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일 나누기 일, 몫은 일

44. 일 나누기 일, 몫은 일




“아, 이런.”




살짝 침울하게 변한 분위기 속에서 묵묵히 빵을 먹으며 애매한 미소만 짓던 가일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아가 어리둥절하게 올려다보자, 그는 그녀를 향해 산뜻한 미소를 한번 날려주고는 말했다.




“지금 밖에 나갔다가 와야 할 것 같아.”




가일은 P부대라 제 역할만 수행하면 되기 때문에 홀로 밖에 나가야 할 일이 많지 않을 것이다. 서아는 가일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며 그의 뒷모습에 물었다.




“어디 가는 데요?”




그러자 가일은 뒤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정의 구현하러.”




정의 구현? 가일의 말에 더욱 어리둥절해진 서아가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자, 가일이 뒤를 휙 돌아보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몇 분이면 돼. 대신 절대 바깥으로 나오지 마.”




가일의 단호한 말에 서아는 궁금하면서도 그대로 수긍한 채 자리에 앉았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갑자기 나갈 일이 생겼다는 것일까.




“후아. 뭐야, 또 말 안 해주네.”




서아는 뚱하게 입술을 쭉 내밀었다. 괜스레 질투가 났다. 뭐 딱히 대상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잠시 그냥 나가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참았다.



얼마 전에 연서가 소개팅이니 어쩌니 하며 서아를 불러냈을 때, 서아도 가일에게 따라오지 말라는 말을 했고 그는 들어주었다.

서아의 입장에서는 가일이 그녀를 따라오지 않았으니 말을 들어준 셈이다.



그러니 이번에는 서아가 가일의 말을 들어줄 차례일 것이다.




“별 일 아니겠지.”




서아는 홀로 주문을 외듯 중얼거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







가일은 서아에게 손을 흔들고 현관을 나섰다.

그러면서 표정이 싸하게 바뀌었다.




“무슨 일이야?”

“쿡. 매번 이렇게나 반응이 크다니까. 귀여워.”




가일은 현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 서 팔짱을 끼었다.

그 옆에 오늘도 여전히 새빨간 드레스를 차려 입은 세이나가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너무 귀엽잖아. 딱 내 취향.”




세이나는 검지손가락을 가일의 얼굴에 쭉 뻗었다.

자줏빛으로 물든 세이나의 손톱이 가일의 볼에 닿기 전에 그가 먼저 그녀의 손을 탁 쳐냈다.




“수석으로서 필요한 최소한의 감시만 해.”

“이렇게까지 크게 티낼 필요 없잖아.”




가일의 차가운 반응에 세이나는 익숙한 듯 담담하게 반응했다.




“네가 짓고 있는 그 해괴한 표정이 마음에 안 들었어.”




가일은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드러냈다.

서아와 나누는 대화를 엿들으며 벽에 느슨하게 기대 서 있던 세이나의 표정, 거기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어머, 그래? 난 그 분위기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들었거든.”




세이나가 뒤틀린 미소를 지으며 가일의 말을 맞받아쳤다.

수석의 감시는 P부대가 알게 모르게 스쳐지나가듯이 해야 하는 것이다.

세이나처럼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면서 ‘내가 수석이니 널 찾아왔다.’는 사실을 티내면 안 된다.




“원래 감시를 이렇게 막나가게 하는 건가?”




가일이 불만을 드러냈다.

세이나가 명백히 규칙을 어기고 있으니까.




“어떤 P부대가 아무렇게나 막나가고 있으니까?”




세이나도 팽팽하게 맞섰다. 가일이 규칙을 어길 것만 같으니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가일과 세이나 사이에는 선명한 불꽃이 튀었다.




“원래 수석들의 감시가 P부대에 대한 사적인 불만에서 시작되는 건가?”

“사적인 불만? 하!”




불꽃은 화르르 튀다가 결국 불만과 짜증이 왕창 섞이며 타올랐다.

세이나는 제대로 따지기 위해 벼르고 온 것 같았다.




“난 이렇게 별 것도 아닌 인간 하나가 우리 관계에 끼어들 줄은 몰랐지!”

