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날부터 꼬인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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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 수사대]
온라인을 통해 각종 미스터리한 사건들을 해결하는 단체. 누구나 홈페이지에 가입만 하면 추리에 참여할 수 있고, 자기 주변의 미스터리한 사건을 올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원래는 무능한 경찰인력의 부족함을 보충하고자 시작한 활동이었으나, 현재는 경찰과 협력하여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단체를 자처하고 있다. 물론 실제로 그런 단체기도 하지만.
네티즌 수사대는 그냥 이름일 뿐이고, 그 가운데에서 추리 팀을 만들어 활동하는 경우도 많다. 대표적으로는 서울시의 각종 도난사건을 전문적으로 해결하는 [우리가 서울시민이다], 전국 각지의 미스터리한 사건만 도맡는 [크레이지 체스맨], 정부관리나 기업고위직의 비리를 몇백건 해결한 [The Great Korea], 과학수사를 전문으로 하는 [Sola. S] 등이 모두 네티즌 수사대에 소속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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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세련은 학교에 늦게 도착한 편이었다. 시점은 2월 말. 곧 정상수업이 시작되는 때, 기숙사로 트렁크를 질질 끌며 들어오는 소녀는 당연히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세종시 종합 고등학교. 줄여서 세종고다. 고등학교라지만 거의 대학교 수준으로, 17세에 들어오는 300여명의 신입생들을 이과·문과·예체능과로 나누고 가르친다. 설립 이후 대한민국 최고의 시설과 시스템, 교수진 등을 가진 고등학교로 떠오르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모두가 들어오고 싶어하는 꿈의 고등학교.

그러나 이런 고등학교에 들어와 앞으로 3년의 시간을 보내게 될 열 일곱 살 소녀, 세련은 하나도 즐거운 표정이 아니었다. 거대한 시설을 구경하며 감탄하는 게 보통일 텐데, 이 특이한 소녀는 ‘인생무상 무념무상’의 아우라를 가득 내뿜으며 여자 기숙사로 들어왔다.

“그러니까 이게 다 경찰청 때문이야. 좀 빨리 일을 처리해주면 어디 덧나나? 정말 잘못되면 학기 시작하고 들어올 뻔 했네, 쳇.”

세련은 혼자 구시렁거리면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녀의 방은 605호, 기숙사 A관의 꼭대기층이자 마지막 호다. 꼭대기층이라 전망은 좋겠지만 대신 내려올 때 시간이 무진장 걸릴 것을 생각하니 한숨부터 나오는 세련이었다. 특히나 느려터진 엘리베이터의 속력을 체험하니 더욱 그랬다.

“혹시, 너 605호야?”

옆에서 들려오는 수줍은 목소리에 세련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응, 하고 답했다. 세련이 고개를 돌린 것은 다음 순간, 나도야-라는 간단한 대답이 들려왔을 때였다.

단발머리에 귀여운 얼굴을 가진 소녀였다. 약간 동글동글한 느낌을 주는 외모에 서글서글한 인상. 와, 나랑은 달라도 한참 다르네, 라고 세련은 생각했다. 그도 그런 것이 세련의 인상은 한마디로 뾰족한 편이었으니까. 성격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이름모를 룸메이트 소녀와 세련의 공통점은 단 하나, 키가 큰 편이 아니라는 것. 세련의 키는 딱 평균이었고, 소녀는 그보다 작았다.

"정은영. 나랑 같은 학년이네? 넌 문과일 테니 나랑 수업시간에 자주 만나지는 않겠네. 난 유세련이야."

“..?어떻게 안 거야?”

“당황했다면 미안, 가끔 홈즈처럼 보이고 싶어서. 하지만 개인정보 안 들키고 싶으면 가방 지퍼는 닫고 다녀. 안에 들어있는 책이 다 보이거든.”

은영은 고마워, 하고 생긋 웃으며 가방 지퍼를 닫았다. 세련은 신기하다는 듯한 눈길로 룸메이트를 쳐다봤다-신기하다는 듯한 눈길이 아니라 실제로 세련은 신기했다. 이런 반응, 오랜만이네.

그제서야 느려터진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세련은 매너 넘치게 열림 버튼을 눌렀고 은영이 먼저 내렸다. 뒤따라 내린 세련은 605호 방문 앞에 우뚝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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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방을 헷갈리진 않겠다..”

“그렇지? 겉은 이래도 방은 엄청 좋아!”

세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605호 문의 상태는 사실상 ‘심각’했다. 매직, 네임펜, 볼펜, 수정액 등 각종 필기구로 쓰여진 낙서들, 낙서하지 말라고 쓰인 낙서들, 낙서들. 원래 상아빛이였을 문은 낙서와 손때로 뒤덮여 거의 갈색이 되어 있었다.

