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내가 하고 싶은 선택 (7)





‘아, 그걸 생각 못했어..!’

운동장과 학교 뒷뜰 쪽을 달려가며 은호는 자책을 멈추지 못했다.

한도혁과 정지훈이 은호 자신과 가을에게 앙심을 품고 있을 것이 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학이 풀린 후에나 신경쓰면 되겠지 하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게 문제였다.

게다가 지금 상태의 한도혁은 자주 연락하던 친한 2,3학년 선배들에게서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니, 당연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단정지었다.

‘그 자식이 혼자라도 난리 칠 수 있다는 걸 간과하고 있었어…’

한도혁이 자신을 먼저 찾았다면, 어떻게든 넘어갈 자신이 있었기에, 애초에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가을을 먼저 본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마침 징계까지 결정된 판에 한도혁은 눈에 뵈는 게 없을테니, 가을한테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가을의 성격상 상황을 모면하고자 사과한다거나 비굴하게 나올 리도 없었으니까.

‘번호라도 미리 알아뒀어야 했는데…!’

나름 점점 친해지고 있었는데, 아직까지 번호 교환까지 하지 않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가을에게는 미안하고 고마운 일 투성이었는데, 이것마저도 자신의 잘못 같아서 마음이 점점 더 급해져만 갔다.

쓰레기장 뒷쪽으로까지 살펴본 은호는 가을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자 초조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딨는 거야, 이가을?’













“아… X발… 5등…”

가을은 세수를 하며 머리를 식혔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달려가서 확인해본 성적 등수는, 지난번 모의고사때 보다 떨어진 등수였다.

확실히 이번 시험공부때 완벽하게 집중하지 못한 것을 본인도 자각하고 있었으므로 저번보다 잘 했을거라는 기대는 별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두 계단이나 떨어진 성적을 보자 마음은 초조해졌다.

‘아… 이제 학원…’

성적을 유지하는 대신 학원을 그만 두었지만, 이렇게 성적이 떨어졌으니 다시 학원행일 것이 뻔했다.

또 엄마는 잔소리에, 아빠는 말 없이 기분이 다운되어 있겠지.

벌써부터 숨이 턱턱 막힐 집 안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 어떡하냐…”

가을은 발을 쿵쾅거리며 분풀이를 해댔다.

다행히 일부러 잘 쓰지 않는 3층 화장실까지 왔기 때문에, 안에 누가 있지는 않았다.

오늘이야말로 애들이랑 끝나고 뭐라도 먹으러 갈까 싶었지만, 성적을 보니 집에 바로 들어가서 공부하는 척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거워진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며 여자 화장실을 나서던 가을의 눈에 무언가 익숙한 것이 눈에 띄었다.

“…내 가방?”

눈 앞에 스쳐지나가는 누군가가 질질 끌고있는 것은, 분명히 자신의 가방이었다.

가을이 직접 만든 열쇠고리와 옆에 꽂혀있는 붉은 물병이 눈에 띄었다.

확실한 그녀의 가방이었다.

그리고 가방을 끌고 지나쳐가는 사람의 뒷모습도, 분명 익숙한 모습이었다.

이미 다들 하교하고 3층은 거의 텅 비었기에, 가을은 거리낌없이 소리쳤다.

“야, 너 뭐야?”

아니, 사실 그녀의 가방을 그렇게 막무가내로 끌고다니는데, 사람이 많았어도 소리는 질렀을 것 같았다.

그녀의 목소리에, 앞서 가던 익숙한 뒷모습이 뒤를 돌았다.

“허? 여기 있었네?”

한도혁이 씩 웃었다.

“지나칠 뻔 했네. 가방 가지고 오길 잘 했는데?”

그는 킬킬 거리더니 가을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뭐 하는거냐, 너?”

가을은 자신의 가방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내 놔라.”

“어~ 어차피 니 가방에는 관심 X도 없어.”

한도혁은 관심 없다는 듯 어느새 가을의 바로 앞까지 와서는 바로 옆의 남자 화장실로 그녀의 가방을 던졌다.

가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지난 번, 민규에게 함부로 하는 한도혁을 보고 화가 치밀어오르던 때와 같았다.

점점 속이 부글거리며 끓었다.

