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일 나누기 일, 몫은 일

50. 일 나누기 일, 몫은 일


“저 되게 이상한 꿈 꿨어요.”
“무슨 꿈인데?”


작은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 그 사이로 반찬을 놓던 서아가 갑자기 불현듯 생각난 꿈에 대해 말했다. 그에 딸기에 물을 주고 있던 가일이 뒤돌아 그녀에게 집중했다.


“그러니까 막 내 일 같으면서도 내 일이 아닌 거 같은 그런 꿈이랄까요?”
“뭐야, 그게.”


애매모호한 대답을 하는 서아에 가일은 살짝 김이 빠졌다.

꿈이라는 건 원래 꾸는 거지만, 자고 나서 기억을 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자신이 꾸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꾸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더라도 정확한 상황이나 말보다는 뜬구름 같은 분위기만 기억하는 게 대부분이다.


“어쨌거나 잘은 모르지만 꿈이라는 게 원래 그렇지 않나?”
“그렇긴 하죠. 엄청 생생했는데.”


서아는 지난 밤 어떤 꿈을 꾸었는지 생각이 나진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그걸 기억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애써 상기시키려고 했다.


“관련된 거 하나도 기억 안 나?”
“분위기 같은 것만 알 것 같은데.”


가일은 꿈을 꾸지 않는 P부대이기에 꿈이라는 것이 마냥 신비롭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잊히는 게 당연한 그것의 느낌을 생생하게 기억한다는 점이 매우 생소했다.


“정황 상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꿈이었던 거 같아요.”


한참을 생각하던 서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꿈을 꾸었다고 했는데 막상 생각해보니 말하지 않은 게 더 나은 흉몽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별로 좋은 꿈은 아니었네.”
“그렇죠? 역시.”
“잊어버려.”


그런 악몽은 깨기 전에, 아니 깨면서라도 잊는 게 심신에 좋다. 예지몽이네 자각몽이네 하며 꿈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들도 있지만, 자신을 괴롭게 하는 거라면 그냥 잊는 게 제일 좋다.

아무리 자신을 힘들게 해도 쉽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담긴 기억보다 꾸고 나서 어느 순간이 되면 자연스레 잊히는 꿈은 비교적 쉽게 없앨 수 있을 테니까.


“그러는 게 마음 편해.”


심장을 불타게 했던 순간도, 얼음조각 같았던 순간도 모두 꿈이었다면 좋았을 거라 말하는 이유도 쉽게 잊을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는 따스해 보이지 않는 순간들을 가벼이 떨칠 수 있는 꿈이길 원한다.


“그냥. 뭔가. 신기했던 건 그 순간에 제가 저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한 거 같아요.”


본인이 꾼 꿈이지만 본인도 의아한지 서아의 목소리는 마치 우스갯소리를 하는 것처럼 웃음기가 넘쳤다.

좋지 않은 꿈인 건 뒤로 하고, 그냥 신기했다.


“그냥 개꿈이네.”
“개꿈이요? 와, 그런 말도 알아요?”


가일이 서아가 푼 밥을 식탁 위에 옮겨두고 수저를 놓으며 ‘개꿈’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자 서아가 반찬을 들고 오며 신기한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개꿈을 아는 P부대라니. 저기압은 모르면서 개꿈은 알다니.


“몰라. 우리 밥 먹고 나서 빵도 먹을까?”
“아니 언제는 뭐 안 먹는다면서.”
“근데?”
“그 분 어디 가셨나 해서요.”


밥을 앞에 두고 빵 타령이라니. 적어도 가일이 말하는 P부대들의 음식에 빵이 없는 것은 분명했다. 서아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가일은 ‘호기심’이라고 둔갑시킨 칭찬을 서아에게 던졌다.


“맛있잖아. 네가 만든 빵.”
“그 말 처음엔 되게 기분 좋았는데 요새는 진정성을 의심하게 돼요.”


서아는 툴툴거리며 가일을 한 번 흘깃 보더니 이내 숟가락을 집어 들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가일도 마주 보고 웃더니 숟가락을 들었다.


“이따 밥 다 먹고 같이 빵 만들래요?”


