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6화

ㅡㅡㅡㅡㅡ


요즘들어 저택 안이 꽤나 소란스러웠다. 정확히는 다닐의 집무실이.


율리안은 서류를 보고하기 위해 그의 서재로 향했다. 한 손에 겨우 들어오는 양의 서류 뭉치를 들고 문에 노크한 뒤 문을 열었다.


"이번 거래 품목입니다. 요즘 정보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평소보다 양을 줄였습니다."


그가 다닐에게 건낸 서류에는 각종 신경계 약물과 자연적이지 않은 화학품의 이름들이 쭉 나열되어 있었다.


"아, 수고 많았네. 요즘은 어떤가?"


"저야 뭐 평소대로 지내고 있죠. 덕분에 의사 일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럼 다행이고.. 왠지 조만간 일이 터질 것 같거든."


그는 은은하게 웃어보이며 어딘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곧 오십 대 초반이 될 다닐은 젋었을 때의 외모를 그대로 간직한 체 주름이 조금 더 늘어난 정도였다.


"..자녀분 관련된 일입니까?"


율리안은 조심스레 물었다. 레냐에 대한 일이 터졌을 때도 만만찮게 피해를 본 다닐이었다. 율리안이 적당한 선에서 대처한 덕에 레냐가 불미스러운 일을 당하는 일은 없었다.


"..때가 되면 알거야. 그럼 아무런 의심도 하지 말고 데니스의 말을 따라주길 바라네. 그 아이, 내가 괜히 키운게 아니거든."



다닐의 말에 율리안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다음날, 평소와 같던 그가 죽었다는 말과 함께 우려했던 것은 일어나고 말았다.


며칠만에 보는 것인지, 레냐는 말 할 수 없이 처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운을 입어 자세한 건 볼 수 없었지만 멍 투성이인 데다가 얼마나 운 것인지 눈가가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데니스가 말한 것을 참고해 이것 저것 약을 챙겨갔지만 대체 왜 이러한 약들이 필요한지 몰랐었던 그였다.


레냐는 처음, 아이를 가졌다고 했을 때처럼 복통을 호소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불법으로 제조된 것이지만 아이를 없에는 약을 레냐에게 주었다.


데니스의 말로는 레냐가 누명을 썼다 하였다. 율리안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보아도 그 말에 동의할 것이다.


"율리안도.. 약점 잡힌 거예요? 나 때문에..?"


레냐는 자신이 아픈 와중에도 다른 이를 걱정했다. 이를 보면 꼭 옐레나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무도 레냐와 율리안이 피를 나눈 가족이란걸 모르니 약점이 잡힐 일은 없었다.


"그게 아니다. 너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말거라."


율리안이 해줄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할 수 있는것도 없었다. 그저 아프다고 하면 약을 주고, 치료하는 것 뿐이었다.


데니스가 계획을 세웠다고 하니 율리안은 그의 말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다닐도 그런 말을 했지만 이안 보다는 데니스가 더 믿음직스럽고 레냐를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야 데니스는 더러운 뒷사회에서 구르고 구른 사람이니까.


율리안은 더이상 보고 있을 수 없어 방을 나왔다. 약을 먹은 것인지 레냐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개발중인 약이라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모르는 위험한 약이다.


몸의 균형이 망가질 수도 있고 심하면 아예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될지도 모른다.


율리안은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소리죽여 흐느꼈다.


결국 자신은 오랜 옛날에도, 지금도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의사가 되는 것이 무어라고 그렇게 노력했을까.


결국 제 곁에 있는 가족도 지키지 못했는데.


ㅡㅡㅡㅡㅡ


이안이 다녀가고 그 다음날, 레냐는 하루 종일 누워 있을 수 있었다. 갑자기 고열에 시달리는 바람에 '손님'께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이유로 레냐는 휴식을 가질 수 있었다.


항상 레냐는 침대가 아닌, 이불을 몸에 두르고 구석에 앉아야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율리안이 침대에 누워 있으라 했지만 레냐는 그 말을 어기고 평소처럼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콜록.."


이불 끝을 손에 꼭 쥐고 레냐는 오들오들 떨었다. 감기에 걸리기라도 한 것일까? 이상하게 열이 나고 기운도 없는데다 눈앞이 핑 돌았다.


게다가 레냐는 온 감각이 곤두서서 머리도 아파왔다.


홀로 어두운 방 안에서. 밖에 들리는 묵직한 구둣발 소리와 끌리는 발소리, 특유의 지하 냄새와 웅웅거리는 진동소리같은, 평소라면 잘 들리지 않는 소리들 때문에 힘들었다.


신경쓰이는 것 보다도 자꾸만 내려앉는 무거운 두 눈꺼풀 때문에 레냐는 서서히 잠에 들려고 했다. 작았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레냐가 있는 이 방 앞에 멈춰섰다.


"...?"


레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문을 응시했다. 문고리가 살짝 흔들리며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레냐의 두려움과는 달리 의외의 인물이었다. 그동안 모습을 비추지 않아 걱정했던 데니스였다.


