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스의 시험 점수를 받은 로버트는 분노했다.
"지금 당장 황녀를 불러 와라!"
황명을 받은 기사는 명을 받잡겠다는 말을 한 뒤, 황제의 침실을 나섰다.
그 뒤로 오스왈드가 따라나왔다.
"황제페하께서 화가 많이 나신 듯 합니다. 괜히 제가 보고를 들인 게 아닐까 염려되는 군요."
오스왈드는 걱정스럽다는 투로 말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걱정이란 말이 들어있지 않았다.
그걸 느낀 기사는 오스왈드를 죄인 보듯이 바라보다가 황명을 실행하고자 발걸음을 옮겼다.
기사가 사라지자 오스왈드는 이를 들어내며 웃었다.
''그래. 계속 미워해라. 증오해라. 그렇게 된다면, 그 분의 계획이 이루어질 테니.''
오스왈드는 시커먼 구름 속에 가려진 달을 바라보며 미소를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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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는 에디스의 방문 앞에 서서 작게 한숨을 쉬고는, 노크를 했다.
끼익, 금발의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녀 전하,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황제 폐하께서 지금 모시고 오라는 명입니다.”
“그래요.”
로버트가 언젠가 사람을 시키든, 그가 직접 오든 이렇게 불려나갈 것이란 건 이미 에디스는 예상하고 있었다.
시험지가 에디스의 손을 벗어난 이후로 말이다.
그래서 에디스는 목욕을 한 후, 자지도 않고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는 잠옷으로 갈아입지 않은 에디스를 보고 뜻밖의 사실을 깨달았다.
‘황녀 전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구나.’
에디스가 먼저 걸음을 옮기자 기사는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그 모습이 어린 주인님과 그를 지키는 기사님처럼 보였다.
에디스는 그녀의 뒤를 따르는 기사를 보고 든든함을 느꼈지만, 이와는 별개로 발걸음을 무겁기만 했다.
분명 전래동화에나 나오는 호랑이나 도깨비처럼 화가 난 로버트가 에디스에게 어떻게 할 지는 안 봐도 훤했다.
멈추지 않는 걸음은 결국 이들을 호랑이의 소굴로 불러들였다.
문을 지키던 기사들이 에디스를 향해 경례를 했다.
“제국의 작은 별, 황녀전하를 뵙습니다.”
“내가 왔다고 아바마마께 고해줄래요?”
현재 로버트의 감정을 아는 기사들은 머뭇거렸지만, 그들이 황제와 황녀의 명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는 없었다.
할 수 없이 한 기사가 체념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 황녀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들라 해라.”
닫힌 방문 너머로 눈처럼 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얼굴도 보지 않은 상태임에도 등골이 절로 오싹해져 에디스는 떨리는 그녀의 손을 반대쪽 손으로 억눌렸다.
황제의 명을 받고 에디스를 데리고 온 기사는 그 모습을 보고 같이 들어가겠다고 말했으나, 에디스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 자신의 일 때문에 타인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만, 그녀가 말하지 않은 또 한 가지의 마음은 따로 있었다.
바로 로버트에게 혼나는 에디스의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칭찬받는 것도 아닌데, 남에게 보여줘 봤자 고용인들이나 귀족들에게 구설수에 오를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소문을 들은 에드윈이 로버트에게 왜 그랬냐며 로버트를 무작정 비난할 것이며, 부자의 사이가 더더욱 나빠질 것이었다.
에디스는 그것이 무섭고 두려웠다.
아직 에드윈은 10살 소년이었기에, 실질적인 권력은 황제 로버트가 잡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아직 황태자 자리에 오르지도 못한 황자가 황제에게 덤비는 것은 호랑이 굴에 들어가 나 먹으라며 엉덩이를 움직이는 토끼와 같았다.
문이 열리고 에디스는 침대에 걸터앉은 그녀와 같은 금발 남자를 향해 드레스 자락을 잡았다.
“소녀, 아바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에디스가 들어올 때, 쳐다보지 않던 로버트가 드디어 시선을 돌렸다.
에디스는 떨리는 손을 숨기려 드레스 자락을 꽉 잡았다.
루비처럼 선홍 빛의 눈동자가 핏빛처럼 보였다.
