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일 나누기 일, 몫은 일

43. 일 나누기 일, 몫은 일




“그럼 이런 거 못 얻어먹을 거 아냐.”




남의 기억을 지울 수 있는 능력이 P부대에게 있을까?
가일은 빵을 베어 먹으며 웃었다. 서아는 그런 그의 농담 반 진담 반 답변을 신뢰하지 못했다.


왠지 가일은 서아의 말을 한 쪽으로 듣고 대충 대답하고 한쪽 귀를 흘리는 것 같았다.




“내 빵에 반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말인 거 같은데요.”

“반했다라……? 그거 되게 중의적인 말이네.”




온전히 빵에 정신을 놓은 채 아무 말이나 생각나는 대로 뱉는 거 아닌 가 싶었는데 갑자기 가일의 얼굴이 매우 진지해졌다.




“문맥에 따라 이해하면 그리 중의적인 말도 아니죠.”

“그래, 그러네.”




서아의 논리적인 말에 가일은 가만히 수긍했다.




“뭐, 어쨌든 지금은 식사시간이니. 얻어먹을 수 있게 된 빵을 감사하게 먹을게.”

“네. 그러세요.”




뭔가 좀 허전한 것 같은데. 빠진 것 같기도 하고.

그가 다시 빵을 뜯고 있을 때서야 서아는 그가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대화를 삼천포로 빠지게 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런.




“잠깐. 말 바꾸지 말고요.”

“들켰네.”

“기억을 지우는 능력이 정말 있어요?”

“없어.”




이번에는 확실하게 답했다.


그러자 서아는 살짝 안심했다. 만약 정말 기억을 지우는 능력이 있다면 바로 게임 오버가 아닌가.


안도한 서아는 곧바로 다시 제 주제로 복귀했다.




“그러면 사장님께 남자친구라고 속인 거 어떻게 할 거예요? 괜히 이 문제로 자꾸 집착하게 되는 것 같은데.”




뒷말이 목 너머로 끌려 내려갔다.

아예 흑심이 없지는 않아서 과감하게 꺼낼 수가 없었다.




“이건 다 제가 사람 사이의 믿음을 중요하게 여겨서 그런 거예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좀.”




괜히 흑심을 들키고 싶지 않아 쓸데없는 부연 설명까지 추가했다.

그러자 가일은 뜯은 빵 한 조각을 서아 입에 넣으며 말을 중단시켰다.




“내가 예전에 말했잖아. 자고 일어나면 어느 순간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그리고는 작게 읊조렸다. 아프다면 아플 말. 분명 그랬었다.

인간이라는 한계 때문에 인간이 아닌 가일을 기억하는 건 그저 한 순간에 그칠 것이다.



어느 순간 아무것도 없던 것처럼 잊으면 모든 게 해결이 될 테지만, 많이 허전할 것이다. 시작조차 못한 미련일 것이다.




“알아요. 알지만.”




박사운이 유학을 간다고 떠났을 때 기다리는 게 너무나 힘들어서 정말 많이 울었다.

그리고 서연에게 사운이 한국에 있다는 말을 듣고 나서 그를 만나러 간 하루가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서럽게 울었다.




“알고 있는데.”




하지만 지금은 ‘헤어짐’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더 이상 ‘박사운’이 아니다. 눈앞에 있는 ‘가일’이다.



가일은 사장이 그를 기억하지 못할 거라 말하는 것이겠지만, 서아는 자신에게 대입했다. 그래서 말을 잇지 못했다.




“야아. 왜 그래. 내가 뭐 실수했어?”




그저 눈에 고인 눈물이 뚝하고 떨어졌다. 중력에 반하지도 못한 채, 숨기지도 못한 채 바닥으로 직행했다.



차라리 이 상황을 ‘빵 먹다가 이게 웬 개쪽.’ 정도로 여길 수 있다면 좋겠다. 하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고 있다.




‘의식이나 설렘을 넘어선 그 이상의 감정이네.’




그녀는 그를 좋아한다.


