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0화

곧 아침이 오려는지 창밖이 희붐하였다. 살며시 눈을 뜬 레냐는 뒤를 돌아 침대를 확인했지만 이안은 없었다.


밤에 너무 울은 탓인지 눈가가 부어있었다. 그 탓에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부러질 것 같은 허리를 움켜쥐고 겨우 침대 헤드에 기대 레냐는 아직 납작한 자신의 배를 내려보았다.


"...이제 7주...되었나.."


특별히 검사를 받아본 것은 아니지만 레냐는 알 수 있었다. 뱃속에서 무언가 살아있다는 것을.


그도 그럴게, 다른 사람과 마주할 때, 특히 그가 알파라면 이상하게도 레냐의 몸에서 이안의 페퍼민트 향이 났다.


알파의 아이를 임신한 오메가가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아이가 스스로 아버지의 향으로 덮어 씌우는 것이었다.


데니스가 레냐를 찾아왔을 때, 항상 그랬다. 별다른 위협이 없어서인지 그 향은 레냐에게만 느껴진 것 같았다. 그는 향을 의식하지 못했으니까.


"나중에... 알려줘야지.."


홀로 행복해하며 베시시 웃음을 짓고는 창밖을 보았다. 밤새 내린 눈이 소복히 쌓여 온 숲이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중에도 눈에 띄는 것은 그 하얀 눈길에 난 타이어 자국이었다. 아무래도 이안이 출근하면서 생긴 자국인듯 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였다. 율리안과 루시아가 올라오기 전에 먼저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픈 허리를 툭툭 두들기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저택 안이 정말 쥐죽은듯 조용했다. 1년 전 같았더라면 1층에 내려왔을 때 사용인 한 둘은 마주쳤던 것 같은데.


"..."


이질감이 느껴질만큼 저택안이 조용해서 레냐는 입술을 꾹 물었다. 옷은 든든히 입어서 춥지 않은데도 냉기가 느껴졌다.


일단 물이라도 마셔야겠다는 생각에 식당으로 향했다. 아직 그대로인 저택 안이. 하지만 이제는 텅 비어버린 저택안이 싸늘했다.


"...아버지.."


수많은 식탁 의자들 중에 제일 끝에 있는, 항상 다닐이 앉아있던 의자를 보니 속이 울렁였다.


아침에 깨서 항상 이곳에 오면 반갑게 맞이해 주었던 사람은 이제 없다.


"..."


항상 강하게,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을 것 같았던 모습은 이제 온데간데 없고 텅 빈 의자만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눈물이 또 날 것 같아 고개를 휘휘 젓고, 레냐는 유리컵에 물을 따랐다.


밖에 내놓았던 물인데도 냉장고에서 꺼낸 것처럼 차가웠다.


물 한잔을 마시고 발걸음을 움겨 다닐의 서재로 향했다. 항상 다니던 길인데, 어색했다.


"..."


문 앞에 서서 레냐는 침묵했다. 아무도 없는 빈 방이지만 레냐는 문을 두드렸다.


노크를 두어 번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어차피 아무도 없는걸...


"네."


"...?"


안에서 대답이 들렸다. 레냐는 설마, 하는 생각에 놀란 눈으로 문을 벌컥 열었다.


"..? 무슨 일이냐?"

"...아.."


하지만 그건 다닐이 아니었다. 율리안이 상자에 하나, 둘 다닐의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뭐 하세요?"


"이렇게 두긴 좀 그래서. 정리해서 창고에 넣을 생각이다. 루시아가 부탁했거든.."


머쓱해하며 율리안이 손에 들고있던 앨범을 들어올렸다. 년도를 보아하니 레냐가 어릴적 앨범인것 같았다.


"어.. 저 그거 봐도 돼요?"


"이거? 아, 앨범이구나. 그래, 보거라."


레냐는 왠지 신이나서 웃으며 율리안이 건넨 그것을 받았다. 소파에 앉아 레냐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앨범의 표지를 열었다.


앞장 속지에는 익숙한 손글씨가 적여힜었다. 다닐이 쓴, 짧막한 편지였다.


-'나의 사랑, 옐레나. 우리의 아이 레냐가 커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이렇게밖에 하지 못하는 날 용서하지 마.'


"..."


글씨를 손가락으로 슥 훑고 레냐는 다시 한장 넘겼다. 어릴적, 자신의 모습이 한가득 했다.


같은 장소, 같은 옷이지만 얼굴의 각도나 몸짓이 미묘하게 달랐다. 다닐은 정말..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담을 생각이었던 듯 하다.


피식 웃으며 다음장, 또 다음장을 넘기는데 툭, 하고 바닥에 무언가 떨어졌다. 사진속 새하얀 여자의 모습은..