윽, 이건 또 뭐야. 표정을 잔뜩 찌푸린 세련의 눈길이 향한 곳은 가장 아랫단, 그곳에 쓰인 낙서였다. 쓰인 건지 아니면 묻은 건지, 낙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세련은 그것을 제멋대로 ‘피낙서’라고 이름 붙였다. 설마 진짜 피인가.

“조세핀, 우리 왔어!”

은영은 활짝 웃으며 문을 열었다. 오, 세련은 순간 감탄사를 내뱉었다. 은영의 말이 그대로였으니까. 605호는 겉이 초라한 대신 내부가 잘 되어 있었다. 다른 기숙사를 방문하지 않은 세련은 모르겠지만, 여자 기숙사 중에서는 가장 시설이 좋은 방 중 하나였다. 이층 침대가 아닌 그냥 침대 3개와, 기숙생 각자에게 주어지는 책상, 서랍 등 가구가 꽤 많았다. 책상은 독서실 책상처럼 생겨서 스탠드까지 달려 있었다. 와, 이런 거 살 돈이 있었다면 문부터 바꿔 줄 것이지.

“우리..?아, 룸메이트.”

돌아앉아 있던 소녀가 뒤돌아보지 않고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장난기가 돈 세련은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조세핀이라니? 설마 성이 조 이름이 세핀..은 아니겠지.”

그들을 뒤돌아보지도 않고 있던 갈색 머리의 소녀가 세련의 유치한 말장난에 고개를 휙 돌려 그들을 쏘아보았다. 예쁜 갈색 눈이 짜증으로 찡그려지는 것을 보고 세련은 킬킬대며 웃었다.

“미안, 난 유세련. 넌 성이..?”

“케렌. 조세핀 케렌.”

“독일? 아니면...억양이 미국은 아닌 것 같은데.”

“엄마는 프랑스, 아빠는 독일. 내 국적도 독일이고.”

“그렇구나.”

세련은 비어 있는 침대에 가방을 놓..지 않고 던졌다. 트렁크는 고이고이 책상 아래로 쑤셔박는다. 세련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행동들이었다. 짜증내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세련의, 어찌 보면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면이었다. 짜증과 무념무상의 중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귀차니즘’정도일 것이다.

"그나저나..넌 왜 이렇게 학교에 늦게 온 거야?"

은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러한 주제는 잘못 다루면 싸움이 벌어지는 수도 있었기에 더 그랬다. 게다가 오늘 만난 사이가 아니었던가. 자칫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는 1년동안 기숙사에 들어오기 싫어질 수도 있었다.

세련은 피식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뜻도 들어있었다.

“아, 그게 좀 복잡한 사건에 휘말려서 말이야. 이것저것 조사받느라고 고생 깨나 했거든. 나중에도 참고인 자격으로 불려갈 수도 있어.”

아, 그렇구나, 라고 말하며 다른 화제로 넘어가는 은영을 보며-은영은 지금 열심히 아이돌 스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세련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세련은 약간 양심이 찔리는 것을 느꼈다. 소시오패스가 아닌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미리 말을 맞춰 놓긴 했지만 여전히 거짓말은 힘들었다. 그것이 세련의 약점이자 최대의 장점이었다.

그래,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꼬여버린 걸까. 곰곰이 생각하던 세련은 곧 답을 찾아냈다.

일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작년 11월, 세련이 중 3일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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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초, 다른 아이들이 파카를 입고 다녀도 혼자 두꺼운 후드잠바를 걸치고 다니던 세련은 입시 준비로 한창 바빴다. 당시는 네티즌 수사대가 한참 유행하던 때여서, 세련 역시 친구들을 따라 가입했고 graysky13이라는 아이디로 몇가지 도난사건 풀이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련은 어쨌거나 고등학교 입시준비생이었다. 그녀는 서울에 있는 한 자공고 입시를 목표로 원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날도 다른 날고 똑같은 날이었다.
똑같은 길을 따라 하교하던 세련에게, 가벼운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안녕, 새로운 레드 퀸? 난 화이트 비숍. 앞으로 잘 부탁^^

“뭐야, 이 쓰레*는..?”

학교에서 남자애들과 신나게 장난치다 한 명이 돌변해서 대판 싸울뻔했던, 그래서 기분이 더러웠던 세련의 입에서는 자연스레 욕설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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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8-29 17:06 | 조회 : 2,574 목록
작가의 말
히에

현재 다 날아간 1화를 주기적으로 다시 수정해서 올리고 있습니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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