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일 나누기 일은 일

41. 일 나누기 일은 일




‘제가 죽을 뻔했을 때 살려주신 아주 고마운 분이세요.’라고 아주 건전하고 올바르게 가일을 소개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 진실한 말들은 서아의 입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그대로 다시 목구멍 아래로 봉인되었다.




“어이구나! 그러셨구나!”





사장은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아주 행복한 얽굴로 가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예. 처음 뵙겠습니다.”





가일은 사장의 손을 자연스럽게 맞잡으며 악수를 나누었다.




“어어.”




서아만이 홀로 동떨어진 사람처럼 서 있었다.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서아의 귓가를 간질인 말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했던 ‘남자친구’였다.


남자친구라고?

서아가 제 귀를 의심하며 가일을 쳐다보니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사장과 마저 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다.




“이거 참. 들어오시죠.”




서아의 남자친구라는 말에 왜인지 급 에너지가 넘친 사장이 그 두꺼운 손으로 가일의 어깨를 두드렸다.

밀가루를 반죽한 경험으로 다져진 사장의 두툼한 손바닥이 땀방울이 적신 가일의 어깨와 겹쳤다.




“예. 사장님 이야기는 서아한테 많이 들었어요. 고마우신 분이라고.”




가일은 순식간에 솔로인 사람을 커플로 만들어버린 것치고는 굉장히 담담하고, 어쩌면 조금 뻔뻔하게 악수도 나누고 말도 나누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서아의 머릿속에 있던 비눗방울들이 하나둘씩 톡톡 터져갔다.


흩날리던 노란 꽃잎들도 조금씩 속도를 늦추며 사뿐히 바닥에 쌓였다.




‘또 이런 상상이 내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재생되네.’




서아는 여전히 당황한 상태로 그 자리에 멀뚱하게 서 있었다.

그러나 사장과 가일은 원래 친한 사이였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빵을 나누어 먹으며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좀 드시죠. 하하. 우리 서아가 외로움을 많이 타죠?”

“아, 예.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만, 이제 제가 있으니까요.”




뭐야. 뭔. 없지 않아 있는 건 또 뭔데.

서아는 이상한 대화를 얼빠진 얼굴로 들었다.




“이야! 멋있는 분이시네. 우리 서아한테 이런 남자친구라니. 내가 다 기쁘구만.”

“저도 이런 분이 사장님이라니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정답게 앉아 있는 둘을 보고 있자니.

이건 마치 학부모 방문의 날을 맞이하여 담임선생님과 부모님이 만나 대화를 나누는 모습 같았다.




“그런데 이 늦은 시간에 데이트를?”




사장이 즐겁게 담소를 나누다 문득 뒤에 있는 서아를 한 번 바라보더니, 가일에게 슬쩍 물었다. 사실 저게 궁금한 건가.




“아뇨. 데이트는 주말에 해야죠. 오늘은 시간이 늦어서 데려다주려고 왔습니다.”




가일은 어찌나 예의가 바른지 높임말을 제대로 사용하며 어른들이 좋아할 법한 말만 해댔다.




“허허. 남자친구분 정말 듬직하시네. 안 그래도 밤길 홀로 걸어갈 서아가 걱정됐는데.”




역시나 사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진심으로 좋아했다.




“제가 잘 데려다줄 테니 걱정 마셔도 됩니다.”

“우리 서아 좀 잘 지켜줘요. 애가 정도 많은데.”

“제가 지켜줘야죠.”




사장과 가일의 쿵짝이 아주 잘 맞았다.

서아는 그동안 가일이 왜 여태까지 자신에게 발연기한다고 비웃었는지 이해가 갔다.

그는 거짓말을 아주 능숙하게 사실처럼 말하고 있었다.

정말 어딘가에서 전문적으로 배우기라도 한 것처럼 연기했다.




“저, 저기.”




서아는 우선 커질 대로 커진 이 일이 더 커지는 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가일의 팔을 끌어당기며 나섰다.




“사장님, 저 오늘은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아이구. 내가 시간을 빼앗았네. 미안해!”




사장이 황급히 시계를 확인하더니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그럼 사장님,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래요. 우리 다음에 또 봅시다.”




