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9화(주의)




"이안..."


평온했던 눈동자가 애달프게 흔들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 품에 뛰어들어 안기고 싶었지만 레냐는 할 수 없었다.


그가 더럽다고, 혐오스럽다고 했으니까.


이안의 손이 레냐가 잡고 있는 이불로 향했다. 그대로 이불을 쥐더니 옆으로 휙, 던져버렸다.


"잘 들어."


그의 목소리는 더이상 레냐를 다정하게 부르는 그 온화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레냐는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참으며 그를 보았다.


"넌 그곳과 아무런 관련 없는거야. 그저 납치되어서 온갖 수모를 다 겪은...그래, 피해자, 피해자인거야. 정 안되면 내가 어떻게든 처리할테니까.."


이안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레냐가 좋아서 그런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듯 했다.


결국 눈물이 터져나왔다. 레냐의 눈은 마를 날이 없어 항상 눈시울이 붉었다. 그런 모습을 숨기려 레냐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이안.."

그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레냐가 말을 끊었다. 이안의 눈에 비친 레냐는 안타까울 정도로 비쩍 말라 있었고 그런 가느다란 몸이 애달프게 떨리고 있었다.


"나... 나 좀...살려주세요.."

역시 레냐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고개를 들어 이안의 눈에 보인 그 얼굴은 이미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너.."


"이안이 나 두고 다른 사람 만나도 괜찮아요. 나 안버리고 옆에만 둬준다면 뭐든 상관없어요.."


레냐는 전처럼 이안에게 편하게 말하지 않았다. 이안은 눈살을 찌푸리며 레냐의 어깨를 잡았다.


"시키는 건 뭐든 다 할테니까, 제발... 나 데리고 가요...제발..."


"...하.."


그가 한숨을 푹 내쉬자 레냐는 흠칫 놀라며 제 입을 가렸다. 여전히 두 눈에서는 눈물이 툭 툭 떨어지고 있었다.


제가 뱉은 말이 혹여 이안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까, 지레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다.


"...아무튼.. 말만 잘 하면 오늘 당장 나갈 수 있으니까. 알아서 잘 해봐."


그런 레냐의 모습에 흔들리기라도 한 것인지 이안은 말을 돌렸다. 그가 말을 끝마치자 철문이 열리면서 기동복을 입은 요원 둘이 수갑을 손에 들고 들어왔다.


이안을 지나쳐 레냐에게 그 차디찬 것을 손목에 채워주고 양 팔을 서로 붙잡은 체 밖으로 끌고 나갔다. 힘없이 축 쳐진 딋모습이 어쩐지 눈에 밟혔다.


새로운 방에 도착했을 때, 느낌상으론 취조실 같았다. 거울같이 보이는 저것은 아마 옆방과 연결된 유리창이겠지.


"....정황상 당신은 피해자인데..."


앞의 요원이 무어라 말하던 레냐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저 새카만 유리창에 비춰져 보이는 이안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근데, 당신의 지문으로 신원조회를 했는데.."


"..."


"죄송합니다만, 당신의 신원조회를 할 수 없습니다. 인적사항을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요원이 말을 끝마쳐도 레냐는 허공을 응시했다. 그 시선끝엔 당연하게도 이안이 있었다.


"...저기..?"

"..ㄴ, 네?"


요원이 뻗은 손짓에 화들짝 놀라며 레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요원이 한 번 더 질문을 말해주고 나서야 레냐는 답할 수 있었다.


"레아니드..칼례스니코프... 92년생...벨로루시 출신이예요.."


"혹시 그거, 가짜 신분입니까? 조회를 해도 전혀 안나오는데."

"..."


레냐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성은 아버지의 것을 오래 전 그날, 거둬지면서 받았던 것이었기에.


"신원이 필요한 거라면 내가 아까 말했을텐데."


뒤에서 조용히 있던 이안이 답지않게 표정을 찌푸리며 낮은 어조로 말했다. 요원이 당황한듯한 표정을 짓더니 애써 침착해하며 그를 달래려는듯 했다.


"아, 아무리 그래도 그런 것은..."


