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일 나누기 일, 나머지 영

55. 일 나누기 일, 나머지 영




“내일은 조용하게 진행될 거야. 그걸 원하셨으니까. 알지?”
“응.”
“그리고 할 이야기 있어.”


새벽녘이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서연이 말하는 ‘할 이야기’를 듣지 못할 수도 있었기에 서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언지를 들었으니 마음의 준비는 해두었다.

또한, 바깥에서 우느라 기운이 빠졌지만 아까 연서와 이야기하면서 재충전했기에 이야기 들을 체력은 됐다.


“방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서연이 먼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아가 따라 일어났고, 저쪽에 있던 사운이 서연을 향해 걸어왔다.


“아, 서아랑 둘이서만 할 이야기라.”
“둘이서만?”
“사운 씨 여기서 기다려줘.”


서연은 사운이 끼는 것을 원치 않았다. 서아 딴에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일단 서연과 서아 둘만의 일임은 틀림없었으니 타인이 끼어드는 건 바라지 않았다.

사운은 몸을 돌려 반대쪽으로 걸어갔고, 가일은 저쪽 벽에 기대 서아에게 힘내라 해주었다.


“힘 내. 파이팅!”
“고마워요.”


비록 붕어처럼 입으로만 벙긋벙긋 주고받는 말이었지만 그래도 마냥 좋았다. 홀로 고독한 싸움을 이어갈 때보다 훨씬 더 힘이 되었다.

서연을 따라 들어간 방은 가족들만을 위해 뒤쪽에 위치한 작은 방이었다. 서연과 서아가 모두 밖에 나가 있었기에 방은 어두운 상태였다. 먼저 들어간 서연이 스위치를 켜자 그제야 밝아졌다.


“이쯤에서 이야기하자.”


서연은 몹시 피로한 얼굴로 중간쯤에 앉았다. 장례식 치르랴, 회사 업무 처리하랴 정신이 없는 이틀 동안 꽤 지쳐보였다.

서아는 묵묵히 서연과 마주보고 앉았다. 그러자 서연이 작은 목소리로 먼저 말을 꺼냈다.


“넌 아무것도 모를 거야.”
“뭘.”
“내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내가 어떤 말을 들었는지 그런 거 하나도 모르지?”


거의 속삭이다시피 작은 서연의 목소리에 서아는 바싹 긴장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응. 몰라.”
“…….”


우선 솔직하기로 했다. 몇 년 만일지 모르는 단 둘만의 대면에서 솔직해야만 했다.


“말해줘. 그거 말하려고 부른 거잖아.”


서아가 결심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강하게 말했다. 모르는 게 있다면 알고 싶었다. 이유 모를 원망에 이유라도 찾고 싶었다.

곧 잠시 뜸을 들이던 서연이 입을 달싹였다.


“너도 어느 정도는 알 테니 어디서부터 말할까?”


어떤 주제라고 말하지 않아도 안다. 과거가 된 이야기. 아마도 서연은 서아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연은 서아가 어디까지 아는지 모를 것이다. 때문에 서아가 궁금한 부분을 짚을 필요가 있었다.


“그때 방에서 무슨 이야기했어?”
“빼빼로 그 날?”


서아가 묻자 서연도 알아먹은 듯 바로 그 날을 짚었다. 그 날 문틈 너머로 들렸던 대화는 무엇이었을까. 그 날 이후로 180도 변한 서연의 행동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면 알아야 했다.

서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서연이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빠랑 싸웠어. 너한테 회사를 물려주겠다고 하셔서.”
“뭐? 고작 회사 가지고 싶어서 지금까지 그런 거야?”


회사 하나 차지하고 싶어서 그 어린 나이부터 지금까지 이 상황을 만들어 놓은 것이냐며 서아가 서연을 다그쳤다. 설마 했는데, 정말 탐욕이 화를 부른 것일까. 그런 사람이었나, 어렸을 때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목소리 낮춰. 결론부터라고 했잖아. 그리고 고작 회사라니.”
“그럼 뭔데.”
“나한테는 고작이 아니야.”


서아에게 회사는 그저 욕망 덩어리에 불과했다. 돈과 돈이 오가고, 권력과 권력이 오가는 곳이었다.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라 이성으로만 부딪히며 살아야 하는 곳이었다. 딱딱하고 사무적인 분위기 속에서 빵 굽는 냄새 하나 나지 않은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서연은 아니었다. 그녀에게 회사는 차마 무시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나한테 회사는 내가 알아야 하지만 나는 알 수 없던 나의 전부야.”