어차피 빵 만드는 연습을 좀 더 하고 싶었던 서아이기에 가일에게 함께 만들어보자고 권했다. 그녀에게는 함께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니까.


“아, 그래! 우리 그러면 하얀 밀가루 사용하자!”
“푸핫.”


서아가 웃었다. 진짜 양심 좀 있어 봐라. 당당하게 재료까지 요구하다니, 가일이 조그마한 어린 꼬맹이였다면 머리를 꽁하고 때려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해맑게 좋아하는 게 좀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밀가루 원래 하얀색이거든요. 제가 뭐 독약이라도 타서 검게 변할까 봐 걱정이세요?”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사실 가일과 서아가 만난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처음에는 무척 어색했고 낯설었지만, 지금은 룸메이트가 한 명 생긴 것 같았다. 하지만 좋아하기 때문에 분명히 의식하기도 했다.

지난 번 마트에서 묘하게 어색하긴 했지만, 돌아오는 길에 가일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지금은 마냥 좋았다.

은근히 투닥거리는 아침이 조금씩 익숙해졌다. 서아는 가일이 눈치를 보며 빵을 찾는 아침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서 뭉그적거리던 아침보다 훨씬 좋았다.


“P부대님 지금 하라는 복수 방법은 갈구하지도 않고 재산 축내는 건 아시죠?”
“모르겠는데.”
“말을 말자.”


좋아하지만 불편하지 않는 게 좋았다. 가끔 삐딱하게 구는 어린 아이 같기도 했지만, 여전히 비밀이 많아서 답답하기도 했지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뭐, 그녀가 무기를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확 딸기 맛 쌍쌍바를 몇 박스로 대량구매할지도 몰라요.”
“알겠어. 복수는 뭐 오늘이라도 가능한데.”


구시렁거리면서도 서아는 어떤 빵을 만들어볼지 생각했다. 말은 불만을 쏟아내고 있지만, 가일이 빵을 먹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봐도 봐도 계속.


‘아아. 아니야. 이러면 안 돼. 욕심 부리지 말자.’


서아가 의식의 흐름으로 행복까지 다다른 자신을 자책했다. 과한 욕심은 결국 화를 부르기 마련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일에 많은 걸 바라지 않아야 한다. 지금처럼 잔잔하게, 그저 이 정도만이라도 좋았다.

서아가 다 먹은 밥그릇을 들고 설거지하는 동안, 가일은 유리조각을 꺼내 들고 서아의 프로필에 빵을 잘 만드는 착한 성품을 지녔다는 사실을 기록했다.


“맨날 이러면 좋겠다.”
“와아- 맨날 빵 만들고 싶어?”


서아가 주방 세재를 짜며 읊조리는데, 가일이 가까이 다가와서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서아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실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그녀의 휴대폰 벨소리가 오랜만에 제 구실을 하며 울리다보니 다소 요란스럽게 느껴졌다.


“잠깐만요.”
“어, 그래.”


서아가 가일을 지나쳐 휴대폰 액정을 확인했다.


“박사운?”


서아는 액정에 뜬 ‘박사운’이라는 이름을 보더니, 휴대폰을 뒤집어 요란하던 벨소리를 죽였다.
툴툴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행복하고 평화로워 만족하고 있던 아침을 이런 소음으로 인해 엉망으로 만들고 싶진 않았다.


“왜 안 받아?”
“그럴 필요 없어서요. 뭐하면 문자를 하겠죠. 갑자기 웬 전화.”


서아가 불만을 터트렸다. 맨날 문자로 통보하더니 뜬금없이 전화질인지.
서아가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거실에 던져두고 부엌으로 들어왔다.


“빨리 빵 만들어요.”


분위기를 바꾸고 싶지 않았다. 계속 평화로운 아침 그대로 가고 싶었다. 서아가 선반에서 밀가루 봉지를 꺼내자, 가일이 서아 뒤에 서 있다가 재빨리 팔을 뻗어 밀가루를 받았다.


“야, 이 무거운 걸 왜 선반에 올려놨어.”
“아.”