"왜? 내 약혼자라는 것이 문제되는 건가?"


"...!"


이안이 뱉은 말에 레냐는 충격받은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레냐의 심장을 마구 뒤흔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약혼자라니... 이미 있으면서...'


레냐는 잠자코 있기로 했다. 왠지 말을 꺼냈다가 괜히 오해만 커질 것 같았다.


"하아...그래도..."


요원은 난감하다는듯 한숨을 푹 쉬었다. 그들 사이에는 한참동안 정적이 흘렀다.


"..."


레냐는 말을 하고싶어 입을 열었다가도 이내 다시 다물며 침묵했다. 이걸 말 해도 되는 것일까?


정적이 계속되자 옆에 서있던 수사관이 지루한듯 한숨을 푹 쉬었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듯 레냐는 기억속 저편에 묻어두었던 것을 끄집어냈다.


"...벨로루시, 카스쇼코비치, M-N 몰로데스니 8..."


"...?"


고개를 숙인 레냐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다른 이들은 못알아 들었는지 표정들이 들쑥날쑥 했지만, 딱 한명, 옆에 서있던 수사관이 자신있게 말을 꺼냈다.


"거긴 12년 전에 살인사건이 있었던 곳 아닙니까? 강도 넷이서 아이와 엄마만 사는 집을 노린... 아마 거기서 모두 사망하고 아이만 실종된 걸로 아는데.."


그의 말에 요원은 기억이 났다는듯 아! 하며 감탄을 내밷었다.


"근데 그건 왜..?"


자신이 한 질문과는 다른 답변에 요원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미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에 레냐는 또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겨우 다스렸던 마음이 또다시 끓는것 같았다.


레냐는 심호흡을 한번 한 뒤, 입을 열었다.


"제가, 제가 그날 실종되었던 아이예요."


ㅡㅡㅡㅡㅡ


거의 1년만에 저택으로 향하는 차에 탄 레냐는 긴장이 풀렸는지 이동하는 내내 잠을 잤다. 백미러로 힐끗 레냐를 살피며 이안은 생각에 잠겼다.


-'제가, 제가 그날 실종되었던 아이예요.'


"...하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레냐는 생각 외로 이안을 귀찮게, 힘들게 했다.


그 덕분에 정보국 요원인 친구는 더 막대한 업무량에 시달리게 되었고, 사망처리 되어있던 레냐의 옛 신분인 '자하로프'를 살리기 위해 아마 이곳저곳을 알아보러 다녀야 할 것이다.


다행히도 그날 실종된 아이의 유전자가 남아있다 하니 대조검사를 통해 레냐가 거짓을 말했는지, 진실을 말했는지 알 수 있겠지.


한참 그렇게 운전하는데 이안의 휴대폰이 진동을 울렸다. 마침 신호도 걸렸겠다, 그는 전화를 확인했다.


"하긴, 올때가 되었지."


그에게 전화를 건 것은 그의 어머니인 아니샤였다. 부재중으로 뜬 전화도 여럿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상황을 깨달은 듯 했다.


이안은 전화를 끊어버리고 레냐가 깨지 않게 라디오 볼륨을 작게 해서 틀었다. 어느 채널을 돌려도 루치 회장의 비리와 뒷사회에 대한 연결고리 등 모두 아니샤를 저격하는 내용이었다.


"흠.."


장부를 뜯어보았을 때, 아니샤는 생각보다 꽤 위험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루치 지분의 절반 가까이가 뒷사회와 이어져 있을 정도로 넓게 발을 뻗고 있었다.


그 덕분에 별다른 탈 없이 그녀를 사지로 몰아넣을 수 있게 되었다.


이안은 라디오를 끄고 다시 힐끗 레냐를 보았다. 새근새근 자는 모습이 꼭 시체같아서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저런 걸 어디에 쓰지.."


목적과 명분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그가 처음으로 제 계획 밖의 일을 저질렀다. 레냐를 살린 것, 제 곁에 두겠다 한 것.


"..."


