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놀이공원이라면 당연히 (3)




“…”

새삼 인사한다고 반길만한 사이가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텐데.

가을은 핸드폰에서 눈에 떼지 않은 채 뒤는 신경쓰지도 않았다.

“뭐야, 왜 씹냐?”

살짝 빈정이 상했던 건지 가을의 등을 툭툭 치는 박진수였다.

가을은 무시하려 애썼지만 아무래도 혼자아닌 다른 반 친구들과 함께 있어서 그런지 박진수는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

‘참나, 최은호 앞에서는 대놓고 쫄던 게.’

사람 거슬리게 자꾸 툭툭 건드는 것이 계속되자, 가을도 더 참을 수 없어 뒤를 홱 돌았다.

“왜 자꾸 치고 X랄이야?”

박진수는 성질 돋구는 게 성공이라는 듯 살짝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우더니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이야, 역시 이가을. 혼자 있어도 X나 당당해.”

“뭐야, 얘 선도부 애네?”

“X나 범생이 걔 아님?”

박진수의 옆에 서 있던 남자애들 몇몇이 한마디씩 던졌다.

가을은 기분 나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채 하나하나 노려보았다.

보아하니 이런식으로 시비나 걸려고 온 것 같지는 않은데.

‘…내가 왜 오늘같은 날에 이런 놈들 상대나 하고 있어야 하는거지?’

더 이상 할 얘기같은 건 없었기에 가을은 아예 대꾸조차 하지 않은 채 다시 뒤를 돌았다.

“어, 뭐야. 나 아직 얘기 안 끝났는데?”

박진수가 가을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가을은 지금 어딜 잡냐는 듯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고, 박진수는 곧장 양 손을 들어올렸다.

“걍 할 말 있어서 잡은 걸 갖고 X 정색하냐.”

“니가 나한테 할 말이 뭐가 있는데?”

신경질조로 맞받아치는 가을의 태도에, 박진수 옆의 남자애들이 저마다 오~ 하는 소리를 냈다.

‘…내가 동물원 원숭이냐 X발’

가을은 금방이라도 박진수고 친구들이고의 얼굴 정면에 주먹을 꽂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억눌렀다.

“아, 뭐. 너도 알다시피 내일이면 정지훈 한도혁 정학 풀리거든?”

“…”

가을도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기에 놀랍진 않았다.

다만 아예 잊고있었던 걸 다시 상기시킨 기분이라 당연히 짜증이 나지 않을 순 없었지만.

“한도혁이 우리한테 말은 안 하는데, 니한테 X나 빡쳐있더라고.”

“하, 말 안했나 봐? 하여간 가오잡기는.”

박진수의 말에 가을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기야 여자애한테, 심지어 공부만 하는 범생이라고 부르는 그런 애한테 깨졌다고 어떻게 제 입으로 말을 하겠냐만은.

아무튼 꼴에 어깨에 힘 좀 단단히 주고있던 놈이라고 그런 사실을 떠벌리지 않았다는 게 우습기 짝이 없었다.

박진수는 가을이 웃음을 터뜨리자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걔들도 여기 왔거든, 오늘. 너 좀 보겠다고.”

“…응?”

가을은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기울였다.

“여기 왔다고? XX랜드에?”

“못올 건 뭐 있냐?”

일순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는 가을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박진수는 얼굴에 다시 미소를 띄웠다.

가을은 당황했다기보단 황당했다.

‘아니 무슨 그렇다고 굳이 표까지 끊어가면서 여길 와?’

하여간 나한테 남은 앙금이 그 정도로 깊었나.

가을은 한순간 최대한 제 일에만 신경쓰며 조용히 순탄히 보내려했던 학기초의 고등학교 계획을 회상하며 침묵을 지켰다.

시 우려했던 대로 덕분에 스펙타클한 일진물을 찍게 되버린건가.

속으로 소리없는 아우성을 치던 가을은 애써 덤덤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뭐 어쩌란거야?”

“우리랑 좀 같이 가자?”

박진수가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특정 장소를 꼽은 거라기보단 그냥 이 줄에서 빠지자는 소리 같았다.

