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녀, 에디스(6)-에디스/에드윈

기사들의 청을 거절한 에디스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황녀 궁으로 향했다.
황녀 궁에 도착했으나, 에디스는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궁 안의 정원의 잔디 밭에 털썩 주저 앉았다.
시원한 밤 공기가 뺨의 열기를 조금이나마 식혀주는 것 같았다.
에디스의 정원에 있는 꽃은 단 한 종류뿐 이었다.
수국.
꽃말은 ‘진심’ 이었다.
에디스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었기에 정원사는 매일 관리를 하며 최고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에디스는 그 수많은 꽃들 중에서 제일 에디스와 가까이 있는 한 송이를 손으로 툭툭 치었다.

“이게 아바마마의 진심일까……? 그렇다면 난 더 이상 버티지 못 할 것 같아.”

차라리 냉대를 하고, 에디스에게 무관심했다면, 에디스도 조금씩 포기했을 것이었다.
그에게 사랑 받는 것을.
하지만 그녀가 어떻게 생활하는지 매일 보고 받고, 활기찬 식사 시간은 아니지만 매일 빠지지 않고 함께 식사하고, 인사를 하면 받아주는 모습을 보고 에디스는 사랑의 끈을 놓지 못했다.
하지만 이건 오늘의 일 이전에 감정이었다.
만약 로버트가 에디스를 ‘제국의 수치’,’멍청이’ 라고 여긴다면 그녀 그 자신은 어떻게 해야만 할까?
그 폭언과 냉담한 시선을 그녀가 견뎌낼 수 있을까?
에디스는 고개를 저었다.
에디스에겐 에드윈처럼 로버트에게 따질 용기도, 맞설 용기도 없었다.
하늘을 검게 드리우던 먹구름은 이내 물이 되어 내렸다.
그 물은 비가 되어 온 제국을 적셨으며, 아직 밖에 있는 에디스의 몸도 예외는 아니었다.
점점 차가워지는 몸을 따뜻하게 할 생각도, 하물며 비를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에디스는 비를 다 맞고 있었다.
마치 그 속에서 그녀의 눈물도 같이 흘려 보내겠다는 듯이.
에디스가 우는 소리는 점점 강해지는 빗줄기의 소리에 의해 감춰줬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억수같이 쏟아지던 빗줄기가 점점 가늘어지고, 따사로운 태양빛이 인사를 했다.
상쾌한 아침을 맞이할 것만 같았던 날이었으나, 사람들 마음 속엔 아직도 비가 내렸다.
이른 아침,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헉헉거리는 자신의 숨소리를 다스리지 못한 채로 들어온 소년은 에드윈이었다.
그가 들어가자 방 안에 모여있던 시녀와 유모, 릴리안은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에드윈의 눈동자 속에 비치지 않았다.
이유는 너무나 간단했다.
그의 여동생인 에디스가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어떤 게 된 일인지, 낱낱이 고하라.”

로버트를 닮은 살기등등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시녀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 중에서도 얼굴색이 나은 것은 유모, 릴리안이었다.
그녀는 죄인처럼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유모이자 황녀 궁 시녀장인 그녀가 무릎을 꿇자 다른 이들도 무릎을 꿇었다.

“어제 밤에 황제 폐하께서 황녀 전하를 부르셨습니다. 황녀전하께서 그날 본 쪽지 시험의 결과가 좋지 않아서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그……”

계속해서 에드윈의 눈치만을 보는 릴리안 때문에 에드윈은 이게 지금 인내심 시험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동생이 아픈데, 여기서 화를 낼 수 없었기에 참았다.
혹시라도 동생이 자신 때문에 깨면 안 되니까.

“그래서.”
“황제 폐하께서 술을 드시고, 황녀 전하를 때리셨다고……황…황자 전하!”

릴리안은 당장이라도 로버트를 죽일 것 같은 에드윈을 직접 붙잡았다.

‘물론 우리 사랑스런 황녀님을 때린 황제가 나쁜 놈이지만, 폐륜은 안 됩니다, 황자님!’

“이거 놔라, 릴리안.”

에디스를 꼭 닮은 바다 빛 눈동자는 심해로 가라앉았다.
릴리안은 이대로 에드윈이 자신을 어떠한 죄목으로 감옥에 집어 넣는다고 해도, 지금의 선택을 후회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황자 전하! 제발 진정하세요. 나중에 황녀전하께서 아시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

에디스가 언급되자 릴리안에서 벗어나려 했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움직임이 멈추자 릴리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를 풀어주었다.
에드윈은 에디스를 진찰한 궁의에게 물었다.

“많이 안 좋나?”