그는 그렇지 않겠지만, 적어도 그녀는 그를 좋아한다. 많이 좋아한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을 이별의 상황에 대입하고 나서 드는 감정이 이런 불안정한 거라면 더는 부정할 수 없다.


눈앞에 있는 가일은 서아에게 단순히 의식하는 존재, 설렘을 주는 존재만으로 끝을 낼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역시 나…좋아하고 있었네.”




머릿속을 멋대로 떠돌던 비눗방울도, 소복소복 쌓이던 노란 꽃잎들도, 그리고 방금 들었던 그 감정을 ‘좋아한다.’가 아니면 다른 그 어느 것으로도 완벽히 설명할 수가 없다.



이제는 안다. 서아는 가일을 좋아한다.



아니라고 외면하고 외면하다가 끝에 부딪혀서야 제 마음을 들여다보게 된 서아는 떨리는 눈으로 가일을 쳐다보았다.




“뭘 좋아한다는 거야?”




가일의 말투는 어딘가 모르게 퉁명스러웠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서아는 김이 팍 샜다.




“설마 그 사장?”




상당히 모호한 표정으로 ‘사장’을 언급한 가일은 불신의 눈으로 서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딱 들켰다는 표정이네.”




서아는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일은 그걸 긍정으로 받아들인 건지 제 생각이 맞았다고 확신했다.



하. 이건 또 무슨 어이없는 소리람?




“그러면 이해가 되네. 내가 남자친구라고 해서 곤란한 거구나.”

“네?”

“너 그 사장 좋아하지? 하긴 그 사장도 괜찮아 보이긴 하던데.”




가만히 두면 엉터리 소설 작가로 데뷔할 기세였다.


구미호가 인간이랑 해피엔딩이었나 같은 엄한 생각을 했던 시간들이 다 무용지물이었다.
그건 주연들의 이야기지, 가일이 이렇게 작가를 도맡아 하려고 나설 줄은 몰랐다.



서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불과 몇 초 전에 그녀는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런데 정작 눈앞에 있는 가일은 그녀가 뜬금없이 등장한 주연의 조력자 정도의 포지션일 사장을 좋아하는 거라고 확신했다.



좋아하는 건 맞는 말이지만, 목적어는 상당히 다르단 말이다.

계속 의아함을 가지며 이상하게만 느끼다, 이제야 깨달았는데 정작 당사자는 헛다리나 짚고 있었다.




“사장님 동안이시긴 하지만, 이미 결혼하셨습니다만?”

“아, 그래?”




기대치가 갑자기 쑥 낮아진 서아는 살짝 어이가 없음을 드러내기 위해 삐딱하게 대꾸했다.

그런 서아의 표정 변화를 눈치 챈 걸까 가일은 수긍하더니 잠시 말이 없었다.



혼자 뭔가를 생각하는 낌새였다.

서아는 혹시라도 가일이 제 마음을 알아차렸을까봐 고개를 숙이고 애꿎은 빵만 조각냈다.




“결혼까지 한 거면 롤모델 정도로만 좋아하는 게 낫지 않을까? 아, 물론 그게 마음대로…….”




와. 서아는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몹시 한탄하거나 탄식할 때 나온다는 그 탄성.

이건 거의 눈치 말아먹어서 고구마를 목이 막혀도 목구멍에 박아 넣는 수준 아닌가.




“사장님 안 좋아하거든요!”




사이다까진 아니더라도 탄산이 필요한 순간이다.

서아가 답답한 속을 긁어내듯 가일에게 쏘았다. 고백을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 좋아한다는 오해는 받고 싶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당황한 가일이 순간 놀랐다가 서아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뭘 좋아한다는…….”

“알아서 뭐하게요.”




어차피 눈치 밥 말아먹었으면서. 말하면 알긴 알아?




“말 안 해줄 거예요.”




절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겨우 알아챈 마음이라고 해도 누군가에게 말할 생각은 추오도 없다.

함께 지내면서 정이 들었고, 정말 인간 대 인간인 것처럼 지내오고 있지만 실체는 그게 아니니까.