“혼자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설을 쓰는 거야.”




세이나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가일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세이나의 목소리는 아무리 커도 가일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겠지만, 가일은 다르다.



지금 이곳은 서아의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현관 바로 앞, 딸기 꽃의 영향이 미칠 법한 범위이다.

그렇다면 가일의 목소리는 다른 이들에게 들릴 것이다.



어쩌면 서아에게도. 그건 별로였다.




“소설? 참나.”




세이나는 코웃음 치며 가일의 말을 비꼬았다.




“웃기고 있네. 뭐, 이딴 삼각관계가 다 있어? 거지같아. 상당히 불쾌해.”




세이나가 혼자 열불이 난 듯 속사포로 말을 내뱉었고, 그 안에는 종종 욕도 섞여 있었다. 가일은 그런 세이나를 어이없게 쳐다보다 고개를 돌리고 한숨을 쉬었다.




“그게 내 알 바야?”




다시 세이나에게 시선을 쏜 가일은 팔짱을 풀고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인상을 찌푸린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세이나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네 재미없는 소설에서 나는 빼. 삼각이든 몇 각이든 난 불쾌하니까.”




짝사랑도 짝사랑 나름이지. 상대가 원치 않는데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며 망상에 허우적거리는 소설 속에 등장시키는 게 상당히 불쾌했다.

세이나의 망상은 끝이 날 낌새가 없어 보였으니까.




“널 왜 빼! 그럼 나랑 저 인간이랑 둘이서 하라고? 그건 내가 싫거든!”




봐, 이렇게. 세이나는 감정에 앞서 있었다.




“내가 그런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니잖아. 이제 그만 정신 차리라고.”

“무슨 말이야?”

“네 헛소리, 끝없는 착각 다 거부하겠다는 거야.”

“그럼 내 마음은? 네가 왜 참견이야!”




상대방의 말이 끝나마자 마치 준비라도 해둔 것처럼 다음 할 말이 터져 나왔다.

손과 말, 주먹과 발차기 등이 오가지 않고 말로만 싸우는 게 오히려 대견해보일 정도로 분위기가 팽팽하게 험악해졌다.




“그리고 뭐 헛소리? 내가 지금 하는 말이 다 헛소리로 들려?”

“삼각이니 뭐니 따지고 자빠진 게 헛소리가 아니라고?”

“하! 좋아. 근데 그건 알아야지. 너 이러면 나락으로 당장 직행할 텐데. 안 그래?”




‘나락’이라는 단어에 가일의 표정이 묘하게 구겨졌다.

세이나는 가일에게 경고하듯 쏘아대고는 그의 표정을 찬찬히 살피며 이겼다는 생각에 씨익 웃었다.



말실수? 막말?

그런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단지 가일의 반응을 보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단단히 경고할 겸 내뱉은 말이었다.




“나락이라니. 무서운 소리하네. 내가 나락에 갈 이유가 뭐가 있어?”




가일은 구겨졌던 표정을 포커페이스로 바꾸었다.

나락 같은 끔찍한 소리를 누군가 내뱉은 다면 보통의 이들은 저주를 퍼붓는다며 욕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일만큼은 큰 소리칠 수 없었다.



오히려 떨리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담담한 척 말했다.

그래서 그는 찰나의 구겨짐을 얼른 포커페이스로 회복하고 침착하게 남의 일인 것처럼 굴어야 했다.

하지만 세이나의 눈은 답지 않게 어설픈 발연기를 펼치는 그의 틈을 정확하게 보았다.




“이유? 글쎄. 무섭지 않을까? 너라면 말이야.”




이번 말다툼의 승자는 확실히 세이나일 것이다. 그걸 인지한 그녀가 싸하게 웃으며 가일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지금 그 말 무슨 의미야?”

“무슨 의미일까?”




세이나는 잘 물고 놓지 않은 자신의 미끼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그녀는 충분히 자신감이 넘쳤다.




“너 뭐야?”




가일이 겨우겨우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물었다.




“뭐긴 뭐야. 난 겪은 건 무시 못 하니 너라면 나락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무섭겠다고 생각한 거지.”

