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랑 결혼하자.

*


" 에르빈초 다섯 잎, 쥬피톤 꼬리 하나
아리모라 결정 12g "

짙은 단풍잎 색의 책상에는 두꺼운 책과
마법진, 살짝 불에 그을린거같은 흔적이 빼곡했다.


" 음.. 라비노 눈알이 어디있지? "


그녀는 금을 녹여 만든거같은 황안을
두어번 굴리다. 한 쪽 벽면을 채운 서랍장을
정신없이 열고 닫기를 반복했다.


" 이건 모르닌 개구리 알이고
이건 르피론 돼지 눈알인데. "


그녀는 매끄럽게 절단되지 않아
힘줄과 근육 조직이 그대로 보이는
생물의 사지를 아무렇지 않게 확인했다.


" 아 여기있다."


거의 끝자락 서랍장에서 그녀는
새카만 직육면체의 상자를 꺼냈다.

그녀는 상자를 찾기위해
헤집어진 물건들을 대충 서랍장에 집어 넣었다.

그녀는 콧잔등을 타고 내려온
동글동글한 안경을 올린 뒤,
바닥에 널브러진 서적들을 발을 이용해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가 바닥에 능숙하게 그린 마법진 위에
준비한 재료를 차례대로 넣자 마법진을 그린
바닥은 마치 물처럼 일렁거렸다.

그녀는 연필꽂이에서
길쭉한 날이 달려있는 가위를 꺼냈다.
날이 얼마나 예리한지 가위가 아니라
둔기처럼 보였다.


" 그 다음은 자신의 머리칼. "


그녀는 머리 끝이 안쪽으로 쏙 말린
밝은 레몬색의 비단결같은 머리카락을 잡았다.

가위의 날카로운 날은 벨벳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을 순간 반사했고
그녀의 머리칼은 마법진 위로 툭 떨어졌다.


*

" 정말로 관둘건가? "


붉게 타오르는 태양을 삼킨거같은 적안에
거미줄 마냥 한올한올 반짝이는 은발.
거기에다가 잘 조화된 이목구비는
언제봐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 네 폐하. 그런데 언제봐도 잘생겼습니다? "


그의 우직해보이는 얼굴은 붉은 적안처럼
빨게졌다


" ㅆ..쓸데없는 소리..
..황족을 능멸하는데 재미가 들렸구나?! .. "


그는 꽤나 당황했는지
낮은 미성은 살짝 삑사리가 났다.


" 칭찬입니다. 폐하.
물론 재미가 있기도 하고요. "


딱 봐도 정적해보이는 그의 얼굴에
부끄러움이란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약간의 귀여운 구석이있었다.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나는 책꽂이에 잘 정리된 책을 꺼내
판판한 상자에 잘 넣었다.

그가 나를 무섭게 노려보아
나의 뒷통수는 따가웠지만
나는 애써 그의 시선을 무시했다.

그는 빨게진 얼굴을 그새 갈무리하고는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


" 수석 황실 마법사를 놓치는게
마음에 내키지 않아. "


나는 상관없다는듯이
어깨를 으쓱대며 양피지를 둘둘 말았다.


" 루시아, 인정받은 마법사에 황제를 보필하는
명예와 권력 모든것을 가진 네가
도대체 왜 떠나려는것인가? "


나는 그의 말에 각종 마법진이 그려진 종이를
정리하는것을 잠시 멈췄다


" 원래있던 곳으로 돌아가려고요. "


나는 고개를 떨궈 비릿한 표정을 숨겼다


" 가끔 난 네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


정말로 이해를 못하겠는지
그의 희멀건한 미간사이에는 주름이졌다.


" .. 자연인이 될겁니다. "


나는 억지로 삐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 하…? "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잔뜩 구겼다.


" 주름피세요. 폐하.
그렇게 인상쓰고 있으면 유리안이 싫어할걸요? "


나는 각종 물품으로
가득찬 상자에 손가락을 휘저으며
무게를 가볍게 해주는 마법을 걸었다.


" 넌 왜이렇게 나랑 유리안을 엮지 못해
안달이냐.. "


그는 팔장을 끼고는 벽에 기댔다.
그는 나의 질척거리는 엮음에 질려보였다.

주인공들인데 안 엮을 수가 없지.
나의 입술사이에는 피식 바람이 새어나왔다.

나는 그에게 나의 마법석으로
만든 투명한 레몬색 호루라기를
주머니에서 꺼내 던졌다.

그는 반사적으로 내가 던진 호루라기를
한손으로 잡고는 마법석을 이리조리
빛에 비추어 보았다.


