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내가 하고 싶은 선택 (9)




한참 잔소리를 듣고 이제서야 터덜터덜 방 안으로 들어오게 된 가을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풀썩 꺼지는 의자와 함께 절로 기운이 빠지는 듯 해 축 늘어지고 말았다.

방금까지 듣던 온갖 잔소리와 다그침이 아직까지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시끄럽던지, 실제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데도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학원행…”

가을의 예상대로 두 계단이나 내려온 그녀의 전교 등수는 집 안 분위기에 큰 타격을 주었다.

밥 먹다가 중간에 체하게 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모두가 함께 모여 앉은 저녁식사 시간이 거의 끝날 때 즈음 말을 꺼낸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빠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며 눈치를 보는 가을을 보며 그저 ‘다음에는 꼭 등수를 올려라’라는 말 한마디를 하고 방 안으로 들어가셨고, 엄마는 숟가락을 무기처럼 쥐어 들고는 한탄을 했다.

이럴 줄 알기는 했지만, 막상 마주하니 역시 기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엄마는 바로 다니던 학원을 다시 다니고 6월 모의고사 때에는 다시 등수를 올리라고 꽥 소리를 지르며 잔소리를 끝마쳤다.

이제서야 숨을 돌릴 수 있게 된 가을은 어수선한 머리를 달래기 위해 뒤로 젖혔던 몸을 앞으로 다시 기울며 책상 옆에 치워두었던 문제집을 펼쳤다.

풀던 페이지로 책장을 넘기려는 순간, 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잔소리가 아직 안 끝났나 싶어 흠칫 놀랐던 가을은 곧이어 들려오는 한솔의 목소리에 긴장을 풀었다.

“누나, 바빠?”

“아이씨,”

가을이 의자를 돌려 한솔을 노려보았다.

“엄만 줄 알았잖아.”

“아, 누나 바쁘냐고.”

투덜거리듯 재차 묻는 한솔의 반응에 가을은 풀려던 문제집을 양 손으로 집어 머리 위로 올려보이며 천천히 읊조렸다.

“어떨 것 같냐.”

“음…”

한솔은 가을의 말 뜻을 이해하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조용히 뒤를 돌았다.

엄마한테 혼난지도 얼마 안됐는데 벌집을 쑤시려 하다니, 생각이 너무 짧았다.

문고리에 손을 다시 올리려던 찰나, 어깨 너머로 가을의 낮게 깐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데. 십초 안에 말해.”

“아, 아니.”

한솔이 뜸을 들이려다가 가을의 표정을 보고 지체없이 답했다.

“그, 오늘 학교에서 3학년 선배가 우리 반에 와서 묻던데, 내가 이가을 동생이냐고.”

“근데?”

“그, 맞다고는 했지. 근데 묻고는 그냥 바로 나가더라고.”

대수롭지 않게 듣던 가을이 뭔가 떠오른 듯 눈을 크게 뜨고 인상을 찌푸렸다.

“잠깐만, 갑자기? 그렇게 뜬금없이?”

“어어… 그래서 누나, 뭐… 학교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서.”

“아는 3학년 아니었고?”

“어. 완전 처음 보는 선배였는데.”

가을은 이상하다는 듯한 눈초리로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가을의 동생이냐고 물었다는 건, 무언가 그녀와 연관이 있다는 것인데, 생각하면 할수록 최근 들어 한도혁과 트러블이 있었던 것 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한솔이 다니는 새한 중학교는 가을이 졸업한, 조용하고, 학생들 행실도 바르고, 문제 없기로 유명한 학교였다.

새한 중학교에 다니는 누군가가 한도혁과 친밀해서, 가을과 그녀의 동생인 한솔을 연관지으려고 했을 확률은 적었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 수록, 그 이유를 제외하고는 딱히 뭔가 생각나지 않았다.

‘설마 뭐 나 대신 이한솔을 줘 패려고?’

잠깐동안 극단적인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물론 스스로도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올 뻔 했지만.

‘이건 좀 너무 과한 망상인가.’

무슨 만화도 아니고, 망신 좀 줬다고 동생한테까지 난리를 칠까 싶었다.

이내 생각을 떨쳐버린 가을이 한솔을 다시 돌아보았다.

“별 일 없는데. 딱히 생각나는 것도 없고.”

“그래?”

