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딘 버드는 어릴적부터 정의가 무엇인지 항상 고뇌하며 추구해왔다. 어떨 때는 상사의 명령에 복종하였으며 또 어떨 때는 자신의 정의에 따라 명령에 불복(不服)하였다.
그런데 그 결과가 좌천이었다.
자신은 분명 옮은 일을 했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귀족의 호휘 도중 마차에 치일 뻔한 아이를 구했고 호휘를 뒷전으로 했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주위에는 실력자가 상당히 있었고 호휘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살찐 귀족은 얼굴까지 붉히며 제이딘 버드에게 호통을 쳤다. 그깟 거지의 목숨이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하냐고, 일을 경중을 파악할 줄 모르냐며.
제이딘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을 경중, 목숨의 경중은 어면히 다른 것이며 더 중요한 것은 목숨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거지 아이도, 귀족 늙은이도 그리고 평민인 자도 모두 같은 것이며 차이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말했다. 생명은 모두 공평하며 그것에 경중 같은 것은 없다고.
그랬더니 귀족은 더더욱 화를 내었다. 당연히 귀족인 자신의 목숨이 저런 거지보다 더 고귀한 것인데 어떻게 그것을 모를 수 있냐고.
그 귀족은 결국 무뚝뚝하고 강직한 제이딘의 대신 제 돈을 받아 먹은 제이딘의 상사에게 연락을 취했고 제이딘은 이곳, 빈민촌으로 올 수 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제이딘은 여전히 고뇌하며 추구했다. 정의라는 것을.
하지만 아무리 고뇌하고 추구해도 궁국적이고 절대적인 ‘정의(正義)’에는 닿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아득했고 한낱 인간인 자신에게는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한참이나 보이지 않던 제이딘이 모시는 신이 돌아온 것은.
[정의를 추구하는 권위자가 자신의 신도를 바라봅니다.]
처음 저 신을 만났을 때에는 동질감을 느꼈다. 한낱 인간과 위대한 신이었지만 정의를 추구하고 고뇌하는 것은 같았다.
어쩌면 그래서 ‘정의를 추구하는 권위자’는 제이딘과 같은 것을 느꼈기에 그렇기에 제이딘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정의를 추구하는 권위자가 당신을 응시합니다.]
평소와는 사뭇 다른 진지하면서도 깊게 가라 앉은 시선이 제이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에는 제이딘을 놀리며 귀여워하는 장난스러움이 깃든 눈이었다면 지금은 위압감 조차 느껴지는 무거운 시선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정의를 추구하는 권위자가 당신에게 묻습니다.]
[정의를 추구하는 권위자가 대가를 지불하고 당신에게 메세지를 보냅니다!]
[당신에게 메세지가 도착했습니다!]
제이딘 버드의 눈이 커졌다. 간접 메세지는 몇번이나 보냈었지만 직접적인 메세지를 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제이딘은 왠지 모를 긴장감을 삼키며 메세지를 열었다.
[정의(正義)란, 다수가 결정지은 정의(定義)에 불가
해. 결국 큰 대의, 큰 의지가 정의가 되고 작은 정의
는 큰 정의에게 먹히거나 악이 되지.]
제이딘의 누동자에 혼란스러움이 일렁였다.
“…이게 무슨.”
[당신에게 메세지가 도착했습니다!]
[제이딘 버드, 너는 악인가 정의인가?]
손끝이 떨려왔다. 제이딘은 혼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자신은 선이었다. 항상 선이고 싶었고, 자신이 옮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왔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 자신의 기준이었다.
…기준이 타인이나 다른 것을 바뀐다면?
그 귀족의 입장에서는 맡은 바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제이딘은 악이었다.
[정의를 추구하는 권위자가 당신에게 묻습니다.]
[네가 모르고 있는 정의가 있다. 그곳으로 가보거라. 하지만 가지 않는 것 또한 너의 선택이니 존중하마.]
[정의를 추구하는 권위자가 당신의 선택을 지켜봅니다.]
…자신이 모르는 정의.
혹시 ‘정의를 추구하는 권위자’나 자신처럼 정의에 고뇌하고 추구하는 사람이 또 있는 것일까?
제이딘의 마음속에는 묘한 들뜸과 두려움이 자리잡
았다.
또 다른 정의를 보고 제이딘은 흔들릴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바꾸는 일, 무척 힘겹고 괴로울 것이다. 제이딘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넘어서는 들뜸과 기대감이 있었다.
자신이 몰랐던 정의에 의해저 자신이 바뀔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제이딘은 천천히 위를 보며 물었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
유현이 가장 먼저 든 생각은 ‘X같다.’였다.
정말이지 욕이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고아원 원장에게 맞고 있는 어린 나. 그리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몸을 던지는 어린 현이 형이 머리를 크게 맞고 죽게 되는 아주 끔찍한 광경.