하지만 가을은 전혀 움직일 마음이 없다는 듯 오히려 줄을 따라 앞으로 한 걸음 더 내딪었다.

“싫은데? 내가 왜.”

그러자 박진수의 얼굴이 곧바로 일그러졌다.

“아니, 니들은 설마 내가 니들이 오란다고 갈 거라고 생각한거야?”

가을의 말에, 박진수 옆의 친구들이 수군거리며 박진수를 쳐다보았다.

뭐라도 행동을 취해주길 기다리는 얼굴들이었다.

‘…아무래도 얘들은 박진수의 거품만 봐왔나 본데.’

하기야 남자애들끼리 서로 누가 더 쎄니 뭐니 하며 다른 애들 앞에서 쎈 척 하는 짓들만 골라해왔을 테니까.

게다가 박진수 정도 됐으면, 가을의 캐릭터성에 대해 어느정도 파악을 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최은호가 너무 쎄게 나가서 되게 얕보였던 모양이다.

“…너 조용히 따라오는 게 네 신상에 좋을거야.”

박진수가 친구들의 시선에 못 이기고 눈을 부릅뜬채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 무슨 만화에서도 안 쓸 조폭 대사를.’

이제는 어쩌면 웃음만 나오는 박진수의 태도를 보며 가을 역시 한 걸음 다가서며 대응했다.

“그냥 이대로 줄 밖으로 나가는 게 네 신상에 좋을거야.”

협박에는 협박이지.

“내가 여기서 소리지르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가을의 말에 박진수는 움찔거리고는 뒷걸음질 쳤다.

이쯤되면 박진수는 그냥 학습능력이 없는 것 같았다.

가을 역시 박진수가 뭘 무서워하는 지 잘 알고있는 판에, 한도혁이 보냈다고 시키는 대로 협박을 하러 왔다니.

게다가 정말 오란다고 순순히 가는 사람이 어디있다는 거지.

가을은 아주 여유롭게 주머니 속에 한 손을 집어넣으며 다른 손으로는 얼른 꺼지라는 듯 홱홱 모션을 취했다.

“그래… 어떻게 되는지 보자.”

박진수는 이를 갈더니 아동만화에서 악당이 물러서면서 할 법한 대사를 치고는 친구들과 함께 줄 밖으로 나갔다.

박진수가 사라지자 가을은 쯧 하고 한 번 혀를 차더니 어느덧 자신의 차례가 된 놀이기구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탑승했다.














“캬~ 역시 스타트는 이게 짱이네.”

만족스럽게 즐기고 난 후 한껏 업 된 기분으로 다음 놀이기구를 향해 걸음을 옮기려던 가을은 부재중 전화가 떠 있는 화면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최은호?”

갑자기 전화할 이유는 뭐지.

가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이어지고, 곧이어 은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가을 너 지금 어디야?]

받자마자 다짜고짜 어디냐니.

“나 지금 롤러코스터 타러 갈건데. 방금 360도 회전하는 거 다 탔거든.”

[아, 어딘지 알겠다. 거기 있어, 나 거의 다 왔어.]

제 할 말만 하고 뚝 끊어버리는 은호의 행동에 가을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지 이건?”

일단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오겠다고는 했으니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기다리던 가을은 숨을 헉헉거리며 멀리서 뛰어오는 은호를 발견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은호 쪽으로 가자 그는 숨을 고르며 다가왔다.

“헉…헉…”

“뭐야, 갑자기 왜 온 건데?”

가을의 물음에 은호는 잠깐 기다려달라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한참 후에서야 정상적으로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너… 혼자… 다녀야 하잖아…”

“그거야 니들 다 스릴을 못 즐기겠다 그랬으니까.”

“…그래도.. 어떻게 혼자 다니게 하냐…”

아직도 숨이 정상적으로 돌아오지 않았는지 띄엄띄엄 말하는 은호를 보며 가을이 툭 내뱉었다.

“뭐래? 아깐 그냥 내버려두더니.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길래 혼자 뛰쳐오고 난리야?”

딱히 상처를 받았다거나 삐졌던 건 아니지만 굳이 그렇게 말하니까 살짝 엉겨붙어 있었던 심통이 삐져나왔다.