한솔이 밝아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니 난 또. 누나가 뭔 일이라도 터뜨려서 나한테까지 불똥 튀나~ 했지.”

가을의 얼굴이 저기압에서 풀린 것을 알아차렸는지, 깐족대기 시작했다.

가을은 주먹을 꽉 쥐고 물었다.

“…예를 들자면 뭔 일?”

“아니 뭐, 누나가 학교 짱을 패서 누나 대신 나한테 보복하려고 하는 것 같은…거…?”

신나게 깐족거리던 한솔은, 다시 굳어진 가을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말끝을 흐렸다.

목숨에 위협을 느낀 한솔은 이미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미처 문을 열 수 있기도 전에, 가을의 방 안에서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한솔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까불고 있어.”

가을은 오른손을 문지르며 다시 책상쪽으로 의자를 돌렸다.

아직 안 푼 페이지가 너무 많은 문제집을 보니 새삼 이번에는 평소보다 공부에 전념하지 못했던 것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분명 논 것도 아니고 의미 없는 일로 시간을 낭비한 건 아니었지만, 이제 공부에 신경을 더 쓸 필요도 있었다.

무엇보다 이제 태준도 곧 학교를 떠날 테니, 한도혁 패거리와 태준의 일 때문에 골머리를 썩을 필요는 없었다.

생각해보니, 은호가 말 해준 ‘곧’은 금방이었다.

“…내일이랬지…”










태준의 전학은 이미 결정된 사안이었고, 벌써 태준의 마지막 날이었다.

대부분의 반 학생들은 당연히 태준의 전학에 관심 없었고, 태준도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다.

은호가 말 해둔대로, 가을은 굳이 태준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나섰던 일을 말 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도와주기로 결심한 가장 큰 이유가 태준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서?가 아니었기에, 괜히 생색내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 가을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그 의견에 모두가 동의했기에, 가을과 지민, 민규는 굳이 태준에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

가을은 그저 한도혁과 정지훈의 빈 자리, 그리고 연신 창문만 바라보며 주변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는 박진수를 잠시 돌아보고는 태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전학가는 학교에서는, 그런 일 안 당했으면 좋겠다…’

가을이 턱을 괴고 은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태준을 응시하고 있자, 그 시선을 느꼈는지 태준이 가을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순간 눈이 마주치자 당황한 가을은 시선을 피해버리고 어색하게 허공을 응시했다.

어쩐지 태준의 시선이 계속 머물고 있는 듯 해 다시 고개를 돌리지는 못 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뭔가 하는 시늉을 하려 애썼다.

‘내가 자길 보고 있었다는 걸 눈치채진 않았겠지?’

가을은 태준에게 있어서, ‘대놓고’ 외면한 사람이었다.

결론적으로 그를 도와주게 되긴 했지만, 순수하게 억울한 그를 위해서도 아니었기에 태준과 직접 대면하고 싶지는 않았다.

태준의 앞에서 저도 모르게 창피해질 것 같았기에.

‘미안했다고 말… 해야하지 않을까…’

그래도 사과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태준을 직접 마주하기에는 면목이 없는 것 같다는 마음에, 가을은 애써 다시 돌아보지 않으려 했다.

어차피, 이제 다시 볼 리도 없을테니까.

그냥 이대로 내버려둬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도 없으니까.

‘그래, 도와주려고 애는 썼잖아. 된 거지 뭐.’












“잘 가고. 가끔 연락도 하고.”

“응.”

은호가 웃으며 태준의 어깨를 툭툭 쳤다.

“진짜, 정말 많이 고마웠어, 은호야. 전부 다.”

“고맙다니. 친군데.”

은호의 ‘친구’라는 말에 태준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태준의 표정을 확인한 은호가 괜히 면박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보는 건데, 울려고?”

태준은 말 없이 고개만 떨구었다.

“울지 말고.”

은호가 마치 어린 동생을 달래듯 어깨를 토닥였다.

“잘 가.”

태준은 끝까지 고개를 들지 못한채 살짝 끄덕이기만 했다.

천천히 뒤를 도는 태준의 어깨가 작게 떨렸다.

은호는 그런 태준의 모습을 쭉 바라보고 있었다.

몇 걸음을 옮긴 태준이 문득 멈춰 서더니, 몸을 돌려 은호 쪽으로 몇 마디 작게 전했다.

“그래도 정말 다행이야… 이 학교에 안 좋은 기억만 있는 건 아니라서.”