" 이게 뭐냐? "


" 호루라기를 불면 자동적으로
저는 폐하께 소환됩니다. "


" 오호라.. 그거 좋은데? "


그의 적안은 호기심으로 빤짝였고
그의 입꼬리는 의미심장한 호선을 그렸다.


" 위험할때만 사용해주세요.
대신 쓸데없이 부르면 죽습니다. "


나는 주먹을 불끈쥐며 들어올려보았다.


" .. 알겠다. "


그는 작게 혀를 차면서 마지못해 대답했다.


" 그럼 폐하.. 아니 다노엘 잘 살아된다. "


나는 생긋 웃어보인후 짐과 함께
몸을 빙그르 돌려 문으로 향했다.


" 보..고싶을것이다. "

" 상사관계는 끝이여도 친우관계는 변함없는건
알고 있어라. "


무심하지만 애정이 느껴지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초승달처럼 눈을 곱게 접었다.


*


" 이제 르누아르의 심장만 있으면 끝인가 "

무인마차는 거친 바닥을 매끄럽게 달렸다.
나는 새벽녘의 한껏 가라앉은 촉촉한 공기를
가슴팍이 부풀어오를정도로 크게 들이마셨다.

조금 열린 마차 창문 틈으로는 손을 내밀자
서늘한 바람이 살결을 부드럽게 스쳤다.

구하기 어려울거같은 르누아르의 심장은
맨 마지막으로 미뤘지만 오지 않을것만 같았던
차례가 왔다.

르누아르의 심장은
악명높은 마탑주의 소유라는 사실에
그 순서를 뒤로 미뤄 둔 것인데

소설 속 아주 작은 비중을 차지했지만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 마탑주는
전쟁의 승리를 좌지우지 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거기에다가 포악하고 잔인한 면모는
강렬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 험난한 여정만 잘 버틴다면
원래 세계로 돌아 갈 수 있을지도 모르기에
충분히 감수 할만한 고난이었다.

재수없는 뺑소니 후 우연히 본 소설 속 인물에게 빙의.
만일 예전의 내가 이 이야기를 들었으면
허무맹랑한 헛소리라고 실컷 비웃었을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꿈같은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될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난 여기서 이러고 있을때가 아닌데.

새로운 삶, 새로운 환경, 새로운 나는
확실히 전의 나보다 좋았다.
하나밖에 없는 공작가문의 딸에다가
서브여자주인공이기에 나쁘지 않은 설정이었다.
마음같아서는 모든것을 잊고 다시 시작하고싶었지만


" 내가 어떻게 잊고 살아.. "


나는 자조적인 미소를 자아냈다


*


대륙중 가장 높은 산맥이자
악명 높은 마탑주의 본거지인 오르만 지역.

작은 생명 하나 없을거같은
꽁꽁 언 삭막한 땅.

마법을 이용하지 않았더라면 오는데
꼬박 3달이 걸렸을것이다.

마차에 내리자마자 살을 파고드는
살벌한 바람에 똑 자른 머리칼은 거칠게 흩날렸다.
바람이 어찌나 센지 서있기 조차 버거울 정도였다.
나는 추운 기후를 대비하여 사온
털 코트를 더욱 여미었다.

역시 악명높은 마탑이라는 말에 걸맞게
외관상만으로도 엄청난 흑마법의 마나가
흘러나왔다.

탑 중간에 구름이 거칠정도로
높은 탑이 거친 바람을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모습이 신기했다.

나는 커다랗고 단단해보이는 마탑의
철문을 두드렸다.

이윽고 나의 키의 두배는 되어보이는
견고한 문은 끼익 소리를 내며 저절로 열렸다.

나는 탑에 안에 발을 디뎠다.

물씬 느껴지는 흑마법의 마나에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소름이 쫙 끼쳤다.
머리털이 쭈뼛쭈뼛 서는 느낌은 썩 좋지않았다.

탑 내부에는 벽을 타며 빙글빙글 도는 계단이있었고
그 중간은 뻥 뚫려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면서 내부를 구경할 때
꾀꼬리처럼 높고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


" 무슨일로 오셨습니까? "


기껏해야 댓여섯살 된거같은 남자아이는
홀연히 나타났다. 생기도는 연두색 녹발에
짙은 녹안이 숲속의 요정처럼 앙증맞았다.


" 마탑주와 만나고싶은데요. "

" 마탑주님께서는 지금 바쁘세요. "

아직 젓살이 미처 다 빠지지 못해
포동포동한 귀여운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단호하게 말했다.

" 영혼을 판다해도 만나주시지 않으실건가요? "

나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 그럼 이리 오시죠. "

남자아이는 나의말에 텅빈 마탑 중간지점으로
나를 이끌었다.

