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구원의 또 다른 이름(8)

초려혜는 불안에 휩싸인 눈으로 방금 아한에게 상냥하고 부드럽게 웃었지만 지금은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 눈을 하고 있는 유현을 올려다보았다.

“…아.”

그리고 작게 탄성을 뱉었다.

암흑을 그대로 담은 검은 머리카락과 동공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검은 눈동자가 흰 피부와 대비되어 더 검고 어둠고 신비로워보였다.

“너 해동성국의 귀족이였다면서?”

잠시 몽롱한 기분에 빠져 있던 초려혜의 정신을 한 번에 잡아 끄는 말이었다.

“너희 부모님, 완전 나쁜 짓해서 가문이 파문됬는데 죄없는 너는 왕의 자비로 왕국에서 들어와 일을 하게 해줬지. 그렇치?”

“그, 그걸 어떻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해동성국의 일부분 뿐이었다. 초려혜는 순간 정수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방금전 마치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대변하는 모습에 혹시나 했었는데 지금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자신을 구해준 이에게 사랑에 빠지는 건, 그래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은혜를 알아야지. 너를 구해 준 건 왕만이 아니잖아. 왕비의 곁에서 그녀의 시중을 들게 해준것도, 다른 귀족들을 눈총의 막이가 되어 준것도 전부 왕비을 세심한 배려였어.”

“…아.”

“너는 그런 그들의 세심한 배려를 배신하고 오직 너의 사랑만을 위해서, 너의 그 일그러진 욕망만을 위해서. 행복했던 모든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거야.”

“…아, 아.”

처음 아는 사실이었다. 초로혜는 왕, 아청하를 사랑했다. 진심으로. 그리고 그런 왕, 아청하가 사랑하는 여인, 유하연을 시기하고 질투했으며 증오했다.

하지만 상냥하고 세심한 배려깊은 유하연에게 흔들린 적이 없다고 하면 거짓이었다. 분명 초려혜는 유하연을 존경하며 왕과 비슷할 정도로 경애했었다.

“…아,아아.”

…그런데 왜? 어째서?

…내가 그런 짓을 했었지?

내가, 경애하며 소중하게 생각하던 이들, 그들의 사이에서 태어난 작고 사랑스럽던 아이.

지금 그 아이는 자신을 누구보다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흔, 들리는게 아니었는데.”

초려혜는 그 작은 아이를 왕비로부터 건네받아 품에 안아본 적이 있었다. 작고 연약하지만 바다의 푸르름을 머금은, 청룡의 사랑을 받는 이의 아이.

그 행복한 가정을, 따스한 분위기를 초려혜는 싫어하지 않았다. 비루한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어진 왕과 그런 자신을 세심하게 챙겨준 상냥한 왕비님.

“그자를, 만나는게…아니었는데.”

그녀는 광기에 사로잡혀 사랑했었던 것을 잊고 소중한 것들을 스스로의 손으로 부숴버렸다.

아마 구원받을 수 없겠지.

…그리고 용서 또한.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고 고통에 심음했다.

청룡의 분노로 인해 걸린 저주와, 광기에 몸은 서서히 썩어가고 있었다.

“끄으으윽, 끄윽.”

쇠를 긁는 듯한 소리가 목에서 올라오며 초려혜는 검고 탁한 무언가를 뱉어냈다. 그것은 피였다.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을 직감했다. 광기에서 벗어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죽음 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녀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어 아한을 올려다보았다. 그녀, 초려혜가 감히 소중히 여기여 사랑했었던 왕과 왕비의 아이.

제 품에 들어오고도 남은 아이는 이제는 다커서 분노를 벗어버리고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고자 하고 있었다.

초려혜는 어린 왕의 씨앗을 보고 자신의 마직막을 어떻게 장식할지 정하였다.

왕의 신하 가문이었던 초씨 가문. 그 마지막 생존자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마지막 인사.

그녀는 아한을 향해 머리를 숙여 공손이 절을 하였
다.

