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 널 죽이지 않는 건 지금까지 쌓은 정이 있으니까야."
그러니 죽고 싶지 않다면 꺼져.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 했다. 평소와 달리 붉은 눈동자에는 증오가 가득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저 눈은 애정과 약간의 쑥쓰러움을 담고 반짝였는데. 어느새 탁해진 눈이 너무나 낯설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차갑게 내려 앉은 분위기. 세실은 아랫 입술을 콰직 깨물었다. 그녀에게 그는 동생을 죽이려한 살인자이자 스푼 전체를 적으로 돌린 배신자일뿐. 더 이상 달콤한
사랑의 말을 주고 받을 애인이 아니다. 그제야 느껴지는 사방에서 날아드는 차가운 시선. 초점을 잃어가는 금안이 익숙한 얼굴들을 찾았다.
사사, 송하, 비비안. 저와 가장 친했던 이들. 사사는 두 주먹을 꾹 쥐고 있었고, 비비안은 그저 차갑게 응시할 뿐이었다. 하지만 송하만은 조금 달랐다.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것 마냥.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습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가 되지 않는 건 그것뿐이 아니겠지. 사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왜 다들 내가 혜나, 그 어린 아이를 공격했다 믿는 건지.
왜 다들 나를 스푼의 배신자로 몰아가는 건지.
왜 다들 나를 그렇게 경멸하는 표정으로 보며 대놓고 증오하는 건지.
왜 다들 지켜만 보고 나서 주지 않는 건지.
아아, 그때도 이랬었지. 더 이상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어 보이지 않겠다 다짐했었는데. 마음에 두른 철옹성은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단단함을 깨트리고 안으로 들어온 것이 바로 다나였다.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여자. 그녀는 마치 독을 품은 꿀처럼 너무나도 느리고 짙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단단히 굳어 버린 상태였다. 꿀 속에 갇힌 벌레 마냥 움직일 수 없는 온몸. 그래도 그녀라면 좋았다.
'언제까지고, 라는 말은 할 수 없어. 하지만 그 때가 될 때까지 널 있는 힘을 다해 사랑하겠다.'
얼굴은 있는대로 붉게 물들인 채 그런 말을 하는 게 어찌나 귀여웠던지. 그래, 네가 말한 그 때는 지금인가보다. 그리 생각하자 미련이 툭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수를 좋아했었잖아. 오히려 잘 되었다 생각하겠지.
역시 나 같은 건 너에게 어울리지 않았나 봐.
마음 속으로 조용히 읖조리며 세실이 걸음을 뗐다.
"그동안 고마웠어."
그녀에게서 한 발짝.
"다시는 보는 일이 없기를-"
두 발짝.
"안녕."
세 발짝.
점점 빨라지는 발걸음. 미련이 투명한 액체의 형상으로 눈에서 주륵 주륵 흘러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