서연에게 회사는 엄청난 가치를 지녔다. 지난 시간 동안 고작해야 인터넷 검색이나 신문 기사 스크랩으로만 접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이었다.


“회사는 나한테 엄마나 다름없어.”


그랬다. 누구도 말해주지 않던 서연의 어머니, 더 나아가 그녀의 외가를 알 수 있는 곳이었다.


“난 여태 믿었던 엄마가 친엄마가 아니라는 거에 꽤 충격이 컸어.”
“그랬을 거라고 생각은 했어.”


서연이 울컥했는지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서아는 마음이 흔들렸지만, 꾹 참고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 뒤로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내가 차별받는 거 같더라? 언니라고 동생한테 다 양보하라고 하는 것도 사실 친자식이 아니니까 그러는 것 같고.”
“…….”
“정말 하루하루가 무섭고 지옥 같았어.”


서연은 어렵게 한 마디 한 마디를 이어갔다. 차라리 성인이 돼서 알았다면 어땠을까. 지금보다 나은 상황이었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서연은 매우 어렸다. 그녀에게 닥친 갑작스러운 사건은 너무나도 크게 다가왔다.


“그래서 그 날 나한테 동생 아니라고 한 거야?”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니었어. 서러움에 나도 모르게 터졌더라고.”
“그래도 그렇지.”


그래도 그 날 정말 상처 받았었다. 많이 아팠다.


“그래서 그 날 아빠가 나한테 소리 지르시더라고. 하.”


서연이 잠시 휴지를 뽑아 눈물을 닦았다. 서아는 목 너머로 올라오는 울컥함을 겨우 삼키고 꾹 참았다.


“사실 그 날 회사 이야기 말고 우리 엄마 이야기도 했었는데.”


회사의 업무를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하는 만능이라던 서연의 어머니. 서아가 아는 건 인터넷 기사나 신문 기사에 기록된 게 전부였지만, 그마저도 존경심이 느껴지던 서연의 어머니였다.


“아빠가 말해주셨어?”
“아니, 내가 물어봤어. 엄마 어떤 사람인지 지금 어디에 묻힌 건지 그런 거 다.”


서연의 목소리에서 코맹맹이 소리가 났다. 그러자 서연이 고개를 돌리고 휴지로 코를 닦았다. 그 사이에도 서아는 바싹 긴장했다. 뭐라고 대답해주셨을까.


“아빠가 뭐라고 하신 줄 알아? 지금 엄마가 충분히 잘해주니까 궁금해 하지 말래.”
“아빠가 정말 그랬단 말이야?”


설령 그 말이 서연과 서아, 서아의 어머니 모두를 위한 말이었다고 해도 서연에게 상처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어떻게든 알고 싶은 어머니의 마지막 흔적까지도 연관 검색어에 뜨지 않게 하면서까지 알아내지 못하게 했다.

괜히 서연과 서아 사이의 우애를 깨뜨리기라도 할까봐 우려하는 마음에 내뱉은 ‘숨김’은 더 큰 눈덩이를 몰고 왔다.


“그러던 중에 회사를 너한테 물려줄 거라 하시더라?”
“대체 왜?”
“그 회사가 원래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는 나한테.”


서연의 얼굴은 비장했다. 그리고 서아는 혼란스러웠다. 회사가 자신에게 물려질 거라는 분위기를 느낀 적은 있어 짐작은 해보았지만 이렇게 서연에게 대놓고 들으니 달랐다.


“어렸을 때부터 너 천재 아니냔 소리 들었잖아.”


어렸을 때부터 뛰어나서 사람들에게 종종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고 한 서아였다. 그녀가 가일에게 ‘나 똑똑하다.’라고 했던 말들이 그저 하는 말은 아니었다. 천재까지는 아니라도 모든 걸 빠르고 정확하게 받아들였고, 하나를 가르치면 그와 관련된 열 가지를 질문할 수 있을 정도는 됐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엄마가 원하셨어. 어른의 눈으로 보였겠지. 내가 언젠가부터 널 전처럼 대하지 못하는 걸.”
“응.”
“그래서 엄마가 그러셨대. 회사를 나한테 주면 내가 널 버릴 거 같다고.”
“그런…….”
“그럴 바엔 너한테 주는 게 낫다고 생각하셨을 거야. 너라면 날 버리진 않을 테니까.”