“왕자저하, 부디 만수무강하시고 뜻하는 바를 이루시기를…간절히 바라고 있겠습니다.”

진심을 담아 떨리는 목소리에 아한의 얼굴이 굳었다.

하지만 생각할 틈도 없이 초려혜의 몸이 바닥으로 털어졌다. 경련하는 그녀의 몸에서 검보라색의 불길한 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불안함을 직감한 아한이 서둘러 유현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유현!”

그때 허공에서 이상하리 만치 하얀 손이 나타나 아한의 팔을 붙잡았다. 그 팔을 주인을 올려다본 아한의 여러가지 감정들이 스쳐지나갔다.

“…아.”

인간의 형태를 한 그것은 오통 하얗지만 얼굴은 알아 볼 수 있었다. 잊을 수가 없었던, 기억속에 각인 시켜두운 얼굴이었으니까.

하얀 그것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작게 속삭이듯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입모양은 분명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괜찮단다. 나에게 맡기렴.

그렇게 말하고 홀연히 하얀 그것은 유현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곁에 섰다.

그런 하얀 그것, 유하연은 아한을 바라보던 상냥한 눈동자로 유현을 바라보았다.

“…이미 예전부터 용서했구나.”

-네, 저와 그이는 그 모든 비극을 저 아이의 탓으로 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 아이는 그저 이용당한 것이었으니까요….

“데리고 갈거야?”

-저희가 데려온 아이니 책임을 다해야죠.

그것은 부모의 책임과 비슷한 것이었다. 유하연은 정말이지 제대로 된 어른이었다. 만약 이런 사람이 내 주위에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내 삶이 달라졌을까.

유현의 눈에 쓸쓸함이 스쳤다.

그런 유현을 바라보며 유하연은 유현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유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유하연을 올려다보자 그녀는 언제나 똑같은 따스함을 담은 태양같은 미소로 유현을 내려다보았다.

-그대에는 감사하게 생각해요. 지금 제가 이렇게 실체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이들이 힘을 나눠 준 것도 있었지만.

그녀를 제외한 모든 백성들과 왕은 더이상 유현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약해져있었다. 오로지 그녀만이 선명하게 모두의 눈에 비칠 정도였다.

-사실 그대의 잠재된 힘을 잠시 빌린 것도 있었습니
다.

“잠재된 힘?”

-아직은 아주 조금밖에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언젠가 격이 완성에 가까워 졌을 때, 그때 그대의 온전한 힘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더 대답해 주고 싶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저와 저 아이에게 남겨진 시간이.

초려혜는 온 사지를 비틀며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잘못하면 당신이 사라질 것 같은 예감이 들어.”

-후후, 괜찮습니다. 저는 이미 죽은 몸. 저는 남겨진 것에 불과해요.

그래도. 유현은 뒷말을 삼키며 광기에 휩싸여 죽어가는 초려혜를 바라보았다. 청룡의 저주와 광기가 서로 공격하며 육체를 괴롭게 만들는 것이 눈에 보였다.

더 이상 멸의 힘을 쓸 수 없다. 자신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광기를 막을 방법이….

그 순간 유현의 머리속에 다른 생각이 번뜩하고 빛을 내며 떠올랐다.

속성은 더 강한 속성이 약한 속성을 잡아 먹는다.

[무가치한 허식과 어둠의 권위자가 당신을 불안한 눈으로 응시합니다.]

내 생각을 눈치챘는지 무허권님이 나를 바라본다.

“…미안해요.”

-네?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유하연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바라보았지만 유현은 그저 씀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잠깐!

유현이 초려혜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그녀가 유현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움직이지 마세요.”

-!

유하연은 그 말에 몸이 굳었다. 이곳에서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진 것은 다름 아닌 유현이었다. 그런 유현의 명령은 영혼을 속박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기다려주세요.”

유현은 짧게 유하연을 일별하고 초려혜의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녀의 손을 잡았다.

될 수 있을 지는 모른다.

