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1화(주의)



차가운 물방울이 툭, 툭 볼 위로 떨어졌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레냐의 눈은 공허함만 가득했다. 오른쪽 손목에는 은색의 수갑이 벽 높은 곳에 있는 고리와 연결되어 레냐를 붙잡고 있었다.


자신을 보던 데니스의 원망서린 표정이 아직도 눈 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처참하게 펼쳐진 피투성이의 집무실 또한 자꾸만 아른거렸다.


무릎을 꿇고 앉아 벽에 기대 레냐는 창백한 모습으로 처분을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데니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녹슨 철문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열리고 닫혔다.


"..."


그는 말없이 레냐를 내려보았다. 레냐는 힐끗 그를 올려다보고 이내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네가 죽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해볼게."


낮은 목소리로 그가 읆조렸다. 레냐는 자신을 범인이라고 확정지은듯한 데니스의 말에 울컥해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데니스도.. 내가 그랬다고 믿는거야..?"


레냐의 울적한 목소리에 그는 손가락을 움찔였다. 당연히 레냐는 아무런 죄도 없었다.


단지 뒷세계에 발을 들인, 다닐의 피가 섞인 오메가라는 이유로 이런 일을 당할 뿐.


"...집무실 안의 모든 것이 널 지목하는데 누가 네가 아니라고 하겠어?"


데니스는 준비한 각본대로 레냐를 추궁했다. 이런식으로 레냐를 몰아가다 보면, 모든것이 레냐를 힘들게 하면 언젠가 자신에게 매달리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나, 나는 정말.. 아무런 기억도 안 난단 말야. 분명 난 문 앞에서..!"


레냐가 목소리를 높혀 무어라 말 하려던 순간 철문이 다시 마찰음을 내며 활짝 열렸다. 검은 수트를 입은 두 남자가 문을 통해 들어오고 므라크의 보스, 루브가 들어왔다.


"자백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


그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데니스는 그들에게 밀려나 레냐를 내어줄 수 밖에 없었다.


"싫어.. 하지마..! 난 아니야.. 아니라고!"


레냐는 오열하며 수갑에서 자유로운 왼손으로 그들을 거부했다. 하지만 아무런 힘이 없는 레냐는 손쉽게 부하들에게 제압당하고 말았다.


바닥에 엎드려 양 손목이 뒤로 된 체 레냐는 숨을 헐떡이며 눈물을 흘렸다. 벽에 연결되어 있었던 수갑 고리가 왼손목에 걸리고 나서야 그들은 레냐에게서 손을 떼었다.


"마지막 기회다. 자백한다면 험한 꼴은 보지 않을테니..."


루브는 친히 몸을 낮춰 바닥에 널브러진 레냐의 턱을 잡아 올렸다. 그의 뜻과는 달리 레냐의 눈은 여전히 결백을 주장했다.


"어쩔 수 없군. 데려가."


"..! 잠ㄲ..!"


부하들이 레냐를 들어올렸다. 데니스가 그들을 막아서기도 전에 그들은 레냐를 질질 끌고 철문 밖으로 향했다.


레냐는 끌려가면서 애처로운 눈으로 데니스를 보았다.


"..살려..줘.."


짧은 순간동안 레냐의 입술이 달싹였다. 아무도 없는 텅 빈 방에서 데니스는 짧게 탄식했다. 분명 계획대로 되고 있음에도 어딘가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어차피 루브는 레냐도 처리할 생각일테니 데니스는 그러기를 기다렸다가 레냐를 빼돌리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언가를 놓치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눅눅한 방 문을 열고 나왔다.





그들이 레냐를 끌고 온 곳은 지하의 고문실이었다. 레냐는 간부도, 고문관도 아니었기에. 서류만 보며 처리하는 일만 했기에 지하까지 내려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심문하는 입장이 아닌 당하는 입장으로.


그들은 레냐를 따로 묶지 않았다. 아무런 예고 없이 등을 밀어 차갑고 딱딱한 시멘트 바닥에 내던졌다.


"으윽."


쓰러짐과 동시에 몸을 둥글게 말아 다른곳이 부딪히지는 않았지만 바닥에 마찰한 팔과 어깨가 쓰라렸다.


"가엾은 것. 그러게 왜 모습을 드러내서 고생이야? 그날 네 어미와 뒤졌으면 이런 험한 꼴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레냐의 눈 앞에 놓인 나무로 된 의자에 앉은 루브는 한심하다는듯 혀를 찼다. 발 끝으로 어깨를 툭툭 쳐서 얼굴이 잘 보이게끔 레냐의 몸을 돌렸다.


"넌 자유가 될 기회를 놓친거야. 아나스타샤님께서 주신 기회를 네가 살아남는 바람에 놓친 거잖아?"


오랜만에. 아니, 처음 들어보는 아니샤의 풀네임에 레냐는 소름이 돋았다. 그녀의 이름만 들어도 온 몸이 떨려왔다.