신호가 떨어졌는지 앞의 차가 붉은 빛을 거두고 점점 멀어져 갔다. 이안은 최대한 부드럽게 차를 몰았다. 그렇게 저택으로 조금씩 더 가까워져서 오랫동안 가지 못했던 저택으로, 추억이 담긴 곳에 도착했다.


ㅡㅡㅡㅡㅡ


"일어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레냐의 귓가에 울렸다. 살며시 눈을 뜨고 주변을 살펴보니 도착한 곳은 낯익은 곳이었다.


"..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던 집에 돌아오니 기분이 이상했다. 레냐는 차 밖으로 나와 두 발로 일어섰다.


레냐가 무얼 하던간에 이안은 현관문으로 향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본 레냐는 허겁지겁 따라가 함께 집 안으로 들어왔다.


"..으...추워.."


차디찬 겨울바람에 옷을 두껍게 입지 않은 레냐는 추위에 떨었다. 집 안은 다행히도 온기가 돌아 그나마 따뜻했다.


"오셨어요?"


아, 루시아다. 얼마만에 보는 것인지. 레냐는 살짝 웃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레냐의 두 손을 맞잡고 마치 제 아이의 상태를 살피듯 모정어린 시선으로 이곳 저곳을 살폈다.


"많이 걱정했어요. 다시는 못 돌아오시는줄 알고.."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해요?"


이상하리만큼 집 안이 고요했다. 인기척이라곤 지금 이 셋 뿐인 것 처럼 느껴졌다.


"주인님께서 돌아가시고 모두 떠났어요. 지금은 저와 율리안 뿐입니다."


"율리안? 지금 여기 있어요?"


"네."


레냐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붙잡혀 갔을까봐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그럼.. 데니스는..?"


이안을 보며 레냐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는? 그도 여기에 꼭 있어야 할텐데.


"없어졌어."


이안은 무미건조한 표정을 하곤 레냐에게 말했다. 한없이 차가운 시선에 레냐는 흠칫, 하고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앞으로.. 그녀석은 찾지 마."


"..."


풀이 죽은 강아지처럼 레냐는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 거렸다. 이안이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답."


"...알겠...어요.."


이안이 불편했다. 마음속에선 그가 여전히 좋았지만 저렇게 딱딱하게 굴면 무섭고, 가까이 가기 어려워진다.


"..그럼.. 올라갈게요.."


마음이 상했는지 레냐는 터벅터벅 계단을 올랐다. 루시아가 그런 레냐의 뒤를 따라가니 거실엔 이안만 남아있게 되었다.


"하아.."


그도 지치고 기운이 빠지는지 그대로 소파에 몸을 뉘였다. 일단 '그녀'와의 약혼을 정리하고, 아니샤 쪽 일도 정리하고, 그룹도 인계해야 했다.


일을 벌려놓긴 했는데, 귀찮고 하기 싫어졌다. 마음같아선 모두 다 때려치고 아무것도 안하고 싶었다.


"아드리안."


그렇게 널브러져 있는데 그의 위에서 중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율리안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피곤에 절은 목소리였다. 이안은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목소리로 대충 대답했다.


"대체 무슨 생각인게냐. 이렇게 크게 일을 벌여놓고 너 혼자 처리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왜 이렇게 무모한 짓을 하는거냐."


율리안은 평소답지 않게 화를 내었다. 왜 다닐이 이안이 아닌 데니스를 택했는지 알 것 같았다.


"책임감이라곤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구나. 네게 실망했다."


"...잔소리를 하시는 거라면 나중에 하시죠. 피곤합니다."


"..."


이안은 눈을 꾹 감았다. 율리안이 무어라 더 말하려는듯 싶었는데, 이내 그는 발소리를 크게 내며 위층으로 올라가는듯 했다.


'나한테 뭘 바라는 거야.'


짜증이 나고 실증이 났다. 제게 사랑을 바라는 레냐도, 책임감을 바라는 율리안도.


여태것 자기 입맛대로 자신을 키우고 교육한 아니샤도.


모두가 싫었다.