첫 만남은 저승사자와 인간이었고, 두 번째 만남은 P부대와 인간이다.



춘향과 몽룡은 신분을 넘어선 사랑을 했다지만, 이건 그런 것과는 애초에 근본부터가 다르다.

넘을 수 없는 벽이기에 가히 신분제 사회에서의 신분 차이를 극복하는 것보다 더 어렵고 불가능한 일이었다.




“뭐야. 사람이야 아니면 먹을 거야? 빵 말하는 건가.”




입을 꾹 다문 서아에 가일은 계속 헛다리만 짚었다.

괜히 그런 그가 야속해서 마음이 아프긴 했지만, 이게 서아로서는 최선의 방안이었다.



그래도 상대를 봐가면서 끌고 와야 어느 정도 포장을 하든 말든 하지.
이미 결혼한 사장을 상대로 데려오는 건 뭐란 말인가.



서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돌렸다.

여전히 가일은 좋아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말하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서아의 심장이 쿵하고 울렸다.




“혹시 나?”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를 요란하게 찔렀다. 그 짧은 사이에 티가 났던가.

왠지 조금 기뻐 보이는 가일의 해맑은 얼굴은 서아의 눈에 비친 망상이 더해진 것이겠지.




“뭐야, 왜 말 못해?”




묵직하게 심장을 공격한 돌직구에 띵했던 서아는 애써 이성을 잡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그, 그럼요. P부대님 정말 좋은 분이시잖아요. 친절하고.”

“그래?”




서아는 당혹스러움이 잔뜩 묻어난 대답이 어리숙하게 느껴졌다.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대한 갑작스러운 답변이라 어색하기만 했다.



가일은 눈치도 없이 씩 웃었다. 그래도 제 칭찬이라고 기분이 나쁘진 않나 보다.




“너도 좋은 애야. 착하고 성실하고. 빵도 잘 만들잖아.”




칭찬 주고받기인가.

가일은 빵을 잘 만든다는 말을 하며 서아쪽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러니까 갑자기 왜 운 건지 잘 모르겠지만, 넌 좋은 애니까 괜찮을 거야.”




좋아하는 이를 단순히 좋은 분이라고 말하는 게 마냥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일의 어린 위로에 서아는 싱긋 웃어보였다. 그래, 이런 거라도 좋다.




“그리고 사장과 관련된 것은…….”




가일은 말을 잇지 않고 잠시 머뭇거렸다.

서아가 두 눈을 깜빡이며 의아하게 쳐다볼 때야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잘못이네.”




가일은 사장에게 자신이 서아의 남자친구라고 소개한 점에 대해 미안함을 표했다.




“내 잘못이긴 한데 그래도 네가 해야 할 거야.”




그럼에도 가일의 말은 굉장히 단단했다.




“네가 날 잊으면 돼.”




묵직한 돌직구에 이어 묵직한 돌멩이가 가슴에 내려앉았다.

기억에서 무언가를 일부러 잊으려 하는 것은 빵을 물어뜯는 것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만 가일은 간단하게 표현했다.




“아.”




서아는 가일의 잊으라는 말을 조금 전 깨달은 자신의 마음에 대한 답처럼 느껴졌다.
감정이 혼자 롤러코스터라도 타는 것처럼 좋았다가 나빴다가를 사정없이 반복했다.




“안 사라지면요?”




잊지 못하면, 잊을 수가 없으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박사운도 처음엔 잊지 못할 것 같았는데 잊은 것처럼 가일도 그렇게 될까.




“지금도 그러잖아요.”




지금도 마음속에 있는데. 서아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물었다.




“음. 그러게. 나도 신기해.”




가일은 담담하게 웃었다. 아쉬워하는 감도, 좋아하는 감도 전혀 읽히지 않는다.

그저 그 놈의 빵만 베어 물었다. 그저 그의 시선은 부엌 선반에 놓인 딸기 꽃에 닿아 있었다.



둘의 마음에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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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7-29 01:02 | 조회 : 110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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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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