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사람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말에 휘둘린다.

아무리 심지가 굳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상대가 자신의 가족이라면 휘둘릴 수 밖에 없다.

예를 들면 엄마 같은,

보통 아주 가까운 사이의 사람이겠지.

그럼 우리는 왜 주변 사람의 말에 휘둘려야 할까?

왜?

어째서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게 하는 말도 아닌데 상처받아야 하고,

아파해야 하고,

속을 썩혀야 하는가.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아마 평생 이해할 수 없겠지.

옳지 않은 행동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행동에 충고 혹은 조언, 혹은 애정 어린 잔소리라는 이름으로 말이 붙는 것도,

그러한 말을 듣고 우리가 상처받는 것도.

내가 상처받지 않기에, 내가 잔소리를 하지 않기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저,

그저,

그저,

상처받고 싶지 않을 뿐이야.

아픈 게 싫어서,

아픈 사람을 지켜보는 게 싫어서,

그게 싫어서 괜스레 상처받는 원인을 파헤친다.

의미가 없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파헤친다.

가장 직접적인 예시는 자해가 있겠지.

자해가 바른 행동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미쳐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이 그른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럼 왜 내 주변인은 내가 자해를 하는 것에 대해 말을 얹는가?

몇몇은 자신이 보기 싫어서,

몇몇은 나를 걱정한다는 이유로,

몇몇은 위선.

나는 위선의 경우를 가장 숱하게 겪어왔고,

그 덕에 나는 내 자해를 웃으며 말하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물론,

자해를 통해 나 자신을 해학적으로 표현하는 것 또한 거리낌이 없다.

어차피 언제나 스스로는 비웃기 가장 좋은 대상이었고,

자기 자신을 칭찬한 적은 거의 존재하지 않으니. 그

래서 나는 진심인 사람들이 대하기 어렵다.

자기 자신도 아닌 주제에 나를 그렇게 걱정할 수 있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을뿐더러,

내가 함부로 상처 입혀도 좋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건 내게 위선으로 거짓을 표하는 사람은 내가 상처를 주어도 된다는 뜻으로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말을 덧붙이자면,

절대 그런 뜻은 아니다.

나는 상처 받기를 싫어하는 만큼,

상처 주기를 극도로 꺼리니까.

하지만 내게 진심인 사람들에게,

나도 진심이 된다.

위선인 사람들이 하는 자해를 하지 말라는 말은 웃어 넘기고 그만하지만,

진심인 사람들의 말에는 무심코 격하게 반응한다.

‘내게서 자해를 뺏으면 넌 날 어떻게 살릴 건데?’

라는 사춘기 청소년의 마음이 제대로 드러나 버리는 것이다.

하나 내게 자해는 생존의 수단이고, 숨을 쉴 수 있는 방법이고, 동시에 막히면 아득해지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내가 자해를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무슨 수로 이 역겨운 숨을 이어가야 하는지 도저히 생각나지 않으니.

그렇게 내가 공격적이고 방어적이게 반응하게 되면,

나를 걱정하던 사람은 상처받고, 동시에 날카로워진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럼 나는 상대가 상처받음에 아파하면서도, 더욱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는 모순에 휩싸이게 된다.

그렇게 상처 주고, 받고의 반복이 계속되다 보면,

나는 포기하게 된다.

나 자신을 지키는 것에.

그렇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거나,

스스로를 죽기 직전까지 내몰아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 발악한다.

그리고 이미 상처를 받은 상대와의 관계 회복은,

모두가 알다시피 그렇게 쉽지 않다.

근래에도 그런 일을 겪었고,

불행히도 나는 아직도 나를 걱정한 내 소중한 친구와 전보다 소원해진 상태이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으나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무의식 중에 친구를 불편해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상대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묻는 사람이 생긴다. 스스로가 문제인 것을 알고 있다면 고치면 되는 것 아니냐고.

아니다.

단언컨대 아니다.

첫째로, 상처 받았을 상대가 내게 품었을 수도 있는 반감을, 사람을 무서워하는 나는 무시하지 못한다.

둘째로, 나는 상대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죄책감을 무시하지 못한다. 언제나 스스로에게 각박한 나였으므로.

이 외에도 몇몇 개의 이유가 더 있으나, 설명할 수 있느냐 물으면 나는 기꺼이 아니라고 답하겠다.

나는 감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 들 정도로 멍청하지 않으므로.

단순한 자기 감정을 말로 풀어내 전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본론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도대체 왜 남의 말에 상처를 입어야 하는 것일까.

상처를 주는 것보다는 받는 게 편하다. 그것만은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상처를 입어도 좋다는 말은 아니리란 것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런 말이 있다.

‘모든 사람은 상처만 주다가 종국에는 죽는다’

누가 한 말인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어떤 옛날의 고지식한 사람,

우리가 대게 철학자라고 칭하는 이들 중 하나가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겠지, 하고 짐작할 뿐.

내가 이 말을 듣고, 혹은 읽고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왜 우리는 이렇게 만들어졌나, 였다.

대부분의 종교인은 신, 내지는 창조주를 믿는다.

그리고 열렬하게 신을 욕하는 사람으로써, 나 또한 창조주를 믿는다.

그렇기에 의문을 가지는 것이다.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않은 주제에 생명이라는 무거운 것을 만들어낸 이유와

그렇게 힘들게 만들어낸 존재가 왜 하필 상처만 주다가 죽는 존재여야 하는 것인지.

만들어지기를 원한 적은 없다.

당연한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이에게는 무언가를 바랄 자격이 없으니.

당연히 태어나기를 바란 적도 없고,

그러한 것을 바랄 자격도 없었다.

그렇지만 창조주는 지 멋대로 나를 만들었고,

내 부모님은 그것을 오로지 자신의 의지라 믿고 탄생시켰으니,

어느 쪽을 욕하기도 애매한 상황이라 곤란할 따름이다. 부모님을 욕하자니 천하의 패륜아가 되어 몰매 맞을 지경이고,

수많은 종교인을 함부로 척지면 내가 인생을 사는 것이 너무 순탄치 못하다.

그렇지만 나는 언젠가 꼭 그 대답을 듣고 말 것이다.

내가 상처 주는 존재로 태어난 이유와,

그런 나를 만든 이유를.

그것을 듣지 않는다면 태어난 것이 너무 억울할 것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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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7-15 12:40 | 조회 : 592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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