"..엄마를 죽이라고 시주한게.. 당신들이었어?"


떨리는 눈동자가 제법 애달팠다. 레냐는 여지것 그날의 일은 불량배들이 쳐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레냐는 후회와 절망에 몸이 차갑게 굳어지는 것 같았다. 여태것 자신은 옐레나를 죽인 이들을 위해 일해온 것이었다.


"이제와서 그런게 뭐가 중요해? 뭐, 우리는 네가 이렇게 잘 커줘서 한편으론 고마우니까."


루브는 의자에서 일어나 레냐를 내려보더니 발을 들어 딱딱한 구둣발로 레냐의 복부를 짓이겼다.


"딱 한번. 기회를 줄게. 어때?"


"윽, 아, 아파.."


"우리는 네녀석이 깨끗한 척 사는게 너무 싫거든. 사람 하나 잘 꼬셔서 소리도 없이 죽여버린다면 목숨은 살려줄지 누가 알아?"


그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레냐의 눈 앞에 사진 하나를 툭 떨구었다. 루브의 발이 레냐에게서 떨어지자 그의 부하들이 레냐를 일으켜 앉혔다.


"거기 그 놈. 죽이면 살려줄게. 그놈이 최근에 우리 회장님 주식을 빼돌렸거든."


"정말... 이것만 하면 살려주는겁니까..?"


"약속하지."


고개를 들어 그를 한 번 쳐다보고 레냐는 다시 사진 속 인물을 들여보았다. 그는 꽤 소문이 자자한 부동산 업계의 큰 손이었다.


레냐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사람을 죽인다면 다시는 밝은 빛을 볼 수 없게 되어버린다.


평생 뒷세계를 전전하며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서는 이안에게 닿을 수도 없게 될지도..


한참을 고민 끝에 레냐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니스는 옆자리 조수석에 앉은 레냐를 힐끗 보았다. 새하얀 은발과 대조되는 검은색의 드레스가 화려하게 돋보였다.


평소였다면 아름다운 레냐의 모습에 데니스는 순수하게 감탄했겠지만 어째서인지 레냐의 우울하게 가라앉은 표정이 그의 마음 한구석을 찔렀다.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도망치자."


빨간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추자 데니스는 레냐에게 말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손가락만 꼼지락 거리던 레냐는 그의 말에 흠칫 하며 고개를 들었다.


"도망간다 해도.. 그들이 날 찾지 못한다는 보장은 없잖아."


"내가."


파란 신호가 되자마자 데니스는 악셀을 밟았다. 빠른 속도를 내며 주변에 어떠한 차도 없을 때 데니스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지켜줄게. 그자식들이 다시는 널 못 건드리게."


"..."


그의 말에 레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데니스는 속이 탔지만 계속 레냐를 기다렸다.


결국 그들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못하고 파티가 열린 호텔에 도착했다.


"걱정마. 나도 혼자 잘 할 수 있어."


"레냐.."


"내 결백을 증명하는게 이 방법 뿐이라면.. 이게 함정이어도 난 할거야."


레냐는 권총 탄창에 들어있던 총알을 모두 빼내었다. 단 두개만 집어넣고 권총에 다시 끼워넣은 뒤 드레스 자락 속 허벅지에 매달아둔 권총집에 집어넣었다.


그런 레냐를 바라보며 데니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있다가 봐. 나 두고 도망가면 안돼."


레냐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농담 투로 말했어도 분명 레냐의 목소리에 울음이 가득 섞여 있었다.


데니스가 무어라 할 틈도 없이 차문이 열렸다 닫혔다.


손바닥 위에 있던 하얀 새를 놓친 꼬마처럼 데니스는 차 안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꽤 높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임에도 호텔 안은 경비가 허술했다. 레냐는 사람이 많은 홀이 아닌 지하로 향했다.


레냐의 목표인 그는 손발이 넓은 만큼 뒷세계에도 뻗어있는, 한편으로 악명높은 사람이기도 했다.


지하 층에 도착하자마자 새하얗게 낀 담배와 마약 연기에 레냐는 코를 막았다. 다행히 아주 진한 마약은 아닌듯 환각이나 환시가 보이진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인지 몰라도 지하의 환기는 제대로 이루어지는 모양이다.


웨이터들이 건네는 술잔들을 죄다 물리고 레냐는 사진속 인물을 찾기 위해 이곳 저곳 돌아다녔다. 가끔 알파의 페로몬에 화들짝 놀라기도 했지만 억제제를 먹어둬서인지 반응이 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진을 가져오진 않았지만 기억속에 선명한 그 남자를 찾아다니다가 언뜻 닮은 사람을 발견하곤 가까이 다가갔다.


'찾았다.'