남자아이는 두눈을 감고 주문을 외우자
나와 남자아이의 몸은 붕 떠 땅에서 발이 떨어졌고
천천히 부상했다.

의외로 평범하게 가는가 싶은 그 순간
눈 깜짝하게 빠른 속도로 부상했다.

어찌나 빠른지 볼살이 흔들리는게 느껴질정도였다.


" 헉..허.. "

" 너..무한거 아닙니까? "


닿지 않을것만 같았던 바닥에 드디어 발이 닿았다.
나는 놀란 마음을 쓸며
차마 쉬지 못한 숨을 몰아쉬었다.


" 원래 계단으로 올라오는건데
마법을 이용해 올라왔으니 다행이라 생각하세요. "


뭐? 계단?..그 끝이 보이지도 않았던
계단을 말하는것인가?
남자아이의 진지한 표정을 보니 농담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아마 저 계단을 올라올려면 밤낮없이
올라가야 될거같았다.
이렇게 보면 남의 고통을 지켜보는것을
마탑주는 굉장히 좋아하는거같았다.

상또라이라는 사실은 알고있었지만
새삼 느껴지는 똘끼에 말을 잃었다.

그런 인간에게서 르누아르의 심장을 가져올 수 있을까
아직 마탑주의 얼굴을 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긴장감에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복잡하게 얿힌 복도를 지나 은색의 문 앞에
도착했다.

남자아이는 언제 사라졌는지 나를 여기까지
안내해주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나는 긴장감으로 축축하게 젖은 손을 매만졌다.
입술은 마치 빠짝빠짝 마른 꽃잎같았다.
마른 입술을 혀로 한번 쓸었다.

숨이 턱턱 막혀와 나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금색 문고리를 비틀었다.


*


" 저기 마탑주님 손님을 앉혀놓고
아무말씀 없이 쳐다보면 부담스러운데요. "

긴장으로 축축해진 손은 이미 말라버린후였다.

긴장과 초조함이 무색하게 나를 꿰뚫어보는것같은
그의 녹안은 뻘쭘할 뿐이었다.
그의 시선은 아예 얼굴이 뚫을 지경이었다.

나는 애꿎은 뺨만 긁적였다.

아까전 귀여운 남자아이와 비슷한 녹안에
녹발이었지만 그의 이목구비는
앙증맞기보다는 날렵했다.

높고 곧은 콧대에 잡티 하나없는 피부
에메랄드처럼 영롱하고도 그윽한 녹안
늑대처럼 잘빠진 그는 잘생겼다.

다노엘만큼 잘생긴사람은 본적이 없었는데
다노엘보다는 아니지만 대적할 수 있을거 같았다.

얼굴은 고사하고 이 악명높은 마탑주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나의 말에도 불구하고 한참을 쳐다보더니
영원히 열지 않을것 같았던 입을 열었다.


" 그래, 영혼을 판다했지? "

" 그래서 원하는게 뭔데 "


그는 한쪽 팔꿈치를 푹신한 크림색 소파에 얹고는
턱을 괴었다. 딱봐도 오만하고 거만스러워 보이는
그의 모습에 나의 눈썹이 잠시 꿈틀댔다.


" 제가 여기서 지낼 수 있게해주세요. "

" 호오.. 영혼을 판다는거 치고는 소소한군. "


소소한건가? 아니 아마도 미친것이다.
어느 누가 미쳤다고 악명높은 마탑에 산다 할까?
르누아르의 심장 아니였으면
평생 궁금하지도 보지도 않았을것이다.

악명 높은 그와의 첫 대담은 다시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엄습해오는 불길함은 심장을 움켜쥐었지만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척
더욱 꼿꼿하게 허리를 세웠다.


" 그러면 영혼 팔지 말고 …
여기서 사는 방법이 있는데 "


" 그게 뭔데요? "


악랄한 마탑주가 아무런 대가 없이
조건을 들어준다? 납득할 수 없는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 가끔 나랑 사랑도 속삭이고
몸도 섞으면 돼 "


턱을 괴고 오만한 자세를 하고 있던 그는
어느사이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노래하듯 속삭이는 그의 미성이
귀를 간지럽혔다.

순간 나의 귀를 의심할법한 이야기를
늘여놓길래 나는 정말로 정말로
내가 잘 못 들은줄 알았다.


" ..뭐라고요? 마탑주님? "


" 나랑 결혼하자 "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나의 생각을
부정하는듯 그는 실실거리며 쐐기를 박았다.


2
이번 화 신고 2019-03-18 22:25 | 조회 : 859 목록
작가의 말
De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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