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0화



레냐는 눈을 떴다. 방 안에 스멀스멀 빛이 들어오는 것이 새벽임을 알려주었다.


몸을 일으키려고 했는데 제 등을 짓누른 이안 때문에 일어날 수 없었다. 레냐는 그를 옆으로 밀어내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으윽, 아파..."


허리에서 느껴지는 시큰한 고통과 불쾌하게 끈적거리는 액체가 애널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행위가 끝나고 노팅이 된 상태로 둘 다 잠든 것 같았다.


"...."


레냐는 고민했다. 만약 이대로 이안과 함께 집에 들어간다면 큰 의심을 살 것이 분명했다. 아직 다닐과 약속한 시간이 한달 이상이나 더 남았는데 이대로 집을 나가고 싶지 않았다.


먼저 집에 들어갈 생각으로 제 옷을 주섬주섬 주워 하나 둘 몸에 끼워넣었다. 온 몸이 저릿거려서 눈살을 찌푸릴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침실 밖으로 나가려는데 잠에서 깬 이안이 레냐의 팔을 붙잡았다.


"어디 가..?"


"집. 우리가 같이 들어가면 의심 살테니까 내가 먼저..."


"됐어. 그냥 같이 나가."


레냐의 속을 모르는 이안은 시큰둥하게 말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머리를 대충 손으로 빗질한 뒤 이안은 레냐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고 방을 나와 거실 소파에 앉혔다.


"내가 먼저 들어갈게. 정말 혼날지도 몰라."


과연 혼나는 것 뿐이겠는가. 레냐는 지금 출가의 여부가 걸린 일이었다. 아무리 애절하게 말해도 이안은 들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무슨 상관이야. 너도 다 컸는데 아버지도 그정도는 알아서 판단..."


"아버지가 알고있어. 내가 오메가인거."


"..."


"난 지금 당장 쫓겨날지도 모르는데..."


레냐가 눈물을 보였다. 새하얀 뺨으로 투명한 물방울이 주륵 흘렀다.


그런 레냐를 이안은 무미건조한 눈으로 내려보았다.


"그래서?"


"...뭐?"


"그래서 어쩌라고."


이안은 레냐의 맞은 편 소파에 앉아 차갑게 말을 던졌다. 서늘한 시선에 레냐는 바들바들 떨리는 양 손을 맞잡고 꾹 쥐었다.


"네가 집을 나가면 더 좋은 거 아냐? 들킬 걱정 없이 섹스할 수 있잖아."


"이안..."


"그리고 네가 나가는거지 난 상관 없어. 네가 입만 잘 다물고 다니면 나한테 피해오는것도 없고."


"..."


이안의 말에 레냐는 입을 다물었다. 집을 나간다 해도 아예 못보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근데 자신은 무엇을 걱정하고 있었던 걸까? 어쩌면 이안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온 몸이 떨려왔다.


"어차피 난 회사에 들어가봐야 해. 너 혼자 외박했다고 둘러대면 되는 일 아니야?"


"..."


적막 가운데 이안의 휴대폰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이안은 전화를 받으며 특유의 접대용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잘 들어갔어요? 내가 경황이 없어서 바래다주질 못했네."


레냐는 눈을 꾹꾹 눌러 닦은 뒤 다른 방으로 자리를 움기는 이안을 지켜보았다. 이안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레냐는 한순간에 몰려든 역겨움과 구토감에 서둘러 제 물건을 들고 룸을 나왔다.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나왔지만 그것을 닦을 여유는 없었다. 앞도 보지않고 복도를 걷다가 무언가와 툭, 부딪혔다.


"윽, 죄송합니ㄷ.."


"레냐..?"


레냐는 제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부딪힌 사람은 데니스였다.


"...데니스.. 왜.. 여기에.."


"일 때문에. 근데 넌 왜 여기 있어? 왜 울고있는거야?"


"..아.."


데니스의 말에 다급히 눈물을 닦으며 레냐는 혹시나 들킬까봐 흐트러진 곳이 없는지 제차 확인했다. 다행히 엉성한 부분은 없었다.


"나도.. 일 때문에..."


"끝났으면 나랑 같이 가자. 아침 아직 안먹었지?"


"...응."


데니스는 레냐의 옆에 서서 그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투박하지만 다정하게 어깨를 감싼 손이 어딘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레냐 모르게 데니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바들바들 떨리는 레냐의 손에 새빨갛게 든 잇자국들과 미약하게 느껴지는 이안의 페로몬이 거슬렸다.


그래도 레냐에게 따질 수는 없었다. 데니스는 그저 속으로 분노를 삭힐 뿐이었다.