가야겠다고 요청한 건 서아인데 정작 사장은 가일을 보고 인사했다.

그에 가일은 다음을 기약하기까지 했다.




“아, 서아야. 이거 챙겨가야지.”

“아 맞다. 감사합니다.”




사장이 서아를 부른 건 빵을 챙겨가지 않아서, 단지 그거였다.

가일과는 하하호호 인사도 하면서. 서아는 살짝 서운할 뻔했지만, 그래도 빵을 주신 것에 감사했다.




“예, 그럼 다음에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서아가 사장에게서 빵을 건네받자, 가일이 완벽한 연기를 위해 서아의 팔을 당겨 팔짱을 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서아가 들고 있던 빵을 남아서 놀고 있는 반대쪽 손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친절과 정이 넘치는 사장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가게 문을 열고 나왔다.




“하아.”




가게 문을 나서자 서아는 바로 한숨을 내쉬었다. 가일은 그런 서아를 바라보다 픽 웃더니 팔짱을 풀고 손에 깍지를 꼈다.


서아가 깜짝 놀라며 가일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심장이 급격하게 쿵쿵댔고, 온 몸이 긴장했다.




“가게 유리문이잖아.”




가일은 싱긋 웃으며 먼저 성큼성큼 걸었다.

서아가 반 박자 늦게 가일을 따랐다. 둘은 코너가 도는 지점에 이르러 서아가 먼저 손을 놓아서야 떨어졌다.




“P부대님! 이게 뭐예요?”




서아는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해 다짜고짜 따졌다.




“그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선택지였어.”




가장 적합하다니.

대체 어느 부분이 적합했다는 것인가. 사장에게 거짓말만 잔뜩 해놓고 나온 것을.




“대체 어떤 부분이?”




어떤 점에서 가장 적합하냐는 듯 따지는 서아였지만, 가일은 그저 웃기만 했다. 그의 웃음을 보아하니, 어물쩍 넘어갈 생각인 듯했다.




“지금 상황을 모면하려고만 하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몰라. 어차피 너도 말 못하고 있었잖아.”




생명의 은인이라고 분명히 말하려는 시도를 했다.

첫 글자 말했는데 그 목소리가 너무나 작았던 건지 가일의 목소리의 파급력이 너무나 컸던 건지.




“하아. 다음엔 어쩌실 거예요? 사장님이랑 다음에 만나자고 기약해놓고.”




그 상황을 모면하려고만 했으면 다음을 기약하지나 말든지.

그리고 정말 그런 거라면 비눗방울을 터뜨리지나 말든지.

이래놓고 나 몰라라 하면 곤란해지는 건 오로지 서아의 몫이었다.




“아, 그러면 그때마다 남자친구할게.”

“그때마다?”




그때마다 남자친구 행세를 하기 위해 딸기 맛 음식을 먹고 인간인 척하겠다니.

의식하는 상대가 남자친구 행세를 하겠다는 건 당사자로 하여금 굉장히 설레는 일이었지만, 이 경우는 조금 달랐다.



전혀 설레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지만, 그때마다 딸기 맛 음식을 먹는 수고로움을 더하려 한다니.

차라리 사장에게는 헤어졌다고 말하고 가일은 P부대인 상태로 있는 게 백 번 나았다.




“그냥 얼마 후에 헤어졌다고 할게요.”

“음. 그때마다가 불만이야?”




하지만 가일은 서아의 생각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설레는 바다로 빠졌다.




“그럼 맨날. 매일매일 남자친구라고 해도 돼.”




이미 자정을 향해 가고 있는 늦은 시간.

가로등 하나가 켜져 더 으슥해진 골목길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나란히 걸어갔다.
설렘을 한 아름 안고서.











*










눈이 부실 정도로 깨끗하고 밝은 궁전에 샛노란 링을 머리 위에 단 천사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발목까지 모두 가릴 정도로 길고 누구의 손도 닿은 적 없는 것처럼 새하얀 드레스가 인상적이었다.



그녀 주위를 맴돌고 있는 작은 빛들은 마치 별을 따다 놓은 것처럼 어여뻤다.




“어머나, 오셨어요?”

“오랜만이야.”