가일은 아무렇지 않게 밀가루 봉투를 받아 내렸지만, 그 덕분에 서아는 가일의 팔 안에 쏙 들어왔다.


“저, 저기.”


의도치 못하게 가일의 팔 사이에 끼어 진퇴양난의 상황에 직면한 서아의 볼이 바람직하게 새빨개졌다.

그러나 가일은 밀가루 봉투를 양 손으로 붙잡고 놓지 않았다. 한 손이라도 놓아야 서아가 빠져 나갈 수 있을 텐데.


“P, P부대님.”


얼굴이 새빨갈 것을 느껴지는 열로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에 차마 뒤를 돌아볼 수가 없는 서아가 작은 소리로 가일을 부르기만 했다. 하지만 가일은 아무런 답이 없었다.


“저, 저기요. P부대님 저기.”


서아도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횡설수설이었다. 아니, 목표가 밀가루 봉투를 내려두는 거였으면 이미 이룬 것일 텐데 대체 왜 이 미묘하고도 간지러운 자세를 계속 취하고 있는 것인가.


“아.”
“네?”
“아, 미안.”


서아가 살짝 몸을 움직이자, 그제야 가일은 정신이 들었는지 황급히 팔을 풀고 사과했다.


“잠깐 딴 생각하느라.”
“그, 그런 거 같더라고요. 하하.”


그 잠깐 딴 생각 때문에 아주 짧은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던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서아는 그저 손부채질만 할 뿐이었다.

혼자 의식하고 혼자 설레고 있다니. 차라리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얼른 들어가서 얼굴에 열기를 빼고 나타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서아가 부단히 고개를 숙이며 가일의 시선을 피하고 있는데 때마침 휴대폰 벨소리가 크게 울렸다.


“전화!”


서아가 도망칠 곳이 생겨 기쁜지 곧바로 달려갔다. 그러나 액정에 뜬 이름은 ‘서연 언니’였다.


“아.”


순간 망설였다. 아까 박사운의 전화에 이어 서연의 전화라니.


“받아봐야 하지 않을까?”


서아가 망설이는데 가일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권했다. 서아가 흔들리는 눈으로 가일을 한 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받아봐야 할 것이다. 서로의 번호를 가지고 있지만, 서로 연락하는 것을 매우 꺼려했던 자매이기에 액정에 뜬 서연의 번호는 서아에게 긴장감을 주기 충분했다.


“여보세요.”


침을 꿀꺽 삼키며 받은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건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서아가 정말 듣고 싶지 않았지만, 들어야만 하는 말이었다. 아무리 밀어내려고 해도 절대로 밀어낼 수 없는 말이었고, 꿈이라고 치부하고 잊으려 해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말이었다.

유난히 요란하게 울렸던 벨소리가 이 거대한 사건을 알리기 위한 것처럼 그 무시무시한 말은 그녀의 가슴을 찢으며 쿵하고 내려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아직 전화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서아의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 표정은 이미 딱딱하게 얼어있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가일이 그녀에게 말을 걸어보았지만, 그녀의 시선은 허공만을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왜 그러냐니까?”
“아.”


통화 종료된 휴대폰을 쥔 손을 천천히 내리며 서아는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휴대폰이 그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툭하는 소리를 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눈동자를 굴려 하얀 벽만을 응시하던 그녀가 어깨를 붙잡는 그를 보더니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가일은 갑자기 우는 서아에 적잖게 당황했다. 그러나 물어볼 수 있는 건 무슨 일이냐는 게 다였다.


“어떡해요. 진짜 어떡해요.”


서아가 울먹거리며 어떻게 하냐는 말만 반복했다.


“아빠가 많이 위독하신가 봐요. 지금 당장 병원으로 오래요.”


서아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고장 난 시계처럼 울기만 했다. 위독하다는 뜻이, 그래서 당장 병원으로 오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았다. 머리로는 잘 아는데 그래서 빨리 가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가일이 서아의 손을 잡았다.


“가자. 빨리 가야지.”


가일은 주저앉아 있는 서아의 팔을 끌어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같이 가 줄게.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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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9-16 21:30 | 조회 : 77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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