호텔에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둘은 함께 저택으로 돌아왔다. 둘이 함께 귀가한 것에, 레냐가 외박을 한 것에 다닐은 눈살을 찌푸렸다.


"내 서재에 들렀다 올라가라."


레냐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다닐은 그들을 지나쳐 자신의 서재로 향했다. 레냐가 불안해하자 데니스는 레냐를 토닥여 주었다.


"겁 먹지마. 네가 외박한게 처음이라 걱정돼서 그러시는 거일꺼야."


"...응."


자신을 위로해주는 데니스를 뒤로 하고 레냐는 다닐을 따라 서재로 왔다. 불만스런 표정을 지은 다닐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앉거라."


"네.."


"어디에 있었던거냐? 왜 데니스와 함께 들어온거지?"


다닐은 다짜고짜 레냐를 추궁했다. 격양된 어조가 레냐를 겁먹게 만들었다.


"...어제 일이 많아서.. 야근 하다가.. 데니스랑은 정말 우연히 만나서 같이 들어온거예요. 진짜예요.."


레냐는 결국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다행히도 레냐의 변명이 통한 것인지 다닐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한참을 망설이더니 말을 꺼냈다.


"...마지막 기회다. 또 이런 일이 일어나면.. ...하.."


다닐은 한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레냐는 그가 우는 모습에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아버지.."


"네가.. 네가 옐레나처럼.. 떠나버릴까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의 입에서 옐레나의 이름이 나오자 레냐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10년이 넘게 세월이 지나 대부분 기억속에 묻어졌지만 레냐는 그 아픔만은 잊을 수 없었다.


"...미안하다. 피곤할텐데 어서 올라가거라."


"네.. 죄송...합니다.."


레냐는 허겁지겁 다닐의 서재를 나왔다. 입술을 꾹 깨물고 눈물을 삼키며 서둘러 제 방에 들어왔다.


"흡.."


문을 걸어잠그고 바닥에 주저앉아 몸을 웅크렸다. 참아왔던 눈물이 터져나오며 옷을 적셨지만 그것이 중요한게 아니었다.


레냐는 다닐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양심에 찔렸다. 그는 진심으로 레냐를 걱정하고 아끼는데, 그것을 레냐는 배신한 기분이 들었다.


그날은 레냐에게 상처만 남은 날이 되었다.


ㅡㅡㅡㅡㅡ


데니스는 고민했다. 아니샤의 말대로 다닐을 죽인다면 과연 그게 자신에게 이득이 될까?


'만약 함정이라면..'


만일의 일에 대비해 보험은 필수였다. 데니스는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는 루브를 이용하기로 했다.


아니샤는 그를 도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루브를 구워삶는 것은 무엇보다 쉬운 일이었다.


손바닥 안에서 무색의 액체가 든 작은 병을 굴렸다. 데니스의 시선은 그 안에서 찰랑이는 액체에 꽂혀 있었다.


"후우..."


약병을 손에 꾹 쥐고 데니스는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레냐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그는 옅게 미소를 띄었다.


"이제... 아무에게도 주지 않을거야.."


그는 곧장 다닐의 집무실로 향했다. 노크를 두어 번 하고 곧바로 문고리를 돌려 열었다.


"..? 데니스? 네가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서류를 보고 있던 다닐은 뜻밖의 손님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께... 꼭 해야하는 말이 있어서요."


"일단 앉거라."


다닐의 말에 데니스는 성큼 성큼 소파를 향해 걸었다. 다닐이 소파에 앉고 나서 데니스는 진중한 표정을 짓고는 맞은 편에 앉았다.


"무슨 일이냐? 네가 찾아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데니스는 표정을 굳혔다. 어릴적부터 생존을 위해 배워온 표정 연기는 같은 킬러라도 속아넘어갈 정도였다.


"레냐가 죽을지도 모릅니다. 아니샤가 움직이기 시작했거든요."


"..."


"그래서 온겁니다. 저는 레냐가 죽는 걸 원하지 않으니까요."


다닐은 아무 말 없이 고민했다. 데니스가 말한 것이 사실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고민되었다. 레냐를 출가시킨다 한지 한달이 지났다. 그들은 레냐가 저택을 나가는 순간을 벼르고 있는 것일까?


데니스는 자신이 한 말에 고민하고 있는 다닐의 모습이 한심했다. 다른 일이었다면 바로 결정을 내렸을 텐데 겨우 레냐의 일이라고 고민하는 것이 우스웠다.


항상 자신에게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말라 교육했으면서 본인이 그러고 있는 꼴이라니.