그는 소문대로 방탕하면서 부유해 보였다. 양 옆에 검은색 초커를 한 오메가들을 끼고 술을 마시는 모습이 보고싶지 않아서 레냐는 어서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에 끼어 대화를 하면서도 그를 향해 시선을 계속 보내었다. 그도 눈치챘는지 레냐 쪽으로 눈길을 보내었다.


한참 그러기를 기다렸다가 레냐는 조심히 자리를 떴다. 예상대로 그는 그 자리를 물리고 레냐를 따라왔다.


"잠깐. 거기 멈춰봐."


레냐는 그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사진속에서 볼땐 몰랐는데, 그는 꽤나 준수한 외모를 한 30대 즈음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무슨 일이시죠?"


애써 기교 섞인 목소리를 내며 레냐는 활짝 웃었다. 당장이라도 그만 두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꾹꾹 참으며 레냐는 그에게로 한발짝 다가갔다.


"계속 보기만 하다가 가려는거 같길래. 나도 저 자리가 별로였는데 잘됐다 싶어서 따라왔지."


생긴것과는 다르게 말투가 툭툭 튀었다. 아무래도 귀한집 출신은 아닌듯 싶었다.


"제가 좀 바쁜데."


레냐는 일부러 튕기며 급한척 자리를 뜨려 했다. 그는 다급한 표정을 짓더니 서둘러 레냐의 가녀린 손목을 붙잡았다.


"잠깐만..! 한시간! 한시간만이라도 좋으니까.. 응?"


어쩐지 그는 간절해 보였다. 이상하리만치 잘 풀리는 일에 레냐는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빨리 끝내고 가면 좋은 거니까. 레냐는 스스로 타협하고 그와 함께 룸으로 이동했다.


풍성한 드레스자락 안에, 제 허벅지에 묶여있는 권총에 마음을 의지하고 그의 손에 이끌려 룸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문이 닫히자마자 레냐를 벽으로 밀쳐 몰아넣고는 몸을 숙여 레냐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간질간질하게 느껴지는 숨결에 소름이 돋았지만 레냐는 꾹 꾹 참았다.


"흡. 후아.. 너, 처음 아니지?"


"...글쎄요."


꼭 발정이 난 개처럼 레냐의 몸을 훓는 남자의 손길에 레냐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참으면 없에버릴 수 있다.


남자가 레냐의 입술을 덮었다. 억지로라도 레냐의 굳게 닫힌 입술 틈을 열려고 했지만 꾹 다물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키스에 정신팔려 있을 때, 레냐는 조심스럽게, 눈치채지 못하게 손을 제 허벅지로 가져갔다. 유혹하는 듯 치맛자락을 들어올리며 순식간에 권총을 빼내 총구를 그의 머리를 향해 들었다.


"아윽!"


그러나 이번엔 레냐의 행동이 가소롭다는듯 남자는 멀쩡한 모습으로 총을 한손으로 쳐내었다.


"저런. 총을 빼는데 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잖아. 좀 더 빨리 했어야지. 게다가 근접전인데... 이럴땐 칼을 쓰는거야, 꼬마야."


"으흑, 아파.. 이거 놔!"


레냐는 발버둥치며 그에게 붇잡힌 오른손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움직여도 그는 목석처럼 버티고 있었다.


레냐는 하는 수 없이 비상용으로 준비했던 작은 칼을 꺼내 그를 향해 그었다. 다행히 이번 건 먹힌듯 그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크윽, 이 새끼가..!"


남자는 피가 흐르는 볼을 손으로 누르고 레냐를 향해 성큼 성큼 다가왔다. 레냐는 칼을 바닥에 내던지고 문으로 뛰었다.


"흑, 으아..!"


그에게 머리채를 잡히기 전, 레냐는 가까스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앞에 서있던 무언가에 부딛혀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다.


"학, 아, 아아..."


레냐는 절망했다. 바닥에 주저앉은 체 뒤로 주춤했지만 뒤에선 그 남자가, 앞에선 루브와 그의 부하들이 레냐의 도주로를 막았다.


"가져와."


루브의 짧은 말에 뒤에 있던 부하가 작은 케이스를 건냈다. 그 안에서 그는 작은 주사를 하나 꺼내더니 루브의 손에 넘겨주었다.


레냐는 단번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오메가용 흥분제. 그들의 표정만 봐도 그것이 누구에게 쓰일 것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도망치기 위해 몸을 일으켰는데 그들은 레냐를 너무나도 쉽게 제압했다. 바닥에 짓눌려있는 레냐의 목에 그 서늘한 주삿바늘이 닿았다.


"흑, 아악..!"


레냐의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주사기에 담겨있던 그 액체가 온 몸에 퍼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레냐의 몸을 짓눌렀던 손을 떼었다. 그저 가만히 레냐가 흠칫거리는 모습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9
"MEM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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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10-07 16:47 | 조회 : 355 목록
작가의 말
밍구는 밍구밍구해

ㅠㅠ 아구 불쨩해ㅠㅠ(영혼 가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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