방 안에 맴도는 독한 술 냄새 때문에 에디스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여기서 쓰러진다면 로버트가 무슨 짓을 벌일 지 알 수 없었기에 에디스는 눈과 다리에 힘을 주었다.
침대에 걸터앉았던 로버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모든 게 에디스의 눈에서는 슬로모션으로 보였다.
짝!
피부와 피부가 마찰된 소리가 방에 울렸다.
모래성에 물을 붓듯 작은 소녀의 몸은 쉽게 옆으로 쓰러졌다.
에디스는 지금 상황에 믿기지 않았다.
믿기지도 않았을뿐더러, 믿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뺨 한 쪽에서 느껴지는 아픔과 쓰라림은 진짜였다.
에디스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울지도, 일어나지도 못한 채로 빨갛게 부어 오른 뺨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감쌌다.
“감히 네가 이 아비에게 수치를 줘?! 감히…감히……!”
정돈되지 않은 말들이 에디스의 귀에 그대로 박혀 들어갔다.
에디스가 아무 말도 못하고 벌벌 떨고만 있자, 로버트는 제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기어이 다시 손을 들었다.
에디스는 그녀의 몸을 보호하고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아까처럼 피부와 피부의 마찰 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입 안쪽을 씹었는지 비릿한 피 냄새가 입 안에 퍼졌다.
에디스는 빨리 뱉고 싶었지만, 아직 제 화를 다스리지 못 하는 로버트 앞에서 가보겠다는 말을 할 용기가 없었다.
에디스는 나약하고 바보 같은 그녀 자신을 저주했다.
7살짜리 어린아이가 생각할만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지금 상황도 아이에게 결코 일어날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같은 곳을 두 번이나 맞은 에디스는 결국 쓰라림에 눈물을 보였다.
이 상황에서도 에디스는 목소리를 힘겹게 참으며 끅끅거렸다.
“멍청이 같은 년. 넘어가는 건 이번뿐이다. 한번만 더 이런 걸 점수라고 받아오면 그 땐, 널 내 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다.”
드디어 축객령이 떨어지고 에디스는 눈물로 잘 보이지 않는 상태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지키던 기사는 달라진 에디스의 모습에 깜짝 놀라 그녀를 붙잡았다.
그들의 입장에서 절대 있을 수 없었지만, 이대로 이 상처 입은 아이를 보내기엔 그들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아까 황제에게 에디스의 입장을 고한 기사가 무릎을 꿇어 에디스와 눈높이를 맞혔다.
그리고 옆 기사가 물을 건네자 손수건에 물을 적셔 에디스의 뺨에 살짝 대었다.
“…많이 아프십니까?”
평소라면 괜찮다고, 그들을 안심시켰을 테지만, 오늘은 에디스도 심적으로 지쳐있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의 손길을 받았다.
기사들이 황녀 궁까지 데려다 준다고 했으나, 에디스는 혼자 돌아갈 수 있다며 이를 거절했다.
에디스의 거절에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을 어쩌지 못했지만, 황녀인 그녀가 괜찮다는 데, 그들은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황제 궁 앞까지 나가 에디스를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는 공손히 인사를 한 뒤 에디스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자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술 때문이지만 자기 아이를 때리다니. 환장하겠네.”
“그러게 말이야. 우리 황녀님이 때릴 때가 어디 있다고!”
“아직 노망날 나이는 아닌 듯 한데……”
“자기 딸도 그렇게 부어 오를 정도로 때리는 거, 자네도 봤잖아. 저게 노망이지, 뭐야.”
기사에게 물을 건네 준 기사는 손등으로 가볍게 옆의 기사에 입을 치며 매섭게 말했다.
“말 조심해. 궁 안에 귀가 얼마나 많은 지 알아?!”
에디스에게 손수건을 대주던 기사는 입을 삐쭉 내밀며 궁시렁거렸지만 정작 그의 대화 상대는 익숙한 듯 무시해버렸다.
그는 아직도 궁시렁거리는 제 친우이자 동료인 기사를 향해 이만 들어가자며 먼저 안으로 들어갔고, 또 다른 기사 또한 말을 멈추고 따라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