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8화



해와 달이 번갈아 하늘을 채우기를 며칠이 지났다. 다닐이 출장을 마치고도 바쁜 업무에 치여 또 며칠을 집을 비웠다.


그렇게 달력이 한장, 두장 넘어갔다.





어느 저녁이었다. 오랜만에 모두 모여 저녁을 함께하자는 다닐의 말에 모두가 모였다.


데니스와 이안, 레냐는 물론 아니샤까지 자리하게 되었다.


불편한 기색 하나 보이지 않고 모두들 오랫동안 함께 지내온 화목한 가정처럼 대화를 나누고 식사를 시작했다.


커다란 식탁 위에 평소보다 더 가득히 음식들이 올려졌다. 모두가 식사를 시작했을 때, 레냐만 아직 손도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레냐, 어디 아픈거니?"


다닐이 걱정스레 물었다. 음식이 나올 때부터 표정이 어두웠던 레냐라 그걸 본 다닐이 염려의 말을 건낸 것이다.


"아뇨. 괜찮아요."


애써 웃으며 레냐는 앞에 있던 물이 든 잔을 집어 한모금 마셨다. 어째서인지 물마저도 비릿하게 느껴졌다.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아니샤는 피식 웃고는 말을 꺼냈다.


"그러고보니 우리 막내의 생일이 지난지 꽤 되었네요. 생일은 잘 보냈니?"


아니샤의 말에 레냐는 침을 꿀꺽 삼켰다. 레냐는 자신의 생일을 싫어했다.


"...네."


"어머. 그렇구나. 난 또 네 어미의 기일과 겹쳐서 혼자 울었을 줄 알고 걱정했는데."


"아니샤."


다닐이 아니샤의 말을 막았다. 이미 레냐의 표정은 말이 아니었다.


"저.. 속이 안좋아서 먼저 들어갈게요. 죄송해요."


"...그러거라."


다닐은 한숨을 푹 쉬며 걱정스런 눈빛으로 레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축 쳐진 것이 어딘가 많이 아파보였다.





레냐는 방으로 가지 않고 곧장 율리안의 의무실을 찾았다. 이미 식사를 마친 것인지 음식물이 조금 묻은 접시가 문 밖에 놓여있었다.


보통은 책상 위에 둔 접시를 메이드가 찾아가지만 오늘은 바쁜 것인지 미리 문 밖에 내놓은듯 했다.


레냐는 조심히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짜증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율리안.."


레냐는 죽을 상을 하고 조심히 문 사이로 들어왔다. 예상치 못한 인물에 율리안은 보던 서류도 던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레냐? 무슨일이니? 안색이 좋지 않구나. 여기 앉거라."


간이 침대에 쳐두었던 커튼을 다급하게 걷으며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레냐는 비틀거리며 침상에 앉았다.


"왜 그러니? 그여자가 또 무슨 말 했느냐?"


"그게 아니라... 그냥... 요즘들어 속이 이상해요. 더부룩하고... 음식만 보면 울렁거리고.."


"뭐..?"


율리안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레냐의 증상이 꼭 임신 했을 때의 초기 증상과 겹쳤다.


반신반의 하면서 율리안은 혈액을 뽑기 위해 주사기를 가져왔다. 레냐의 팔에 줄을 묶고 소독을 한 뒤 붉은 피를 뽑아내었다.


"검사는 해봐야 알겠지만... 혹시 너 최근에 잠자리를 가졌거나..."


"...! .. 아니에요.. 그럴리가 없잖아요. 저 베타인데."


레냐는 화들짝 놀라며 표정을 숨겼다. 제 잘못을 들킨 범인처럼 레냐는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았다.


"...알겠다. 일단 검사 해보고... 일주일 뒤에 다시 오겠니? 지금은 올라가서 좀 쉬거라."


율리안은 레냐의 머리를 스다듬어 주었다. 이제 겨우 열 아홉인 레냐는 데니스나 이안보다 워낙 작아서 심각하게 걱정될 정도였다.


레냐가 의무실을 나가고 율리안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 여자, 아니샤의 말대로 레냐가 오메가라면?


'...안될 일이야.. 그렇게 된다면...'


알파가 둘 씩이나 있는 이 집안에서 레냐를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율리안은 하루라도 빨리 검사를 맏겨야 겠다는 생각에 짐을 챙겼다.





힘겹게 방으로 올라와 침대 위에 몸을 힘없이 던지었다. 레냐는 천장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어지러움을 느끼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몸도 전보다 훨씬 무거워진 기분이었다. 들쑥날쑥한 감정선에 제 몸이 제것이 아닌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누워 잠에 들 즈음 누군가 방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손에 컵을 든 데니스가 들어왔다.


"데니스...?"