레냐는 루시아의 도움을 받아 겨우 몸을 씻을 수 있었다. 루시아는 레냐의 온 몸에 가득한 흉터와 허벅지에 찍힌 각인을 보고 한참을 울었다.


그렇게 노곤함에 싸여 방으로 나오니 보고싶었던 얼굴, 율리안이 있었다.


"율리안..!"


그의 품에 뛰어들어 안기며 레냐는 눈물을 흘렸다. 제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라서인지 그가 무사한 것이 너무나 안심되었다.


"흉터 없에는 연고 가져왔다. 이거 바르고 푹 쉬어라."


"고마워요. 루시아도.. 율리안도.."


잘 쉬라는 말과 함께 그들이 나가고 레냐는 오랜만에 오는 제 방을 살폈다. 달라진 것 하나 없는 이곳이 오히려 안정감이 들었다.


"힘들다.."


율리안이 준 연고를 옆에 놓고 레냐는 침대에 몸을 뉘였다. 지금은 약을 바를 힘도 없었다.


눈이 꿈뻑 꿈뻑 감기려고 하는데, 닫혔던 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레냐는 확 달아난 졸음에 놀란 눈으로 문을 보았다.


"레냐.."


이안이 주춤거리며 레냐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세 술이라도 마신 것인지 그에게서 술의 향이 나는것 같았다.


"넌.. 내가 좋아?"


레냐에게 당연한 것을 물어오며 이안은 털썩, 침대에 주저앉았다. 그의 큰 체구에 메트리스가 크게 요동쳤다.


"...."


"내가.. 좋냐고... 묻잖아.."


이안의 손이 레냐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대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에 레냐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좋아, 해요...많이.."


이안, 그의 눈에 비춰진 레냐의 모습은 한없이 순종적이고 주인의 손길을 바라는 강아지 같았다.


"난... 네가 싫어. 10년전.. 널 처음 봤을 때부터.."


"..."


"정말 싫다고."


그대로 레냐를 침대에 눕혀버리고 그를 짓눌렀다. 가녀린 목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힘을 주었을 때, 레냐는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조용히 눈물만 흘렸다.


"큽...끄읍.."


숨이 막혀오는지 얼굴이 붉어지며 발로 이불을 밀었다. 차마 이안의 손을 잡을 수는 없어 두 손 가득 이불을 움켜쥐고 눈을 질끈 감았다.


다행이도 이안은 레냐를 죽일 생각이 아니었는지 목을 놓아주었다. 순식간에 폐로 직행하는 공기에 레냐는 연신 기침을 해대며 몸을 옆으로 돌렸다.


"커헉..콜록, 헉...허억.."


"...이래도 내가 좋아?"


이안은 레냐를 내려다 보았다. 애처롭게 기침을 토하며 레냐는 애써 그와 눈을 마주했다.


여전히 비수같은 시선이었지만 레냐는 그저 좋았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응.. 좋아... 엄청.."


"...."


레냐의 모습은 꼭 날개가 불에 타버린 나방같았다. 조금 남은 날개로라도 날갯짓 하려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그런 불쌍한 나방.


"...그래."


이안은 눈을 한 번 느릿하게 깜빡였다. 머리에 든 건 있으니 어딘가 쓸모가 있겠지.


'무조건적으로 순종적인 것도.. 나쁘진 않지.'


그는 결심했다. 어차피 해야 할 약혼이라면 더 이용하기 좋은 쪽이 낫지 않은가.


"약혼하자. 빠른 시일 내에."


ㅡㅡㅡㅡㅡ


며칠 뒤, 이안은 현재 약혼자를 만났다. 그녀는 유명 보험회사의 대표이사이자 그곳 회장의 막내딸이다.


어차피 그 회사는 루치와 인수합병될 예정이니 이안에게 그녀는 필요 없었다.


"왜 이렇게 연락이 안됀 거예요! 안그래도 회장님 일 때문에 걱정했는데..."


그녀는 이안을 보자마자 달려가 품에 안겼다. 이안은 아무 말 없이 부동자세로 서있었다.


"일단 들어가지."