"거기서 뭐 해? 아프다며."


그는 큰 보폭으로 한달음에 레냐에게 다가왔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레냐는 여전히 무릎을 품에 꼭 끌어안은 체 그를 올려보았다.


"눈도 다 부었네. 많이 힘들었지?"


데니스가 몸을 낮추어 레냐의 얼굴을 스다듬으려는듯 손을 뻗었다.


"헉.."


그 손길에 놀라 레냐는 순간 그의 손을 쳐내었다. 데니스의 손이 그대로 옆으로 밀려나고 겁에 질린 레냐는 덜덜 떨며 그를 두려워 하는 눈으로 보았다.


레냐의 반응에 그는 손을 거두고 시선을 맞추기 위해 쭈그려 앉았다. 여전히 모든게 공포스럽다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레냐."


또 한번, 그는 맞을 각오로 레냐를 끌어안았다. 자연스럽게 무릎을 바닥에 대고 레냐를 품에 꼬옥 안으며 부드럽게 등을 토닥여 주었다.


데니스의 단단한 어깨 위에 기대 레냐는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에 흠칫 몸을 떨었다. 저를 탐하려, 침범하려 오는 손길과는 다른 손길에 레냐는 긴장이 풀렸다.


"...아...흡... 흐윽..."


데니스가 등을 토닥여준 것이 레냐가 꾹꾹 눌러왔던 슬픔과 억울함, 분통함을 한번에 해방시켰다. 레냐의 상처투성이인 작은 두 손이 데니스의 넓은 등판을 감쌌다.


"..나, 나.. 나갈래.. 여기서 나갈래..."


작은 몸이 애처롭게 떨리는 것이 데니스의 팔을 타고 온 몸에 전달되었다. 이렇게 떨고 있는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일찍 왔을텐데, 하고 그는 아무 말 없이 토닥여 주었다.


"...장부만 찾으면.. 금방 널 꺼내줄 수 있어. 그때까지만 버텨보자.."


그는 레냐를 번쩍 안아들고 푹신한 침대 위에 앉혀주었다. 또다시 몸에 힘이 들어가 바짝 긴장하는 레냐였지만 그는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았다.


"내가 너 손님 받지 않게 노력해볼게. 그동안 아팠던거 다 치료받고 조금만 기다려줘."


"...그때도.."


레냐가 입을 조금 달싹였다. 너무 울어서인지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 있었다.


"..그때도 기다리라고.. 버티라고 했잖아."


"..."


"또 기다려야 되는거야..? 너무 아픈데.. 정말.. 아픈데.."


부유하듯 떠오른 수치심과 절망에 레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두 손 가득 쥐어진 이불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이제.. 그만하고싶어.. 차라리 죽을래."


"레냐."


"날 싫어한다 했어.. 이안이.. 이제 내가 싫다고 했어.."


레냐의 입에서 이안의 이름이 나오자, 데니스는 주먹을 꾹 쥐고 침대를 내리쳤다. 그에 놀란 레냐는 동그래진 눈으로 왜인지 화난 얼굴을 한 데니스를 바라봤다.


"레냐.. 그 자식은..! ...아드리안은 널 좋아한 적 없어. 넌 이용당한 거라고."


"...아니야..그럴리가.."


레냐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즐거움의 웃음이 아닌, 부정적인 웃음이었다.


"그럴리가... 없어... 아니야..."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레냐는 중얼거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 굵은 물방울을 떨어뜨리며 힘없이 축 늘어졌다.


"...레냐. 이제 포기해. 그녀석 대신 내가 널 지켜줄테니까..."


"거짓말... 날 지켜준다는게.. 이런거라면 싫어."


레냐가 던진 말에 데니스는 몸을 멈칫 했다. 마치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레냐는 꼭 이 일에 대해 아는 것 처럼 느껴졌다.


"...미안. 피곤할텐데 어서 자. 난 그만 가볼게."


허둥지둥 당황하며 그는 레냐의 방 밖을 나왔다. 레냐는 조용히 울었다.


그가 나간 방 문을 한참 바라보다 레냐는 다시 침대에서 내려왔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앉아 이불을 꽁꽁 여미며 잠에 들었다.





데니스가 했던 말대로 레냐는 손님을 받지 않았다.휴대폰도, 시계도 없어 며칠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매일 정해진 양으로 두번 나오는 식사로 대충 추려보면 이주일 정도 흐른 것 같았다.


그동안 몸을 회복하며 레냐는 전과는 달리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안이 말은 거칠게 했어도 꼭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고.


데니스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죄 없는 율리안도 어떻게든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속으로 몇번이나 되뇌이며 레냐는 마음을 굳혔다.


그렇게 체념하고 지내던 무렵, 휴식의 끝을 알리는듯 그들이 찾아왔다.


레냐는 하는 수 없이, 이제는 그들의 손이 아닌 스스로 준비를 했다.




터덜 터덜 걸어서 레냐는 고급진 방 문 앞에 섰다. 이곳에 오는것도 꽤 오랜만이었다.