"엄마..."


언제인지 모를, 아주 오래전의 옐레나를 찍은 모습 같았다. 배가 만삭으로 부르고, 두꺼운 옷을 입고 시린 손을 입김으로 호호 불고 있는 모습이 아무래도 레냐가 태어나기 전인듯 했다.


사진이 빠진 곳은 맨 뒤 커버와 속지 사이였다. 한번에 그곳으로 넘겨보니 비슷한 사진이 여러개 있었다.


"...찾아다녔었구나.."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레냐의 엄마, 옐레나는 어린 레냐에게 자주 말하곤 했다.


-'레냐 아빠는 엄청 바쁘고 멋있는 일을 하느라 못오는거야. 우리가 같이 있으면 아빠가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그 엄청 바쁘고 멋있는 일이 뒷사회 일이란 걸 옐레나는 알았을까. 항상 주문을 외우듯 말했던 그녀의 목소리에는 언뜻 슬픔이 섞여 있던 것 같다.


사진을 잘 정리해서 다시 앨범 사이에 끼워넣었다. 레냐는 아까 전의 페이지로 돌아가 다시 한장 한장 살폈다.


"...풉."


저택에 오고서 첫 겨울에, 이안과 데니스, 둘과 함께 눈싸움을 했던 사진이 있었다. 이런 사진은 언제 찍은걸까.


그때는 동글동글하고 귀여웠던 둘이, 지금은 훨씬 크고 멋있고, 잘생겨졌다. 뭐, 잘생긴 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지만.


사진 속 그날 데니스가 던진 눈에 레냐의 딋통수가 맞고, 레냐가 던진 눈에 데니스는 얼굴 정면을 맞았었다.


그러다가 아마 데니스가 코피가 났었었나..


아무튼, 재미있었던, 행복했었던 기억이 떠올라 레냐는 오랜만에 해밝게 웃었다.


앨범을 넘길수록, 이안은 사라지고 데니스와 함께한 사진이 많았다. 심지어는 수업중에 졸았던 사진까지.


"...이런건 언제 찍은거야, 대체.."


부끄러워져서 레냐는 앨범을 후다닥 넘겼다. 그러다가 또 툭 떨어진 것이, 아무래도 앨범 자리가 부족했었던 듯 싶다.


"..어..."


저택에 처음 왔을 때, 레냐는 혼자 잠들기 무서워서 이안과 함께 잠에 들었다.


그때의 사진이 남아있다니. 대체 다닐은 얼마나 많은 관심을 쏟았던 걸까.


무뚝뚝하고, 무관심해 보였는데.


앨범을 다 보고, 레냐는 조심히 닫아 율리안에게 건냈다. 박스 속으로 차곡차곡 쌓이는 책들을 보고있으니 정말 다닐이 떠나갔구나, 하고 느껴졌다.


이제 모두 다 끝이구나, 다닐도, 므라크도.


"...아."


레냐가 갑자기 탄식을 뱉자 율리안이 그를 보았다. 레냐는 초조한 얼굴로 안절부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율리안, 혹시 지금 므라크에 다녀올 수 있을까요?"


"흠... 다녀오기야 할 수 있겠지만.. 굳이 꼭 가야하느냐?"


율리안은 표정을 찌푸렸다. 굳이 그런 안좋은 기억이 있는 곳을 가야할까.


"그게.. 중요한 걸 놓고와서.."


"..? 어떤 것? 내가 다녀오마."


율리안의 말에 레냐는 곰곰히 생각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가는 것보다 율리안이 가는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제가 머물던 방 침대 옆 서랍에.. 가운데 칸에 손수건이 하나 있어요.. 그거 엄청 중요한 건데.."


"그래. 이것들 정리하고... 3시 쯤이면 다녀올 수 있겠구나."


"부탁할게요."


화색이 돌며 레냐는 싱긋 웃었다. 그 손수건은 레냐에게 아주 소중한 것이었다.


아주 소중하고, 귀중한 것.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옷을 두껍게 껴입고, 레냐는 밖으로 나왔다.


소복히 쌓인 눈을 밟으며 걷다보니 언뜻 어릴적이 생각나는 것 같았다.


11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동안 저택에서의 추억이 많았다.


곧 스무 살이 될 레냐는 그 누구보다 사랑스럽고, 어여쁘게 자랐다.


"..이안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아직은 납작한 제 배를 스다듬으며 레냐는 눈쌓인 정원을 거닐었다. 뽀득 뽀득 하며 눈이 으깨지는 소리가 꼭 음악처럼 들렸다.