그녀를 떼내고 이안은 카드키로 룸의 문을 열었다. 전과 같은 호텔의, 같은 방이었다.


"무슨 일로 부른거예요? 이런 곳까지 예약하고."


그녀는 모르는듯 했다. 이곳에서 이안에게 약을 탄 것을. 그저 순진무구한 척 하며 유혹적인 웃음을 보였다.


"할 말이 있어서."


이안은 주머니에서 그녀와 주고받았던 약혼 반지를 꺼냈다. 손가락에 무언가 있는게 싫어서, 그리고 귀찮아서 끼지 않았던, 그런 약혼 반지였다.


"그건.."


"파혼하자. 다른 사람 생겼어."


"..!"


여전히 무미건조한 투로 말하며 이안은 반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억대의 가격을 자랑하는 반지였지만 바닥에 떨어지니 별거 없었다.


"...왜..."


"그리고 난 너같은 오메가는 질색이거든. 배우자가 마실 술에 약이나 타고 말야. 왜 그때 그냥 간거지? 약까지 타놓고, 어찌 해보려던 속샘이 아니었나?"


이안이 한 발자국 다가갔다. 그녀는 주춤하며 뒤로 두 발자국 물러났다.


"그, 그게..!"


"왜, 겁났어? 하긴. 내 것이 그런저런 크기는 아니지."


아무렇지 않게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별 선물로 한 번 안아주면 되려나?


"..개자식.."


그녀는 마지막 발악이라도 되는 것 처럼 팔을 크게 휘둘러 이안의 뺨을 내리쳤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그녀가 꽤 화가 났음을 보여주었다.


"너 같은 건 줘도 안가져!"


자존심이 상하기라도 한 걸까.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런 호리호리한 몸에서도 이런 힘이 나오는구나, 그녀에게 맞은 뺨이 꽤 얼얼했다.


'이쯤이면 된건가.'


이안은 자리를 털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기분이 더러워져서 어딘가 풀 것이 필요했다.


밖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쌀쌀하고 칼날같은 바람이 부는 겨울이었다. 로비로 나오니 이미 제 차가 시동이 걸린 체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차에 올라 거칠게 몰며 저택으로 향했다. 지금 시간이 대충 9시이니 10시 즈음엔 도착하겠지. 자고 있을까?


'무슨 상관이야. 깨워서 하면 되는거지.'


ㅡㅡㅡㅡㅡ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창 밖으로 보이는 숲과 그 숲의 나무 위로 새하얀 눈이 소복 소복 올려졌다.


레냐는 추운 것도 모르고 발코니에서 눈을 보았다. 저를 닮은 하얀 것이 좋았다.


눈을 보다보니 옐레나가 생각났다. 이렇게 눈이 올 때면 옷을 두껍게 입고 밖에 나가곤 했는데..


알비노인 탓에 여름보다는 햇볕이 약한 겨울이 외출하기 좋았다. 여름엔 외출하고 싶어도 피부가 아파서 밤에만 겨우 나갈 수 있었다.


'백야일 때는 나갈 엄두도 내지 못했지.'


즐거웠던 날들이 생각나서 절로 행복해진 레냐는 베시시 웃음을 지었다.


한참 눈을 보고 있는데, 저 멀리에서 불빛이 맹렬하데 다가오고 있었다. 자동차 빛으로 보이는 것에 레냐는 황급히 방으로 들어와 불을 껐다.


저택에 돌아오고서 며칠간 레냐는 그날 밤 이후로 이안을 볼 수 없었다. 일이 바빠서 회사에서 밤을 지새고 있다고 루시아가 말해 주었다.


"어떡해.."


무서웠다. 이안이 너무 좋았지만 한편으론 무서웠다. 그는 꼭 레냐가 지쳐서 떨어져 나갔으면 하는 것 처럼 행동했다.


이불 속에 들어가서 아까는 느껴지지 않았던 추위에 덜덜 떨었다. 저택에 다 온 것인지 자동차 엔진 소리가 밖에서 멈추었다.