옆에 있던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며 레냐와 키가 비슷한 여성으로 보이는 사람이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낮은 톤의 목소리에, 이질적이지만 어딘가 익숙하게 들리는 다른 나라 말에 레냐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이 사람의 복식도 다른 나라의 것이었다.


"보스께서 말씀하셨던 그 아이 입니다."


"...."


남자는 당당하게 중국어로 레냐를 설명했다. 한참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그 사람은 문 밖으로 나와 어디론가로 뚜벅 뚜벅 걸어갔다. 신비로운 분위기에 넋을 잃은 레냐는 저가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를 만큼 붕 뜬 기분이 들었다.


어느세 방 안에 들여보내져서 레냐는 주섬주섬 가운을 가다듬고 천천히 '손님'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흑색 비단같은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고 등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와인을 따라 마시며 여유로움을 보였다.


한참을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레냐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의 그 사람과 같은 언어인 중국어로.


"너 중국어는 할 줄 아나?"


"...조금.."


레냐는 양심것 대답했다. 어릴적 책으로 배우고 커서는 조직 일을 위해 몇 번 발음만 가다듬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군. 넌 오메가인가?"


"...네."


대답을 하면서도 레냐는 의구심을 품었다. 이렇게 건전한 질문을 하는 이는 그가 처음이었다. 아니면, 아직 시작을 안했다거나.


"이를 어쩌지. 난 오메가 페로몬을 느끼지 못해."


"...베타.. 이신가요..?"


"아니."


그는 손에 들고있던 와인잔을 탁자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는 뒤에 서있는 레냐에게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다.


"난 알파야. 특이한 병을 가진 알파. 근데도 왜인지 모르지만.. 네 향은 느껴지는군. 신기해."


큰 키를 가진 그는 주머니에 양 손을 넣은 체 레냐를 훑어보았다. 허리를 숙여 노골적으로 바라보다가 그는 긴 손가락으로 침대를 가리켰다.


"가서 누워."


레냐는 떨었다. 아까의 판단은 아주 큰 오류가 있었다.


그도 어쩔 수 없는 알파였던 것이다.


침대에 오르기 전, 레냐는 가운을 푸르려고 매듭을 잡았다. 하지만 풀 수 없었다.


"뭐 하는 거야."


그가 레냐의 손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레냐는 벙 찐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이전과는 다른 '손님'에, 그가 너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야... 해야 하니까요.."


"오늘은 안 해도 돼. 네 얼굴을 보러 온 거지, 널 범하려 온게 아니야."


그는 손을 놓고 레냐를 침대에 앉혔다. 아직 상황 파악이 잘 안되는듯 레냐는 그를 뚫어지게 보았다.


"이름이 뭐야?"


그가 싱긋 웃으며 질문했다. 레냐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레냐.. 레아니드예요."


"그래. 제대로 찾아왔네."


"...?"


그가 손을 뻗어 레냐의 머리카락을 스다듬었다. 흠칫 놀라긴 했지만 레냐는 자신에게 손대지 않겠다고 한 그의 말을 믿기로 했다.


"난 리뤼양이라고 해. 그냥 뤼양이라고 불러."


"어... 청수의... 후계자...님..?"


레냐가 기억을 더듬어 언젠가 보았던 명단을 떠올렸다. 루브, 그가 꼭 붙잡아야 한다며 중요하게 찍었던 이들 중에 뤼양의 이름이 있었다.


"똑똑하네. 순진하고.....그녀석이 반할만 했어...."


뤼양이 말 끝을 흐리며 레냐가 듣지 못하도록 했다. 여전히 손은 새하얀 머리카락을 스다듬고 있었다.


"지금은 푹 쉬어. 내가 시간 좀 벌어줄테니."


그가 말을 마치고 소파로 돌아가려는듯 몸을 돌렸다. 순간, 레냐는 그런 그를 다급히 붙잡았다.


루브가 말한 꼭 잡아야 하는 손님이라면 레냐는 지금 감시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 이런 손님이 오면 레냐가 도망갈까봐 항상 앞에서 대기했으니까.


"안..돼요... 저.."


레냐는 두려움에 떨며 조금씩 말을 꺼냈다. 무서움에, 몸이 떨려와서 그가 알아듣지 못하는 레냐의 모국어도 튀어나왔다.


여태것 쉬었으니 지금 제대로 하지 않으면 반드시 루브는 벌을 내릴 것이다. 이미 머릿속에 각인된 공포가 레냐의 발목을 붙잡았다.


"..저.. 안 하면... 혼나니까.. 제발..."


매혹될 것 같은 자주색 눈동자가 뤼양을 애처롭게 응시했다. 반면, 그의 황금빛 눈동자는 당황에 휩싸여 있었다.


"...제발.. 안아주세요.."

9
"MEM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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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10-25 17:16 | 조회 : 256 목록
작가의 말
밍구는 밍구밍구해

아이고 레냐야ㅠㅠ 아이고 데니스 ㅠㅠ 아이고 율리안 ㅠㅠ 아이고 아버님 ㅠㅠ(이 작가 왜 이러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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