나를 몇번이나 괴롭게 만든 악몽 속에 장면은 마치 지금은 ‘내’가 과거의 ‘내’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 뿐이었다. 내 정신은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하고 적막했다. 이상할 정도로 감각이 무뎌졌다.
[최후의 신의 축복이 당신의 감성을 일부 차단합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시스템 메세지 창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유현은 무감각해진 눈으로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최후의 신의 가호가 당신의 사고를 빠르게 회전시
킵니다.]
천천히 그리고 냉정히 유현은 이곳이 환상속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뭐가 이렇게 생생한지 기억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까지 전부 재현되어 있었다.
일단 유현은 손바닥으로 뺨을 세게 내리쳐 보았다.
짜악-!
살이 부딪치는 날카운 소리와 화끈거리는 느낌과 고통이 느껴졌지만 환상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계속 그 끔찍한 광경은 유지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수 밖에 없나.
실패한다면 무허권님에게 혼날지도 모른다. 정말 어쩌면 타이밍 안 좋게 돌아온 정추권님께 꾸짖음을 들을지도 모른다.
그게 조금 걱정되면 서도 조금 서글펐다. 그 따뜻함을 내 손으로 놓고 떠나야 된다는 사실이.
유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눈을 감았다.
보이지는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정신속에 있음에도 확실하게 느껴지는 ‘어시스트 시스템’의 흐름이 선명하면서도 투명했다.
“어시스트 시스템, 서포터 모드로 전환.”
바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서포트는…
‘멸의 힘을 제어하는 것.’
그 순간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을, 근원을 유현은 스스로의 의지로 제어하려고 하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정신속에서만 가능했던 일이었지만 이것
은 하나의 가능성이었다. 지금은 할 수 없지만 언젠가 할 수 있다는 기약없는 가능성이었지만 지금 유현에게는 그 작은 가능성 만으로 충분하고도 남았다.
파지지직-! 파지직-!
크고 작은 검은 스파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유현은 알 수 있었다. 현실에서 지금 자신의 몸이 모든 것을 멸(滅)하는 힘이 자신의 몸을 뒤덮고 이 망할 환술을 멸하고 있으라는 것을.
이윽고 현실의 유현의 육체가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건 말도 안 돼!”
환술사는 자신의 환각이 이렇게 빠르게 풀렸다는 사실에 충격을 금치 못하였다.
눈을 뜬 유현은 천천히 일어서서 환술사를 응시했다.
길게 늘어뜨린 밤갈색의 머리카락 화려한 비녀가 꽂혀있었고 동양적인 원색계열의 화려한 붉은 옷을 입고 있는 탁한 푸른 색의 눈을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미인이었다.
…진짜 동대륙의 술사였냐?
유현은 여전히 검은 스파크를 두른 채로 주위를 살폈다.
화려한 붉은 방에는 역한 향수 냄새와 이상하게 비릿한 기분 나쁜 냄새가 진동을 했다. 냄새의 원을 찾아 두리번 거리다 침대에 알몸으로 동공이 풀린채 입에서 침을 흘리고 있는 남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푸른빛을 띄는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였다. 누군가를 떠올리는.
순간 유현의 눈이 싸늘해졌다.
“…아한.”
다른 동료들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지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터였다.
“어머나, 절대멸자님. 아한을 알고 있나봐? 하긴 그리니 그와 같이 왔겠지.”
유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환술사를 응시했다. 지금은 갈색으로 변한 눈임에도 검고 어두워보는 눈이었다.
[최후의 신의 축복의 효과가 상대방을 꿰뚫습니다.]
‘요약하지 말고.’
[어시스트 시스템이 사용자의 편의에 맞춰 프로필
을 변경합니다.]
[이름] : 초려혜 [나이] : 41살 [인종] : 인간
[소속]: 아그라타 제국 황실 [속성] : 환각(幻覺)
[성향] : 악
[능력치]:체력[30],근력[20],민첩[40],지력[130],정신력[120],마력[110].
[직업] : 환술사(幻術師)
[칭호]: 매혹의 환술사(전절), 망국의 배반자(희귀)
[스킬]: 환술(SS), 정신 방벽 파훼(S)
[패시브 스킬]: 정신 방벽(SS)
*현재 대상이 당신에게 적의를 드러냅니다.]
정신력과 마력이 높은 편이었지만 스킬의 수는 적었고 스텟도 조금 높지만 나와 비슷비슷 했다.
“아한과는 아는 사이인가 보지?”
“아는 사이?”
내 질문에 환술사, 초려혜가 미간을 좁혔다.
“그냥 아는 사이가 아니지. 그 멍청한 놈들이 실패 하지만 않았으면 아한은 내 것이 되었을 테니까!”
초려혜는 다시 생각해도 분하다는 듯이 얼굴까지 붉힌채로 씩씩거렸다. 그 태도에 유현은 정보 조달은 그냥 때려치우고 그냥 눈 앞의 여자를 죽일까 말까 고민했다.