문을 세게 닫는 소리가 들려오고 덜 닫힌 창문 틈으로 현관문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흡.."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오랜만에 이안을 본다는 두근거림과 공포감이 공존해서 이게 무슨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한참동안 숨죽이고 있는데, 레냐의 방 문이 벌컥, 열렸다. 커다란 그림자가 점점 레냐에게로 다가왔다.


"일어나."


밖에 몰아치는 눈보라처럼 냉랭한 이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냐는 자는척을 포기하고 몸을 일으켰다.


"이, 이안..."

"벗어."

그는 레냐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보았다.


"내가 시키는 건 뭐든 다 한다며?"


레냐는 하는 수 없이 셔츠 단추를 하나 둘 풀렀다. 연고를 바른 덕분인지 며칠 세에 흉터가 많이 옅어져 있었다.


"..."


"아래도 벗어. 내가 이렇게 하나 하나 다 말해야 해?"


"알겠, 어요..."


바지와 함께 속옷까지 한번에 다 벗고서 레냐는 이안의 앞에 두 발로 섰다. 그의 캐시미어 머플러와 코트를 벗겨 침대 옆 의자에 두고 그 다음은 어찌 해야할지 몰라 힐끗 힐끗 그의 눈치를 보았다.


"...하.."

그런 레냐의 모습에 이안은 불만의 한숨을 내뱉었다.


"여태것 몸 팔았으면서 이런 것 하나 못하다니."


"..."


"빨아."


마음에도 없던 험한 말을 뱉으며 이안은 레냐의 어깨를 눌러 억지로 바닥에 앉혔다.


레냐는 무릎을 꿇고 그의 앞섶에 손을 가져갔다. 파르르 떨리는 손이 레냐가 겁을 먹었음을 알려주었다.


"제대로 해. 이 세우면 약혼은 없던 거로 할테니까."


"..네.."


눈물을 삼켰다. 그때 처럼, 모든걸 내려놓았을 때 처럼 레냐는 애써 생각을 전환했다.


'괜찮아. 이안이니까 난 괜찮아..'


억지로 밝게 웃으며 레냐는 그의 앞섶을 풀렀다. 드로즈를 살짝 내리니 반쯤 딱딱해진 이안의 페니스가 나왔다. 왼쪽으로 수납되어 있던 거대한 것이 툭 하고 레냐의 얼굴을 때렸다.


"..."


"뭐 해. 어서 시작해."


이안은 제 페니스를 잡고 레냐의 볼에 문질렀다. 이미 다른 한 손은 레냐의 머리채를 잡고 있었다.


"..."


겨우 눈물을 감췄는데, 레냐는 저를 다루는 이안의 모습에 비참해졌다.


입을 열고 귀두를 입 안에 머금었을 때, 이안이 갑자기 레냐의 머리를 제 쪽으로 당겼다.


"커헙...욱..우윽..!"


감긴 눈 틈으로 눈물이 비집고 나오며 숨을 쉬기 어려워졌다. 목을 계속 찌르는 것에 레냐는 헛구역질까지 하며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바닥에 내려놓지도 못하고 꼬옥 맞잡았다.


더럽다고 했으니까, 레냐는 이안의 몸에 손을 댈 수 없었다.


"정말, 제대로 할, 줄 아는게.. 뭐야?"


만족스럽지 않은지 이안은 그대로 레냐를 침대로 내팽개치고 발목을 잡아 끌었다.


"흑, 하악.. 학... 아, 아파.."


"허리 들어."


이안의 말에 복종하며 아픈 와중에도 레냐는 허리를 들어 그에게 뒤를 보였다. 수치스러웠지만 그래도 레냐는 행복했다.


그에게 이런쪽으로라도 필요한 존재라고 느껴졌다.


"허리 무너지면, 죽어."


레냐는 두 손 가득 베개를 움켜쥐었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그렇게 준비도 없이 거친 밤이 시작되었다.

12
"MEM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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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11-09 20:27 | 조회 : 309 목록
작가의 말
밍구는 밍구밍구해

오랜만에 분량 조절 실패로 돌아왔습니다! 사실 너무 오랜만에 와서 여러분께 드릴 선물은 없고... 저를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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