“글쎄… 이가을 없으니까 허전하던데.”

은호가 봐 달라는 듯 씩 웃었다.

친해져가면서 느낀 거지만, 최은호가 종종 보이는 저런 능글맞은 웃음은 뭐랄까.

면전에 대고 욕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럼 지민이랑 민규랑 둘이서 다니는 건가? 넌 근데 나 따라다닐 수 있겠어?”

친구를 혼자 내버려둘 정도로 무서운 걸 못 타는 듯 했는데, 어쩌려는 건지.

“음… 조금씩 배려하면서 타는 건 어떨까?”

“…”

은호의 제안에 가을의 표정이 한껏 굳어졌다.

모처럼 얻은 스트레스 해소의 기회를 이렇게 날리라고?

그럴 순 없었다.

“싫어. 다시 꺼져.”

가을이 단호하게 말하고는 쌩하니 먼저 걸음을 재촉했다.

은호는 나름 괜찮은 제안이라고 생각했지만 바로 씹혀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니… 왜…”

하지만 그녀는 별로 들을 생각은 없어보였다.

은호는 웃음섞인 한숨을 쉬더니 소리쳤다.

“아, 왜~ 이가을!”

그러고는 저 멀리 먼저 가는 가을을 쫒아 달렸다.













결국 타협점을 만들어 가을이 타고싶은 것 2개, 은호가 타고싶은 것 1로 합의를 본 가을은 나름 만족스러운 얼굴로 롤러코스터 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애초에 가을을 혼자 가도록 내버려 두었기에 은호가 미안했던 것과 퉁 치기로 한 합의점이었다.

“근데, 너. 혹시 누가 뭐 시비 걸거나, 그러진 않았지?”

은호가 넌지시 던진 질문에 가을은 0.5초 동안 굳이 박진수 얘기를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고는, 결국 굳이 할 필요 없겠거니 싶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시비는 누가.”

“다행이네.”

비로소 안심한 표정을 지은 은호는 곧이어 홱 지나간 롤러코스터 열차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들을 듣고는 금세 새파랗게 질렸다.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이 삐져나오려던 가을은 애써 참으며 물었다.

“야, 너 근데 진짜 저거 탈 수 있겠어?”

“…죽진 않겠지…”

창백한 안색으로 먼 산을 바라보던 은호는 문득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러고보니 아까 뛴다고 벗어뒀는데…”

가방에서 꺼내든 곰 머리띠를 자연스럽게 쓴 은호가 가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반응을 기대한다는 얼굴이었다.

가을은 머리띠를 보고는 눈을 크게 뜨고는 황당하다는 듯 내뱉었다.

“뭐야, 너 그런것도 하냐?”

“…이가을. 이 정도 보면 알 수 있겠지? 내가 지금 얼마나 불안한 상태인지 말이야. 이런 걸로라도 기분을 업 시켜놓지 않으면 타기도 전에 심장마비 올 것 같다고.”

“너 방금전엔 죽진 않겠다며?”

말투를 싹 바꿔 열심히 강의라도 하는 듯한 나긋나긋한 톤으로 말하기 시작한 은호를 눈치챈 가을은 어쩐지 이 놈이 뭔가 바라는 눈빛인데 싶어 의심스러운 얼굴로 그를 훑었다.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걸 보면 안 탄다는 소리같지는 않고, 타는 대신 뭔가 요구사항이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이상한 말투를 쓸 리가 없을테니까.

“죽지야 않겠지만, 아무래도… 내 마음이 많이 피폐해지지 않을까…?”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야.”

어쩐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저렇게 애를 쓴다는 건 엔간해서는 그녀가 들어줄만한 게 아니라는 뜻이니.

은호는 이때다 싶어 가방에서 머리띠 하나를 더 꺼내들었다.

“…”

고양이 귀를 보자마자 알아차린 가을은 입을 딱 다물었다.

“써 줘라.”

은호가 또 다시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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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없을 오늘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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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9-15 13:42 | 조회 : 69 목록
작가의 말
앤드리아

벌써 30화네요! 함께 달려와주신 독자님을 너무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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