긴 머리를 질끈 묶은 궁의는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에 에드윈은 가슴이 철렁했다.

“절대 좋지 않습니다. 뺨도 한 번 때린 것이 아니라 두 세 번은 때렸을 것이고, 밤새도록 비를 맞고 계셨기에 열이 높고, 목도 많이 부었습니다. 일단 감기약과 붓기가 빠지는 약을 드릴 테니, 며칠 간 상태를 지켜봐야 될 듯 합니다.”

에드윈은 순간 망치로 내리친 것 같은 충격에 뒤통수가 절로 얼얼해졌다.
그가 만약 고혈압 환자였다면, 이대로 뒷목을 잡고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로버트가 한 번도 아니고, 두 세 번을 때렸으며, 에디스는 밤새도록 비를 맞고 있었다니!
그저 기사들에게 에디스가 아프다는 말만 듣고 바로 달려왔기에 이런 심각한 상황인 줄은 전혀 알지 못했었다.

“제이플라, 내 동생을 부탁한다.”

제이플라, 그녀는 이 제국에서 제일 의술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자자한 의사였다.
그녀는 황명이라도 받는 사람처럼 진지한 얼굴로 알겠다고 말했다.
그 뒤로 에드윈은 어딘가로 향해 바삐 걸음을 옮겼다.
기사들의 인사를 흘겨 들은 채 오직 목표인 한 곳을 향해 뛰어갔다.
도착한 곳은 황제 궁이었다.
기사들이 지금 귀족들과 회의 중이시라 다음에 오라고 전했지만, 에드윈은 다음 기회를 기다릴 수가 없었다.
이번이 아니면 그 어리석은 그의 아버지에게 말을 못 할 것 같으니까 말이다.
설마 로버트도 에드윈이 회의에 난입해 어제의 일을 따질 거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에드윈은 곧장 회의실로 향했으며, 그 곳에서도 마찬가지고 기사들은 송구스럽단 표정으로 에드윈의 앞길을 막았다.

“비켜라.”
“안됩니다, 황자전하. 황제폐하께서 가만히 계시질 않을 것입니다!”
“그럼 어제 에디에게 했던 것처럼 내 뺨이라도 때리라고 해라! 기꺼이 맞아줄 테니.”

황제가 함구령을 내렸는지, 기사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들을 상대해 줄 여유가 없는 에드윈은 자신이 직접 회의장에 문을 열고 당당히 입장했다.
에드윈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귀족들은 당황한 듯 눈동자를 굴리고, 눈을 비볐다. 지금 그들이 보는 게 사람이 아니라 유령이라도 보는 양.

“에드윈. 이게 무슨 짓이냐. 당장 나가거라.”

예상대로 로버트는 에드윈의 깜짝 등장을 예상하지 못했었다.
에드윈은 제 분노를 속으로 삭히며-눈동자는 살기등등한 채- 로버트만을 직시했다. 찔리는 것이 있는지 로버트의 얼굴에 금이 갔다.

“잠시 아바마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 미안하지만, 급한 게 아니라면 오늘 회의는 오후로 미루면 안 되겠나?”
“황자 전하, 송구스럽습니다만, 이 회의를 마친 후에 담소를 나누시는 게……”
“갑자기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네. 하지만 나도 아주 중요한 일이라… 그대들이 너그럽게 이해해줬으면 좋겠군.”

한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귀족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황자 전하, 오늘이 이만 돌아가시지요. 이러시는 건 법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에드윈은 즐거운 농담을 들은 사람인 마냥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평소와는 다른 에드윈의 분위기에 귀족들의 머릿속엔 사이렌이 울렸다.
여기서 물러나지 않으면 목을 내놓아야 될 것만 같은 살기에 귀족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져갔다.

“법도라……아주 중요한 문제네. 하지만 부모의 의무를 져버린 이가 이 곳에 있는데, 법도가 뭐가 중요하겠나.”

에드윈의 시선이 로버트에게 머물자 귀족들 또한 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로버트의 사나운 기색에 금방 고개를 떨구고 도망치듯 방을 나갔다.
방 안에 두 사람의 살기만이 맴돌았다.
에드윈은 감히 에디스에게 폭력을 행사한 로버트를 향해, 로버트는 자신에게 반항적인 모습을 보이는 에드윈에게, 그들 사이에 맴도는 살기는 금방이라도 날카로운 검이 되어 서로를 베어버릴 것만 같았다.
누가 먼저 입을 열지 않는 상황에서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로버트였다.
그는 에드윈이 왜 화가 났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로버트는 상석에 앉아 자리에 앉지 않고 무시무시한 눈을 한 에드윈을 지긋이 내려다 보았다.