“후후, 나는 너희 같은 천한 것들이 감히 올려다 볼 수도 없는 위치의 사람이었어. 나는 해동성국의 왕의 여자였으니까!”
마치 가장 황홀 했을 때를 다시 떠올리듯이 분노로 일그러졌던 얼굴이 아름답게 피어났다. 그 표정이 유현은 진심으로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왕의 여자, 왕비. 만약 초려혜가 왕비였다면 아한의 어머니라는 소리가 되는데 일단 아한은 해동성국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왕족이라서 말이 되지 않았고 또 만약 아한을 아들처럼 여겼다고 하더라도 저 보기만 해도 역겨운 붉은 침대에 널부러진 아한과 비슷한 푸른 빛깔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남자들과 그런 짓을 했다는 사실 차체가 역겨웠다.
“하지만 넌 배신했잖아.”
유현은 칭호가 어떻게 생기는 지 알고 있었다. 다수 의 누군가나 자신의 길이 크게 바뀌거나 뒤틀렸을 때 그때 칭호는 생겨났다.
망국의 배반자에서 망국은 분명 해동성국을 의미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저 여자, 초려혜는 그 멸망에 중요한 역할을 했었기에 배반자라는 수식이 붙어진 것이겠지.
유현은 차갑게 식은 초려혜의 얼굴을 보며 자신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도 환술인가? 40대의 얼굴이 아닌데?”
초려혜의 얼굴에 떠오른 말을 유현은 어렵지 않게 스킬을 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의문과 초조함이었다.
[스킬 ‘감정 파악’이 발동 중입니다.]
유현을 감싸는 멸의 힘에 의해서 환술을 걸어도 눈 감빡할 사이에 풀려버린다. 더 정확하게는 접근하는 순간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것이 계속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정신계에서는 부담되지 않았던 힘은 현실에서는 계속해서 몸에 부담을 주고 있었다.
[경고! 당신의 과도한 힘의 사용으로 육체에 내상을 입고 있습니다!]
[경고! 육체의 손상률이 18.9%를 넘었습니다!]
[무가치한 허식과 어둠의 권위자가 초조하게 당신을 바라봅니다.]
힘은 세어나가지 않는다. 내 몸으로 다 받아드리고 있으니까.
내상이 심해지고 있었다. 몸속을 찢어 발기는 거친 힘의 소용돌이가 여린 내장을 상처입히고 휘저었다. 금방이라도 피를 토할 것 같은 상태였고 손끝이 떨려왔지만 심호흡을 하며 참았다.
[무가치한 허식과 어둠의 권위자 당신을 답답한 눈으로 바라봅니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더 이상 당신에게 의지하고 싶지 않아요. 이건 내가 감당하고 감내해야 하는 내 고통, 내 아픔.
…하지만 그것조차 나는 느껴지지 않았다.
[최후의 신의 가호가 당신의 감성을 일부 차단합
니다!]
[최후의 신의 가호가 당신의 일부 스킬을 강제 활성화 시킵니다!]
[패시브 스킬 ‘무통증’이 강제 활성화 중입니다.]
감정이 옅어지고 고통은 사라진다. 어느 때 보다 냉철할 수 있었으며 빠른 판단이 가능한 최적의 상태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나는 비어 있었다.
[무가치한 허식과 어둠의 권위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아, 아직도 있었구나.
[최후의 신의 가호가 불안정하게 흔들립니다!]
감성을 차단 했음에도 아주 작은 감정이 흘러나와 유현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아, 안돼!”
그 순간 검은 스파크가 붉은 방 전체를 구석까지 마치 춤을 추듯이, 강물이 흘러가듯이, 파도가 치듯이 넘쳐났다. 그 검은 스파크는 초려혜 또한 지나갔지만 그녀의 몸은 검은 재가 되지도 사라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게 훨씬 낫네. 역겨운건 똑같지만.”
쿨럭-!
유현은 피를 한움큼을 토해냈다. 하지만 그 눈빛 만
큼은 생생했다.
-아, 악인아!
유현의 멸의 힘으로 환술에서 깨어난 작은 하얀 새가 유현의 품에서 나와 피를 보더니 작고 검은 눈에 이슬같은 눈물을 그렁그렁 달았다.
“…들어, 와 있어.”
유현은 그런 하얀 새를 피묻지 않은 손으로 다시 품속에 넣었다. 품속에 작은 떨림이 느껴졌지만 유현의 시선은 초려혜를 향해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대각선으로 길게 뻗은 흉한 흉터와 주름이 가득했다. 40대치고는 60대로 보일 정도로 보이는 손과 얼굴은 주름이 가득했고 허리도 굽어있었다.
“…너, 너! 죽여버리겠어!”
쉰 노인의 목소리가 마치 괴물을 비명처럼, 철을 긁
는 소리처럼. 기분이 더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