"..."

데니스는 애써 표정을 숨겼다.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다닐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네게 레냐를 부탁하고 싶구나. 이안은 이미 그쪽 사람일테니.. 차라리 네가 더 믿음이 간다. 그래주겠느냐?"


"...."


생각하지 않았던 의외의 답변에 데니스는 숨을 텁 삼켰다. 다닐은 여지것 데니스에게 수많은 명령을 내렸지만 이렇게 부탁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이안이 아닌 자신을 선택한 것에 이유모를 희열감도 느껴졌다.


"그것 말고도 방법은 하나 더 있습니다."


"..? 그게 무엇이지?"


다닐의 말이 끝나자마자 데니스의 팔이 자켓 속에 들어갔다 옆으로 뻗어져 나왔다. 그의 손엔 피 한방울 묻지 않은 나이프가 들려 있었다.


"당신이 죽으면 됩니다. 그러면 레냐는 살 수 있어."


"컥.."


다닐은 목을 한손으로 누르고 허리를 굽혔다. 데니스는 그런 그를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 보았다.


"제게 방심하지 말라 가르치지 않으셨습니까. 근데 본인이 방심하는 꼴이라.. 이래서야 어디 제대로 레냐를 지키실 수 있겠습니까?"


데니스의 말에 그는 고개를 들었다. 목을 잡은 손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아니샤가.. 헉, 시킨...거냐.."


"네. 그리고 제 의지도 있고요. 당신이 없어야 레냐를 내가 가질 수 있거든."


데니스는 나이프를 툭툭 털고는 다시 품에 잘 갈마무리했다. 기침을 하며 피를 뿌려대는 다닐을 바라보며 그는 옅게 웃음지었다.


"그동안 이안에게 너무 많은 걸 빼앗겼어. 처음엔 내가 친자가 아니니까, 주워온 자식이니까 그런 줄 알았는데..."


그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말을 하는 와중에 비참하게 느껴지는 자신의 삶이 뼈가 저리도록 화가 났다.


"아드리안도.. 나처럼 당신의 자식이 아니잖아? 그래서 이번엔 내가 좀 가져보려고."

"..."


"걱정 마. 레냐가 날 거부하지 않는 이상 해를 끼치는 일은 없을테니까."


데니스는 말을 마치고 손목 시계를 확인했다. 곧 레냐가 올 시간이었다.


ㅡㅡㅡㅡㅡ


제 집무실에서 서류를 처리하던 레냐는 데니스가 보낸 문자에 의아했다. 일로 바쁠 다닐이 저와 데니스를 갑자기 부른다는게 이상했다.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레냐는 하던 일을 접어두고 옷차림을 정리한 뒤 천천히 다닐의 집무실로 향했다.


문을 노크했을 때,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끼고 레냐는 문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그것을 돌리려던 때, 누군가 축축한 천으로 레냐의 입과 코를 막았다. 기관지로 들어오는 알싸한 느낌과 함께 레냐는 정신을 잃었다.





"..냐, 레냐..!"


누군가 다급하게 레냐의 어깨를 흔들었다. 흐릿한 의식 너머로 눈을 뜬 레냐의 앞에는 다급한 표정을 지은 데니스가 있었다.


"너... 대체.."


"...내가..왜 여기에..."


"너.. 무슨 짓을 한거야..? 어?"


그는 다짜고짜 레냐를 향해 따지듯 말했다. 아직 상황파악이 안됀 레냐는 불안한 마음에 슬쩍 그의 뒤를 보았다.


"...아..버지...?"


레냐의 눈 앞엔 안이 다 드러나도록 목이 칼로 베인 다닐이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레냐의 손과 옷에는 새빨간 피가 흥건히 묻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옆에는 피가 묻은 칼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회로가 잘 돌아가지 않아 복잡한 탓에 레냐는 가만히 그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데니스... 이게..어떻게 된..."


"레냐."


데니스의 낮은 목소리가 레냐의 정신을 들게끔 만들었다.


"설마.. 내가 아버지를... 저렇게 한거야?"


레냐의 온 몸이 떨리고 있었다. 레냐의 팔을 붙잡은 데니스의 손에도 그 떨림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는 팔을 놓아버렸다.


데니스의 눈에는 어째서인지 증오와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레냐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 내가... 아버지를 저렇게 만들었구나."


레냐는 체념했다. 다닐의 집무실 안에 있는 모든것들이 레냐를 지목하고 있었다.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두 손을 맞잡았다. 곧 집무실 안으로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왔고 하나같이 레냐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6
"MEM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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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10-03 10:56 | 조회 : 406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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