분명 인사는 했지만, 할 말이 더 남아있었는지 태준이 푹 숙였던 얼굴을 살짝 들었다.

“…마지막으로 말 할게… 친구 해줘서 고맙고, 늘 도와줘서 고맙고…”

그러면서 교복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꼼지락거리며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또 덕분에… 다른 애들도 용서… 할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고…전해줘.”

태준이 손에 들린 하얀 무언가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늘 쓸쓸하게만 느껴졌던 태준의 웃음과는 어쩐지 다른 웃음이었다.

태준의 손 안에 편지 비슷한 무언가가 있는 것을 본 은호는 태준의 말 뜻을 알아차리곤 눈을 크게 떴다.

용서한다고 하지만, 정말 용서 할 수 있을리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태준의 손에는 편지가 들려 있었고, 그는 웃고 있었다.

그 편지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모를 수가 없었다.

“어. 꼭 전해줄게.”

은호는 계속 미소를 띈 채 교문으로 걸어가는 태준의 뒷모습을 마저 응시했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고 늘 죄인으로 살아야 했던, 조그마한 친구의 모습이 사라질 때 까지.

“잘 가. 신태준.”








“갔네.”

태준의 모습이 사라지자, 가을이 문 안쪽에서 나오며 나지막이 말했다.

은호는 그녀가 뒤에서 듣고 있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는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가 말 없이 물끄러미 가을을 바라보자, 그 의미를 알아챈 가을은 낯간지럽다는 듯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그냥 뭐. 내 맘 편하자고 한 거야. 내 맘 편하자고.”

가을의 반응에 웃음이 나왔다.

진짜 마음 편하자고 편지를 쓴 것일 리가 없을테니까.

아무튼, 아닌 척 해도 은근히 마음이 여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을도 그녀의 말이 우스웠는지, 은호가 쿡쿡 웃어도 그저 가만히 있었다.

“그래서, 마음은 편해졌어?”

은호의 물음에, 가을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답했다.

“글쎄.”

그녀 스스로도 정말 모르겠다는 듯, 복잡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역시 편지쓰길 잘 했다는 생각은 드네.”

가을 역시 태준의 모습이 있었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교 시간을 한참 넘어서, 교문을 지나가는 학생들은 보이지 않아 텅 비었지만, 은호와 가을은 한동안 교문 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용기가 없어서 직접 말하지는 못했지만, 꼭 전하고 싶었다.

미안했다고.

편지 몇 줄로 충분할 리가 없었을 지 몰라도, 그녀 자신에게 쏟았던 눈길을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돌려봤다면 어쩌면 이런 일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태준이 받아들이는 것과 상관없이 미안하다고는 꼭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매일 학교를 다니며 이유없이 괴롭힘을 당해야 했던 태준은, 항상 피해자였고, 가해자들이 태준에게 누명을 씌워 정학까지 받게 했을 때 까지도, 그는 피해자였다.

태준은 누명을 벗었고, 가해자들은 약하게나마 벌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가을이 염려했던 것 그대로, 실질적으로 바뀌는 것은 없었다.

태준이 전학을 간대도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고, 그가 전학 가는 학교에서는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다.

한도혁 패거리는 뉘우치거나 반성하지 않았고, 태준이 아니더라도 다른 학생들을 괴롭힐 것이었다.

그럼에도, 처음과 달리 가을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준의 입장은 바뀐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가을은 도와주는 것이 의미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적어도 태준은, 이제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에게 미안해하고 있음을, 그리고 누군가는 도와주려고 했음을.

한 번도 태준이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가을은, 그의 미소만으로도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의미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잘 한 행동이었다.

돌아보면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는 늘 그녀 자신이 원하는 행동이었고,

후회라고 생각했던 행동들은 끊임없는 고뇌로 이어졌었다.

결국 그 모든 행동들은 지금의 결과와 선택으로 이어지기 위한 디딤돌이었던 것이었다.

만족스러웠다.

쉽지만은 않았지만, 그 많은 보기들 중에, 결국 자신의 옳은 선택을 할 수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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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6-19 16:09 | 조회 : 144 목록
작가의 말
앤드리아

이번화를 마지막으로 긴 프롤로그가 끝났네요. 다음편부터는 본격적인 학원물(...?) 아무튼 태준이 챕터보다는 더 가벼운 내용 위주일 예정입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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