯 말을 뱉었다. 오늘 새벽에 갑자기 죽 먹은 걸 게워내고는 다시 열이 끓기 시작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치울 겨를도 없어 내버려둔 토사물이며 열을 내리기 위한 얼음 욕조는 정신없었던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의원을 부르는 게 낫겠어.”

당장 열이 내렸을지는 몰라도 계속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게 썩 좋은 징조 같지는 않았다.
침대에 엎드리고 쪽잠을 잔 탓인지 비몽사몽한 몸을 일으킨 그 순간 미약한 힘이 나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뽀얗고 작은 손의 주인은 어린 소년이었다.

“가지마.”

“어제 간신히 죽을 고비 넘겼어, 너 입원감이야.”

이 세계에서도 입원을 하나? 아무튼 핼쑥한 그의 얼굴을 보니 한시라도 빨리 의사를 불러오는 편이 나을 거 같았다. 어제 몇 번이고 황궁 주치의를 찾아갔지만 계속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내가 다녀올 때까지 얌전히 있어. 금방 모셔 올 테니깐.”

날 잡고 있는 그의 작은 손을 침대에 올리고는 살풋 웃어보였다.

“가지 말라고 했잖아!”

그의 앳된 음성은 꽤나 처연했지만 의사 안 무서운 환자 어디 있으랴. 어깨를 으쓱이고는 문고리를 돌린 순간이었다.

“명령이야. 케르시안 제국, 제 2황자..루인스 드 데온느의 명령이다.”

나는 빠르게 읊조리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머리털이 쭈뼛 섰다.

“..지금 뭐라고 했어?”

“명령이라고 했다.”

“아니 네 이름말이야.”

“루인스 드 데온느.”

그는 인상을 쓴 채 다시 한 번 제 이름을 말했다.

그의 이름 한 글자 하나하나 머리통을 강하게 치고 갔다. 갑작스런 명령 때문도 어린아이의 것이라 볼 수 없는 위엄 때문도 아니었다.

‘데온느 드 루인스’ 그 이름은 세기의 악역이라는 악명이 자자한 소설 속 폭군의 것이었으니까.



3
이번 화 신고 2019-09-01 21:35 | 조회 : 992 목록
작가의 말
Deiz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