"너 아무것도 안 먹었다고 했더니 루시아한테 혼났어. 이거 좀 마셔. 우유 데워 온거야."


머쓱한 모습으로 레냐에게 다가와 따뜻한 우유가 든 컵을 건냈다. 데니스는 먹는 모습까지 확인하려는듯 책상 앞에 놓인 의자를 끌어다 침대 앞에 놓고 앉았다.


레냐는 조심스레 컵에 입을 댔다. 우유 냄새가 코를 확 스쳤지만 이상하게 속이 올라오거나 하지 않았다.


배고픈 나머지 우유가 뜨거운 줄도 모르고 레냐는 꿀꺽꿀꺽 목으로 넘겼다. 속이 따뜻하게 차오르니 울적했던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듯 했다.


"고마워.. 덕분에 좀 나아졌어."


"어디 아픈거야? 안색도 안좋은데."


데니스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레냐의 이마를 짚었다. 미약하지만 열이 조금 있는 것 같았다.


"율리안이 검사해 본다고 피 뽑아갔어. 걱정마."


"그래도.."


데니스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분노에 찬 표정같기도, 억울함이 가득한 표정같기도 했다.


'아드리안 그자식 때문에 네가 임신한거면...'


데니스는 쓸데없는 생각에 고개를 젓고는 레냐를 당겨 품에 끌어안았다. 역시 레냐의 따스한 체온이 닿으니 안정되는 것 같았다.


"...? 데니스?"


"아.. 보통 아프면 아프지 말라고 안아주거나 하잖아. 그런거니까 엉뚱한 생각 하지마."


데니스가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레냐는 해맑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그게."


레냐가 아무렇지 않게 웃음을 보이자 데니스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레냐의 머리를 몇번 헝클여주고 그는 빈 컵을 들고 레냐의 방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이안이 레냐의 문 앞에 서있었다. 레냐가 이 모습을 보지 못해 다행이라 생각하고 데니스는 그를 노려보았다.


"레냐는 좀 어때?"


"... 괜찮아졌어. 걱정 붙들어 매고 이제 방으로 돌아가지 그래? 레냐는 잠들었으니까."


"...."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데니스는 이안을 한껏 노려보곤 컵을 가져다 놓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가려 했다.


이안이 데니스를 팔로 막아서며 고개를 돌려 그를 내려보았다.


"혹시라도... 레냐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있다면.. 접는게 좋을거야. 아무리 네가 나에게 경쟁심을 품어도, 레냐는 줄 수 없어."


"허, 뭐라고? 너넨 이복형제잖아. 나야 주워왔다지만..."


데니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아니샤도 그렇고 다닐도 그들의 모습이 항상 의심스러웠던 터라 어딘가 짐작이 갔다.


"설마...너..."


"아니야. 이복형제. 레냐는 아버지의 아들이 맞지만 난 아니야."


이안의 폭탄선언에 데니스는 그만 손에서 컵을 떨어뜨렸다. 다행이 깨지지 않은 컵은 바닥을 뒹굴었다.


"그럼... 뭐야. 여태 나만..."


"결론적으로 너나 나나 같은 신세라고. 나도 알게된지 얼마 안됐으니."


"허..."


데니스는 컵을 다시 주워 일부러 이안을 밀치고 복도를 걸어 아래로 내려갔다. 그 자리에 덩그러니 서서 이안은 레냐의 방 문을 두드릴까, 망설이다가 마음을 접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레냐를 저렇게 만든 것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니 어딘가 복잡했다. 지금 시국에 레냐가 제 아이를 가졌다는 소리가 나오면 아니샤나 제 자리를 노리는 다른 주주들의 먹기좋은 간식이 될 것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루브가 레냐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니 더욱 안될 말이었다.


"...아이는.. 지웠으면 하는데.."


혼자 중얼거리며 만약, 레냐가 임신했다며 저를 찾아오면 당장 지우라 말 할 것이라고 이안은 다짐했다.


그 편이 이안에게도, 레냐에게도 좋을 것 같았다.





일주일 뒤, 율리안은 제게 온 갈색의 서류 봉투와 함께 내용물이었던 흰 종이들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럼에도 분노는 사그러들지 않았다.


"젠장. 이게 무슨.."


내용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고통스러웠다. 베타라고 표기되어 있어야 할 칸에 오메가라는 표식이 있었다.


게다가 레냐는 임신 초기였다. 당장이라도 불러내 묻고 따지고 싶었지만 율리안은 그럴 수 없었다.


율리안은 레냐에게 문자를 남겼다.


급하게 서류를 챙겨 외투를 챙겨입고 율리안은 의무실을 비웠다.