꿈을 꾸고 일어난 것 처럼 악몽이 하나 지나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그래, 이제껏 있었던 일은 꿈이었던거야, 하고 생각하며 레냐는 살며시 미소지었다.


레냐는 기분좋은 생각에 잠겼다. 이안의 말대로 둘이 약혼을 하면 후에는 결혼을 하고, 서로를 닮은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

행복해질 수 있다는, 그런 상상을.


정원을 걷고, 또 걸었다. 손 끝이 빨갛게 변하고 나서야 레냐는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겉옷을 벗어놓고 거실의 소파에 앉아 피어오르는 난로를 보았다.


모든것이 고요하고 평온해서, 나른하게 잠이 몰려왔다.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 언제 다녀온 것인지 율리안이 품에서 손수건을 건냈다. 레냐는 그 손수건을 입고있던 가디건 주머니에 쏙 넣었다. 율리안은 다시 잠에 빠져든 레냐를 조용히 스다듬어주고 담요를 끌어다 그에게 덮어주었다.


"잘 자거라."


좋은 꿈 꾸고.





왠지 따뜻한 느낌에 레냐는 몸을 뒤척였다. 따뜻하고, 포근하고, 말랑한...


'말랑..?'


살며시 눈을 뜬 레냐 앞에 보인 것은 잠든 이안이었다. 언제 들어온 것인지, 또 언제 움겨준 것인지 레냐는 그와 함께 제 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살짝 고개를 들어 시계를 살피니 벌써 1시였다. 아무래도 깊게 잠든 듯 했다.


'어쩌지..'


이안의 팔이 레냐의 몸을 누르고 있어서 레냐는 일어날 수 없었다. 불편하거나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지만 어딘가 어색했다.


이렇게 끌어안아준 적은 없는데.


그렇게 잠자코 가만히 그가 자는 모습을 보다가, 팔이 무거웠는지 레냐가 몸을 달싹였다. 의도치 않게 이안의 손이 침대로 툭 떨어져서 레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살폈다.


"..."


다행히도 깊게 잠든 것인지 이안의 표정이 온화했다. 몸이 자유로워진 레냐는 살금 살금 침대에서 내려와 의자에 놓여있던 가디건을 집어 몸에 걸쳤다.


발소리를 죽이며 방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고리에 손을 올렸을 때, 뒤에서 덥석 하고 레냐의 손 위에 큰 손이 겹쳐졌다.


"..어디가?"


잠에서 덜 깬 낮은 목소리가 레냐의 귓가에 울렸다. 잠결에 정신이 없는지 그가 뒤에서 레냐를 끌어안았다.


"...!"


화들짝 놀라며 레냐는 뒤돌아 그를 밀쳤다. 그대로 밀쳐져 놀란 그가 잠이 확 깬 눈으로 레냐를 보았다.


"..헉...허억..."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레냐는 미친듯이 뛰어대는 심장을 꾹 누르고 힘겨운 숨을 몰아쉬었다.


이런 일이 처음인 탓에, 이안은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괜찮아.. 괜찮아..'


스스로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레냐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참 뒤에야 진정된 몸이 애석하게 느껴졌다.


"미, 미안...미안해요.."


황급히 일어나 레냐가 문을 열려 하자 이안은 다시 손을 뻗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리 와."


그대로 이안의 품에 안겨버린 레냐는 이유모를 공포감에 몸을 떨었다. 그가 분명 더럽다고, 혐오스럽다고 했는데.


"..아, 안지..마, 말아..주세요..'


떠는 모습이 애처로워서 이안은 하는 수 없이 레냐를 놓아주었다. 한숨을 푹 내쉬는 소리에 레냐는 겁에 질린 눈으로 그를 올려보았다.


"..이주 뒤에.. 약혼식 올릴거야."


"..네?"


"약혼 할거라고."


레냐는 당황스러웠다. 분명 그는 약혼자가 있는데, 또 누구와 한다는 것일까.


"..누구..랑요..?"


"..."


고심 끝에 물어본 것인데, 이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레냐는 꼭 잘못한 아이처럼 시선을 회피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너."


"..네?"


"..하... 너랑 한다고."


알아듣지 못하는 레냐에게 짜증이 난 것인지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레냐는 한편으로 기쁘기도 하고, 갑작스러운 약혼에 기분이 들쑥날쑥했다.


"..다시 자. 아직 밤이니까."

레냐를 옆으로 밀고 그는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무엇이 그를 화나게 한 걸까. 레냐는 한참을 생각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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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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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11-14 21:39 | 조회 : 248 목록
작가의 말
밍구는 밍구밍구해

오랜만에 수위 없는 건전한...편... 하지만 찌통...흑흑 모래모래 자갈자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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