“뭐?”

“솔직히 벌벌 떨 줄 알았는데 그 정도는 아니네.”




가일이 입술을 꽉 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절에도 나락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존재했다. 무시무시한 곳이라고 배웠으니까.



얼마 정도 지나서 한 때는 ‘나락’이라는 고작 두 음절의 단어에 벌벌 떨기도 했다.
직접 겪었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그때보다 조금 덜할 뿐이지 두려움이 온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겪었던 고통을 알고 있으니까.



세이나의 말마따나 겪은 게 있는 그니까. 그래서 그는 나락이라는 말만 들어도 무서웠다.

그걸 애써 감추려고 했지만, 세이나가 그 짧은 순간의 움찔거림을 놓칠 리 없었다.




“누가 그러디?”




그러나 문제가 있다면 가일의 나락 시절에 견습도 아니었던 세이나가 짧은 시간 내에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냐는 것이다.




“누가 그런 말했어!”




워낙 커다란 사건이긴 했지만, 지금까지 끄집어내서 말할 만큼 악마계의 안주거리로 쓰이지는 않았다. 자연스레 점점 잊히게 되었다.



그런데 세이나가 그걸 알고 있다니 이건 필시 누군가 귀띔을 해준 게 아니고서야 알아내기 어렵다.

설령 알아냈다고 해도 그 당사자가 가일이라는 사실은 더욱 알 수 없다. 실명을 밝히지 않은 사건이었으니까.




“누가 그런 말을 했느냐가 중요해?”




가일이 두 눈을 부릅뜨고 매섭게 물었지만, 세이나는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이미 오고가는 말싸움에서 어느 정도 넘어온 승리의 깃발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주눅일 이유가 없었다.




“네 반응을 보아하니 그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인 것 같네.”




마침내 세이나가 승리의 깃발을 뽑았다. 가일은 아뿔사 하는 마음에 입을 다물었다.




“카현.”




세이나는 선심 쓰듯 빨간 입술을 벌렸다 오므리면서 가일이 그토록 싫어하는 이름을 뱉어내고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의 이름에 머릿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가일이었지만, 겨우 누르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좋아. 어디까지 뭘 들었어?”

“조금 들은 거뿐이라.”




가일은 큰 소리로 말하면 세이나가 대답하지 않을 거란 생각에 끓어오르는 마음을 꾹꾹 눌렀다.

가슴 속이 답답하긴 했지만, 침을 삼키고 호흡을 일정하게 조절하며 참았다.




“후.”




그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자, 세이나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표정을 바꾸었다. 그녀에겐 이제 여유가 있었다.




“좀 슬프네.”




세이나의 말에 가일이 눈동자를 굴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세이나는 여전히 부담스러운 빨간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고 눈을 깜빡 깜빡하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하는 거야?”

“생각해보니까 내가 너 좋아하는데 너무 괴롭히는 거 같아서.”




방금 막 깨달았다는 듯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세이나가 가일은 어이없었다.

계속 삼각관계네 어쩌네 하면서 티를 내도 싸그리 무시했는데 결국은.




“야! 내가 너 좋아한다니까?”




가일은 매번 말을 끊고, 매번 고개를 돌렸다. 그

래서 천하의 아리따운 세이나라도 그에게 마땅히 ‘고백’을 해 볼 찬란한 분위기를 잡기 어려웠다. 그래서 냉큼 질렀다.



좁디좁은 마당이 마음에서 대뜸 고백할 생각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분위기를 포기한다고 해도 여유는 세이나에게 있었으니까.




“좋아한다고.”




분명 여유가 있었는데 간절하게 좋아한다는 말을 전하는 순간, 정말 이상하게도 여유가 사라졌다. 손에 넣었던 승리의 깃발을 도로 돌려준 것만 같았다.


항상 좋아한다는 말을 할 생각이 있었는데, 딱히 성급한 것 같지도 않은데 가슴이 떨렸다.
분명 가일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도 아는데 그랬다.


그 순간은 너무나도 낯선, 타인인 것만 같은 세이나가 가일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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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8-03 14:04 | 조회 : 104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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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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