“그래. 내가 부모의 의무를 져버린 이라. 에드윈, 내 아들아. 넌 나를 그렇게 생각했더냐.”
“그럼 자기 딸을 때리는 아버지가 잘 한 행동입니까? 아버지의 그런 몰상식한 행동 때문에 에디가…에디스가 어떤 상태가 되었는지 아시냐고요!”

울지 않으려고 했다.
병상에 누워있는 에디스의 눈가는 빨갛게 변해있었고, 아버지란 작자가 때린 상처는 아직도 붓기가 빠지지 않았다.
에드윈은 그 자리에 자신이 없었다는 게, 동생이 맞을 때, 자신이 없었다는 게 너무나 원망스러웠고, 그 자신이 한심해졌다.
그래서 에드윈은 에디스를 위해서라도 울지 않으려고 했다.
울면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었기에 에드윈은 끝까지 눈물을 참으려고 했다.
하지만 타는 듯한 열과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은 에디스의 모습이 떠오르자 눈물이 수도꼭지가 고장이 난 것마냥 떨어졌다.
에드윈 또한 에디스처럼 소리를 참아가며 울었다.

‘우는 모습은 남매가 판박이구나. 다 나의 죄로구나…...’

에드윈이 우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로버트는 이내 견디기 힘든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에드윈에게 눈길 한 번 안 주고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에드윈은 로버트가 나간 후 굳게 닫힌 문을 향해 포효하듯 소리쳤다.

“아바마마!”

하지만 이미 닫힌 문은 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에드윈은 또 이렇게 도망친 로버트가 어이가 없고, 화도 나고, 이 감정을 무어라 정의 내려야 하는 지 그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어마마마께서 살아 계셨더라면……조금은 달라졌을까?’

계속 이러고 있다간 엄한 생각을 할 것만 같아 에드윈은 서둘러 눈물을 닦고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다.
그리고 곧바로 에디스의 방으로 향했다.
혹여 로버트가 에디스의 방으로 가지 않을 까, 하는 작은 희망을 품으며.
하지만 그 희망의 날개는 에디스의 방에 도착하자마자 하늘에서 처참히 추락하고야 말았다.
잔뜩 구겨진 얼굴의 에드윈을 릴리안이 맞았다. 에드윈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에디스는 좀 어때?”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하셨습니다……”
“그래…릴리안, 잠시 가서 식사라도 가볍게 하고 와. 에디스를 간호하느라 식사도 제대로 못 했을 거 아냐.”
“하지만……”
“어허! 명령이다. 황자인 내 말을 거역할 생각은 아니겠지?”

말을 냉혹하게 들렸지만 그 속에 담긴 마음은 따뜻하단 것을 릴리안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송구스럽다는 듯 자세를 낮추며 방을 나갔다.
방 안에 에디스의 약한 숨소리와 드문드문 들려오는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에드윈은 에디스 이마에 올려져 있는 손수건을 물을 묻혀 다시 올려 두었다.
차가운 것이 기분이 좋은지 에디스의 입술이 조그마한 호선을 그렸다.
에드윈은 침대 옆에 의자에 앉아 에디스의 손을 잡았다.
손 또한 용광로처럼 뜨겁다 못해 타는 것만 같았다.

“에디…에디…제발 눈 좀 떠 봐.”

에드윈은 다급해졌다.
에디스가 이대로 건너지 말아야 할 강을 건너는 것이 아닌가, 불안했다.
그러면 안 됐다.
에드윈이 어머니인 엘리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모두 에디스 덕분이었다.
갓 태어난 동생인 에디스를 지킬 사람은 에드윈과 로버트밖에 없었다.
부친인 로버트가 제대로 의무를 다했더라면, 에드윈도 이렇게까지 필사적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에드윈은 죽음을 두 번이나 보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그 죽음이 생판 모르는 타인이 아닌 가족의 죽음을.
에디스의 손을 잡은 두 손이 불안감에 떨려왔다.
에드윈은 이 곳에 있을지도 모르는 신께 기도를 올렸다.
제발 어머니에 이어서 동생마저 데리고 가지 말아달라고…
동생마저 사라진다면, 이 삭막하고 마음 기댈 곳이 없는 곳에서 단 하루라도 버틸 자신이 없다고……
에드윈의 눈물 어린 기도는 식사를 마친 릴리안이 돌아와서도 계속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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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8-02 11:12 | 조회 : 1,375 목록
작가의 말
달님이

에드윈에겐 '죽음'이 트라우마입니다. 4살에 겪은 어머니의 죽음이 트라우마가 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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