오늘따라 밀려드는 서류 봉투들 덕분에 레냐는 서류탑 사이에 껴있게 되었다. 이걸 다 처리하려면 이틀은 걸릴 것 같았다.


바쁜 와중에 휴대폰이 진동을 울렸다. 확인해보니 율리안이 보낸 문자였다.


-'의무실에 들려가라. 결과 나왔다.'


절제된 말투가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 율리안은 원래 딱딱한 말투의 소유자였기에 레냐는 별 생각 없이 서류 처리를 이어갔다.


결국 처리를 미루고 9시가 넘은 시간에 레냐는 퇴근하기로 마음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냐는 지하 주차장 한 곳에 자리한 차의 문을 버튼 키로 열었다. 면허를 따고 나서 처음으로 가지는 제 소유의 차였다.


데니스도 두번에 걸쳐 따는 데에 성공했다던데, 레냐는 한번에 면허를 땄다.


초보임에도 능숙하게 차를 몰아 저택에 도착했을 때, 분위기가 조용한 것이 꼭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율리안의 말대로 레냐는 의무실 앞에 서서 문을 두어번 두드렸다.


'...이제 율리안도 알아버렸으니... 어쩌지..'


레냐는 이미 제 몸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정확한 증명이 필요했기에 율리안이 하자는데로 검사까지 받았다.


이제는 정말 부정할 수 없었다. 자신이 베타가 아니라는 것을.


"..율리안..?"


문을 두드렸음에도 반응이 없자, 레냐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간이 침대들이 있는 곳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고 책상도 엉망 그 자체였다.


"어디 나가셨나.."


소파에 앉아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시간은 이미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한참 더 기다리니 율리안이 허겁지겁 의무실로 들어왔다.


"레냐, 왔구나. 오늘 별 일 없었지?"


"네. 어디 다녀오신거예요?"


"아, 아무것도 아니다. 일단 이것부터 보거라."


율리안이 품에 지니고 있던 갈색 서류 봉투를 레냐에게 건냈다. 레냐는 긴장했는지 몸이 굳은 체로 서류를 꺼내 한장 넘겼다.


"....그렇구나.."


한참 서류의 내용을 읽어내리다가 레냐는 옅게 미소지으며 서류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누구냐."


"...."


율리안은 마음을 가다듬고 평소보다 더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레냐는 싱긋 웃어보이려다가 이내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이안... 이요.."


덜덜 떨리는 손을 맞잡고 레냐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물이 새어나오지 않게 연신 눈을 깜빡였다.


"레냐, 힘들겠지만.. 역시 지우는게.."


"그래야죠. 이안은 이제 막 사교계에 나갔는데.. 저 따위가 발목 잡으면 안되잖아요."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레냐는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였다. 율리안은 울컥한 마음에 레냐의 손을 낚아채듯 잡았다.


"레냐.. 차라리 여기서 떠나서..."


"그건 싫어요. 저는.. 이안이 없으면 안돼요."


"레냐!"


율리안이 크게 윽박지르며 레냐의 손을 꾹 쥐었다. 그 소리에 놀란 것인지 움찔 하며 레냐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놈이 협박이라도 했어? 왜 그렇게 그놈을 감싸고 도는거냐! 대체... 네 성격에 협박 당한게 뻔하지. 당장 그놈을..!"


당장이라도 이안에게 찾아가 따질 것 처럼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며 율리안은 레냐의 손을 놓았다.


"아니에요.. 그런거 아니라구요.."


레냐는 다급히 율리안을 붙잡았다. 처연하게 매달려 애원하는 레냐를 보고 율리안은 타오르는 분노를 조금이나마 삭힐 수 있었다.


"하... 대체 왜.."


소파에 다시 털썩 앉아 율리안은 한숨을 푹 쉬었다. 레냐를 바라보니 눈에 글썽거리며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이유나 들어보자. 왜 그렇게 감싸고 도는 거냐?"


"...제가... 이안을 좋아해요.."


레냐의 말에 율리안은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를 감싸기 위해 한 말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레냐의 눈은 진실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율리안과 레냐가 이야기를 마치고 의무실을 나갔다. 데니스는 조용히 커튼을 걷고 간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제가... 이안을 좋아해요..'


레냐가 울음 섞인 말로 했던 그 말이 데니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너무나 비참해서 마구 뛰어대는 심장이 터질것만 같았다.


"아직 각인도 하지 않았고.. 애도 지운다고 했으니까.. 기회는 있어.. 괜찮아.."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복도를 걸었다. 데니스는 제 방에 도착해 문을 잠그고 가지고 있던 단도를 벽에 내리꽂았다.


"...아드리안.."


증오가 가득 섞인 투로 읆조리며 데니스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꾹 쥐었다.

10
"MEM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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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9-26 16:50 | 조회 : 298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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