물론 아주 빗나간 추측은 아니었다. 친자매가 아니라도 해도 서연은 서아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언니였기에 관계가 회복될 거라고 여길 만했다.


“엄마, 아빠라면 그렇게 생각하셨을 수도 있겠지만.”
“나도 이해해. 근데 거기에 내 입장은 없잖아.”


아예 이해를 못할 추측은 아니었지만, 너무나도 단순한 생각이었을 뿐이다. 오랫동안 끙끙거리고 혼자서 앓아왔던 서연의 마음이 하나도 고려되지 않은 그 말들 때문에 도리어 그녀는 상처를 받았다. 빠르게도 온 사춘기를 겪으면서 반항심은 더욱 심해졌고, 그래서 더욱 아프고 불안했다.


“난 그래서 네가 싫었어. 빼빼로 따위나 내밀면서 미안하다고 우는 것도, 나에게 없는 친엄마를 가진 것도, 노력하지 않아도 회사를 물려받을 수 있는 것도 다 싫었어.”


마침내 서연이 고백했다. 하지만 서아는 화가 났다.


“그래서 그동안 나한테 그런 거야?”

잘못한 게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머리가 좋은 것? 어렸지만 언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


“네 잘못 아닌 거 알아. 근데 그거랑 별개로 난 네가 정말 미치도록 싫었어.”
“하. 언니.”
“사실 차라리 네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을 정도로 싫었어.”


서연의 목소리가 처음보다 훨씬 많이 떨렸다. 서아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그러면 내가 회사를 포기할 거라는 생각은 안 했어?”


서아는 흥분했다. 더는 참고 듣고 싶지 않았다.


“언니도 나한테 말해볼 생각 안 했잖아!”


그래서 크게 소리쳤다. 차라리 그때 사실대로 말을 해줬다면 서아는 이렇게까지 서연을 미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미움을 받는 동안 얼마나 힘들고 아팠는지 아마 모를 것이다.


“안 해본 거 아니야. 근데 넌 부모님이 원하면 해낼 거잖아. 능력도 있으니까.”
“하.”


서아가 짧게 헛웃음쳤다. 물론 온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종종 회사 경영법에 대해 들려주는 아빠의 이야기가 흥미로웠고, 곁에서 흐뭇하게 웃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좋았다. 그걸 계속 유지해갈 수 있다면 서아는 충분히 회사를 운영하기 위해 노력을 했을 아이였다. 설령 그곳이 답답하고 사무적인 곳이라 하더라도.


“능력치랑 별개잖아! 나한테 말을 해줬어야지! 나한테도 물어봐 줬어야지!”


세차게 떨리는 목소리와 울먹거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억울했다.


“그럼 나는 뭘 할 수 있는데? 네가 만약 회사 물려받고 싶다는 결정을 내리면 그땐 나더러 어쩌라고?”


서연도 격하게 반박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모두의 기대주가 된 서아의 결정만을 기다리라니. 또 언제 바뀔지도 모르는 결정에 모든 것을 걸라니.


“나한테 유리한 게 너보다 먼저 사회에 나가는 거밖에 없잖아.”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서아는 서연의 말이 이해가 되면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믿지 않았다고 해야 맞을까 아니면 믿지 못했다고 해야 맞을까. 어느 것이라고 해도 결론은 서연이 서아를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엄마한테 그런 거야?”
“너와 내가 싸우면 내 편이 될 수 없는 사람이잖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 서연의 목소리도 떨렸다. 하지만 서아가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쓸 상태는 아니었다.


“그래도 한 번은 믿어보지 그랬어?”


한번쯤은 믿어볼 수도 있었을 텐데. 서아는 목구멍 너머로 차오르는 서러움에 왈칵 눈물이 났다.


“이제서야 나한테 이걸 말해주는 이유가 뭐야?”


차라리 몰랐다면 실컷 욕하고 실컷 원망하고 인연이 끊겨도 돌아보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야속하게도 서연은 이 모든 일이 이제야 서아에게 전했다. 아버지의 장례식 둘째 날 밤에.


“물어볼 게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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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10-18 15:24 | 조회 : 52 목록
작가의 말
다채하

55화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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