“주워 가던가.”

덧붙인 한도혁의 말에, 가을은 머리가 새하얘지는 것 같았지만, 눈을 딱 감고 스스로에게 넘어가자 넘어가자를 반복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가을은 걸음을 옮겨 남자 화장실 중앙에 널부러진 가방을 집어들었다.

벌려진 가방 틈 사이로 공책과 필통 등이 삐져나와있었다.

‘그냥 넘어가는거야.’

가을은 계속해서 참기만 하며 마지막 공책을 집어들었다.

“…”

공책 뒷부분이 화장실 바닥에 남아있던 물에 젖어있었다.

공책 앞부분을 보니, 요점 노트 라고 적혀있었다.

“…”

가을은 고개를 숙인채 노트를 꾹 쥐었다.

가방을 들쳐맨채 일어선 가을의 뒤에서, 누군가의 손이 강하게 그녀를 옆으로 밀어버렸고, 가을은 영문도 모르고 앞으로 밀려 화장실 안쪽 벽에 부딪힌 채 바닥에 쓰려졌다.

“X발, 주제도 모르고 나대지를 말았어야지.”

한도혁은 뭐가 그리 좋은지 계속 웃어대며 가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상황파악 잘 하고 잘만 모른 척 하는 것 같더니, 왜 갑자기 나대?”

한도혁은 가을의 가방을 세게 차더니 히죽거렸다.

“뭐, 됐고. 그냥 몇대만 맞자. 넌 좀 맞으면 정신 차릴 것 같아.”

한도혁이 주먹을 치켜들었다.












어딜 봐도 가을은 보이지 않았다.

‘건물 안에 있는 건가?’

벌써 두바퀴째 학교를 돌아봤지만, 가을이나 정지훈, 한도혁은 보이지 않았다.

한도혁이 가을의 가방을 가져간 이상, 가을이나 은호를 발견하지 전까지는 그냥 가지 않을 것이었고, 가을 역시 가방이 사라진 이상, 집으로 가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러니 한도혁이 가을에게 뭐라도 하기 전에 빨리 찾아야만 했다.

은호가 머리를 흐트리며 건물로 들어가려던 찰나, 민규와 지민을 발견했다.

“은호야, 가을이 찾았어?”

두 사람도 아마 남아있던 반 아이들에게서 대충 무슨 일인지 들었는지, 몹시 초조한 얼굴이었다.

“아니, 못찾았어.”

“1층은 봤거든? 2층 볼테니까, 3층 가 볼래?”

“알았어!”

지체하는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먼저 걸음을 뗀 은호는 달리면서 답했다.

이윽고 곧바로 계단을 달려 올라온 은호는 가장 먼저 눈 앞에 보이는 화장실 먼저 확인했다.

여자 화장실을 확인 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에 누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고, 곧이어 확인한 남자 화장실에도 확실히 아무도 없었다.

“2층에 있어야 하는데…”

빠르게 각 교실을 훑던 은호는, 순간 복도 맨 끝에 있는 화장실 쪽에서, 신음 소리 비슷한 것을 들었다.

“…설마…?”

설마, 벌써 한도혁이 벌써 가을을 찾아서, 해코지라도 하고 있는 건…

은호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전속력으로 복도 끝까지 달려 화장실에 다다랐다.

소리가 들린 것은 여자 화장실이 아닌, 남자 화장실이었다.

제발 아직 별 일 없었기를 바라며, 안으로 뛰쳐들어간 은호는 눈 앞의 광경을 보고 얼어붙어버렸다.













“이 미친놈이 뭐라고 씨부리는 거야.”

그녀의 눈 앞에서 주먹을 치켜들었던 한도혁이, 조용히 중얼거리는 가을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가을은 전혀 겁 먹지 않았다는 듯, 매섭게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야, 너 혹시 너무 무서워서 정신 나갔냐?”

이제라도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질질 짜도 모자랄 판에, 가을은 아랑곳하지 않고 본인이 할 말만 해 댔다.

보통 여자애라면 이쯤 되면 울거나 주저앉아서 잘못했다고 할 텐데.

한도혁은 그런 그녀를 이해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곧바로 자신의 비위를 맞추던 다른 애들과는 다른 그녀의 태도에 화만 더 나기 시작했다.