…하지만 해야만 한다.

“유현?”

“지금 뭐하는 거야!”

아한과 리언이 유현을 애타게 불렀지만 무형의 힘에 막혀 다가갈 수가 없었다.

유현을 눈을 감고 속으로 말했다.

‘어시스트 시스템, 서포트 모드로 전환.’

[당신의 속성 ‘절망’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당신의 속성 ‘고독’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두개의 시선. 그것은 또 다른 ‘나’ 였다.

[당신의 속성 ‘절망’이 광기에 반응합니다!]

[당신의 속성 ‘고독’이 광기에 반응합니다!]

이제는 진짜 힘겨루기였다.

몸 상태는 최악하고 힘은 하나도 없다. 멸의 힘을 부를 마력은 오래전에 고갈했고 내상 때문에 속이 파로 꽉 찬 듯한 불쾌감이 계속 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유현은 그 손을 놓지 않았다.

다행이 광기만 반응하여 유현을 공격하고자 할 뿐 청룡의 저주는 잠잠했다.

[거대한 흐름‘용맥’이 당신의 육체를 ‘청룡의 저주’로부터 보호합니다!]

아, 이건 못 막겠다.

[지상의 절대 다수의 ‘권위자’가 당신을 지켜봅니다!]

[무가치한 허식과 어둠의 권위자가 당신을 보호합니다!]

갑자기 쏟아지는 시선과 위압감, 그리고 나를 지켜주는 상냥한 어둠. 그 모든 것을 느끼며 유현은 집중했다.

“…윽.”

“유현!”

신음소리를 흘리며 유현이 이미에서 식음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그것을 본 아한이 다시 청룡의 가호를 사용할려고 했지만.

[스킬 ‘청룡의 가호’의 재사용 시간 까지 앞으로 6일 23시간 12분이 남았습니다.]

방금까지 힘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단만 은은 푸른빛이 아한의 옷이나 몸을 청결하게 만들고 그 주위를 맵돌 뿐이었다.

‘…젠장!’

지금 자신은 너무나도 무력했다. 수 많은 시선속에서 서있는 유현은 너무나도 먼 곳에서 더 먼 곳을 보고 있었고 자신 따위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어딘가 초월해 있었다.

“…대장!”

“…아한님.”

리언이 아한을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응시했고 레비트는 불안한 눈으로 아한을 바라봤다.

그들 또한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함과 남겨졌는 불안함.

그런 그들의 시선이 유현을 향했다.

“…하아, 윽.”

심음을 흘리는 유현의 얼굴이 창백했고 손목에서는 검보란 불온한 기운이 유현을 침범하며 올라오고 있었다.

[패시브 스킬 ‘무통증’이 강제 활성화 중입니다!]

육체의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이건 마음의 통증이었다.

[경고! 최후의 신의 가호가 불발합니다!]

불발했다는 경고를 보내 유현은 비웃음을 날렸다. 유현, 스스로가 저 가호를 받아드리려고 하지 않고 거부하자 자연스럽게 가호를 튕겨낼 수 있었다.

지금 유현은 초려혜의 기억을 보는 중이었다. 광기는 전염된다. 초려혜의 광기를, 기억을 유현은 전부 하나도 빠짐없이 삼켜내고 있었다.

[당신의 속성 ‘고독’이 광기에 잡아먹힙니다!]

[당신의 속성 ‘절망’이 불안정하게 흔들립니다.]

[절대 다수의 ‘권위자’들이 당신의 행동을 지켜봅니다!]

‘힘들어 죽겠는데 왜 보고 지랄이야. 자릿세를 낸 것도 아니면서.’

유현은 속으로 욕을 하면서 고통을 인내했다.

‘이 여자는 왜 또 인생이 비참해.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 처음 왕이 손을 내밀어 줬을 때야?’

상상 이상으로 그녀의 정신 상태는 심각했다. 이러니 세뇌당하고 광기에 쉅게 전염되고 간단히 무서져 버린다. 그 쉬운 자기합리화를 하지도 않는다.