“야, 넌 몇 대로 안되겠다? 아주 내가?”

그의 얼굴 근육이 꿈틀거리곤 다시 한번 주먹을 치켜들었지만, 순간 왼쪽 얼굴에 느껴지는 강한 타격에 한도혁은 눈을 찔끔 감을 수 밖에 없었다.

기우뚱, 하고 한도혁의 중심이 무너지고, 그는 곧바로 비틀거리며 옆의 벽에 부딪혔다.

어버버하며 한도혁이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방금 전과 비슷한 타격이 머리로 가해졌고, 그는 고통에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다.

“악!”

바닥에 엎어져서 눈을 뜨자, 그의 앞에는 오른손에 자신의 가방을 무기라도 된 양 들고선 금방이라도 다시 내리칠 기세의 가을이 서 있었다.

가을이 그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뭐라고 했는지, 다시 한 번 말 해보던가.”

그 말은 들은 순간, 한도혁의 얼굴이 새빨개지기 시작했다.

주먹을 내지르려다 되려 당했다는 것. 그리고 지금 위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 보는 건 가을이고, 자신은 바닥에 엎어져있다는 것.

무엇보다 지금 공부밖에 할 줄 모르는 범생이 여자애한테 맞았다는 사실이 가장 쪽팔렸다.

그리고 그 쪽팔림은 금방 분노로 뒤바뀌었다.

“이런 X발X이?”

한도혁은 바로 자리를 박차고 가을의 가방을 빼앗으려 덤벼들었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쓸 줄 알았지만, 의외로 가을은 금방 가방을 놓아버렸고, 오히려 가방을 집은 한도혁을 다시 뒤로 홱 밀어버렸다.

반동에 의해 다시 뒤로 주저앉은 한도혁은 울그락불그락한 얼굴에 오만가지 인상을 다 쓰고는 꽥 소리질렀다.

“죽여버린다!!!”

한도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주먹을 내질렀다.

하지만 가을은 이미 상체를 숙이곤 한도혁의 무릎을 발로 걷어찼고, 무릎에 힘이 풀려 다시 중심을 잃어버린 한도혁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또 넘어질 수는 없다 싶은 한도혁이 다른 발로 중심을 잡아 넘어지지 않고 곧바로 가을의 손목을 붙잡았다.

가을은 놀라 눈을 크게 뜨고는 한도혁의 팔을 빼려고 움직였다.

하지만 힘으로 빠지지 않을 만큼 세게 쥐고 있었다.

“이거 놔라.”

“X발. X친 X.”

어쩐지 힘겹게 가을을 붙잡은 한도혁은 헉헉거리며 욕을 내뱉었다.

“놓으라고.”

“닥쳐ㄹ?”

한도혁의 말은 끝을 맺지 못한채 묻혀졌다.

곧바로 가을이 다른 손으로 자신의 손목을 쥔 한도혁의 손가락 사이를 세게 눌렀다.

“악!”

그리고 미처 정신을 차릴 수 있기도 전에, 그대로 떼어진 손을 비틀어 돌렸고, 양 손으로 지긋이 눌러 손을 등 뒤로 꺾었다.

가을은 자연스럽게 한도혁의 등 뒤에 서서 그의 무릎 뒷쪽을 발로 눌렀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양 무릎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악!”

한도혁은 팔 다리, 모두 가을에 의해 꼼짝도 못 하게 눌려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복도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곧바로 화장실 안으로 뛰쳐들어왔다.

은호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안에 들어서서 눈 앞의 상황을 보자마자 그는 입을 딱 벌렸다.

“어…”

뭐라고 할 말이 떠오르지 않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0
"다시없을 오늘을 위해"
리워드 지급 현황

133뷰, 133원

작가님에게 순방문자 1명당 1원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 )



※ 분량이 5k이상, 사용자가 머무는 시간이 30초 이상인 경우 지급 됩니다.
※ 유료 분량이 1/3(33%)이상인 경우 1명당 2원을 지급 하고 있습니다.

리워드 상세설명
이번 화 신고 2019-06-14 17:20 | 조회 : 127 목록
작가의 말
앤드리아

제가 이래서 가을이를 참 좋아합니다 ^^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