유현은 초려혜가, 그 역겨워 보였던 여자의 실체에 동정하고 있었다.

-그만하세요.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잡은 손에서 흘러나오는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는 정말 맑았다. 유현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그녀의 진짜 목소리였다.

‘그만하기는 이제 시작인데.’

-그만, 하지 않으면 당신에게 제 광기가 가버려요! 정신이 망가진다고요!

알고 있었다. 알고 있음에도 하는 것이다.

[선계통의 ‘권위자’가 당신의 행동을 지켜봅니다.]

[악계통의 ‘권위자’가 당신의 행동을 지켜봅니다.]

[중립 계통의 ‘권위자’가 당신의 행동을 지켜봅니
다.]

지상에 남아 있는 권위자들은 대부분 강한 힘을 가진채 잔류하는 고대의 신들이었다. 고대의 인역(人域)을 초월하여 근원의 선택을 받아 권위자가 되었지만 바벨론의 너머로 가지 않고 지상에 남아있는 자들.

어떻게 보면 지상을 떠나지 않고 힘없는 이들을 지켜봐주는 유일하게 남은 존재들이었다.

키에에엑-!

쇠를 날카로운 무언가로 긁는 굉음 때문에 귀가 괴로웠다. 무통증은 소음에는 소용이 없는 모양이었다.

“허억…허억….”

거친 숨을 들이키고 내쉬며 어느새 손목을 넘어 몸을 침범하는 광기와 격렬한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었다.

통증은 없다. 하지만 엄청난 피로 어지러움에 토나올 것 같았다.

“…쿨럭.”

아씨, 생각하자마자 나왔다. 턱밑으로 떨어지는 피를 무시하며 몸속에 광기에 집중했다.

피에 취해라!

미쳐 날뛰어라!

모든 것을 파괴해라!

광기가 속삭였다. 그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하며 내 정신을 쥐고 흔들었다.

그것을 본능을, 거부했다.

“아니.”

나는 스스로 불타오르는 자. 그 무엇도 상처 입히지 않고 스스로를 태우며 앞으로 나아가는 자. 유현은 스스로를 그렇게 칭하였다.

제 몸을 태우며 불타오르는 사멸의 별.

유현은 왜 멸이 자신을 아스테르라고, 가장 어두운 곳에서 빛나는 자 라고 칭하였는지 그제서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아스테르(αστηρ).

그 이름의 뜻은 별이었다.

[거대한 흐름의 ‘근원’이 당신을 가호합니다!]

[무가치한 허식과 어둠의 권위자가 당신을 가호합니다!]

[지혜의 인도자들의 권위자가 당신을 가호합니다!]

[검은 길의 사신(死神)과 안식(安息)의 권위자가 당신을 가호합니다!]

[당신은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하였습니다!]

[당신의 칭호 ‘멸(滅)의 개화자(開化者)’가 발생됩
니다!]

시끄럽게 울리는 메세지는 읽히지 않았다. 시야가 흐릿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를 감싸주는 힘들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어떠한 것은 맑고 투명한 어둠이었으며, 어떠한 것은 끝없이 솟아 오르는 지혜였으며, 어떤한 것은 공포와 동시에 편안한 안식을 주는 죽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한데 모아 하나의 흐름으로 조화시키는 거대한 흐름의 ‘근원’ 이있었다.

그 익숙한 기운을 유현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피식.

김빠지는 웃음소리가 세어 나왔다.

그 ‘근원’은 유현은 살리기 위해서 죽음에서 엇나가게하고 시간의 선을 엉크러트리고 비틀고 축에서 벗어나게 한 ‘흐름의 근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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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10-03 13:44 | 조회 : 860 목록
작가의 말
블래티

곧, 40화가 넘겠네요! 1부 완결은 예상 60화 정도? 2부는 그것보다 더 길고 3부는 그것보다 훨씬 더 길 것 같은데 같이 와 주실거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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