천사에게 다가온 소녀가 그녀의 날개를 보듬으며 웃었다.
자그마한 소녀의 웃음은 곧 전염돼 천사의 온화한 미소를 이끌어냈다.




“그동안 뭐하고 지내셨나요?”

“잤어. 피로했거든.”




피곤해서 잤다는 천사의 말에 소녀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러자 천사도 미소로 화답했다. 천사와 소녀는 대화하며 조금씩 궁전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크리스탈, 내가 없는 동안 별 일은 없었어?”

“그럼요.”

“다행이네.”




크리스탈의 말에 천사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피아노 반주 같은 은은한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곧 한쪽에서 다른 소녀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드디어 오셨네요, 리아님!”

“왜 이제야 오셨어요.”

“그동안 뭐하셨어요.”

“보고 싶었어요!”

“저희 안 보고 싶으셨어요?”





소녀들이 앞을 다투며 천사, 아니 리아에게 말을 걸었다.

리아는 그저 웃으며 몸을 낮춰 소녀들의 머리를 한 명 한 명 쓰다듬어주었다.



저보다 작은 소녀들 사이에 둘러싸여 웃던 리아에게 크리스탈이 유리조각 하나를 내밀었다.




투명한 유리조각 위에 검은 글씨로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




“말씀하신 거 찾아두었습니다. 여기.”

“어머, 고마워요.”




크리스탈에게서 유리조각을 건네받은 리아가 어제까지보다 더 환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오랜 시간 떨어져 있던 아쉬움을 인사로 달랜 소녀들은 리아에게 전해진 유리조각을 보고 제각각의 위치로 자리를 옮겼다.



눈치껏 돌아간 소녀들 덕분에 홀로 남은 리아는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가며 유리조각을 꼼꼼하게 훑었다.




“하여간 정말…….”




유리조각을 훑어보는 내내 리아는 때로는 비소를 흘리기도 했고, 때로는 인상을 쓰기도 했다.

내용을 모두 읽은 리아가 유리조각을 자신의 둥근 탁자 위에 올려두고 책상으로 향했다.



누군가가 매일 청소한 것처럼 깨끗한 책상 위에는 떠날 때처럼 책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주변을 쓱 훑어보던 리아가 책장 한 쪽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넘겼다.

그리고 한 페이지에서 손을 멈추었다.




“아, 여기쯤이었던가?”




노란 빛깔로 테두리가 장식된 페이지 한 쪽에는 ‘천사계’가 적혀 있었고, 다른 한 쪽에는 ‘악마계’가 적혀 있었다.

리아의 시선이 고정된 페이지는 자신이 위치한 천사계가 아닌 악마계였다.




견습부터 저승사자, P부대와 수석, 사신, 그리고 마지막 악마에 이르기까지 악마계의 등급이 모두 적혀 있었다.




“아, 여기 있네.”




손가락으로 글자 하나하나 짚어가며 읽던 리아는 P부대에서 멈칫했다.

그리고 사신이 적힌 부분까지 손가락으로 쭉 문질렀다. 그러자 그 부분이 형광색으로 칠한 것처럼 표시되었다.



만족한 리아는 둥근 탁자에 올려두었던 유리조각을 가져와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았다.




“어디 보자. 계산을 좀 해 봐야 될 것 같은데. 아마도 내 예상대로라면.”




이 한마디를 하고는 다시 유리조각을 내려놓고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번에는 천사계가 적힌 페이지를 유심히 읽었다.

그리고는 옆에 놓인 여분의 유리조각 위에 두 줄로 숫자를 써내려갔다.




“역시.”




리아의 눈매가 날카롭게 빛이 났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빛이 리아의 몸을 둘러쌌다.

그녀 주위를 맴돌고 있던 마치 별처럼 보이는 빛이 빠르게 움직이며 별무리를 만들어냈다.



그러자 순수하게 새하얀 옷으로 몸을 칭칭 감고 있던 리아가 어린 아이마냥 웃었다.




“우습긴. 진짜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야.”




그녀의 미소에 화답하듯 머리 위의 노란 링이 밝은 빛을 내며 반짝였다.

인간들의 상상 속에서 악마와 대비되는 천사인 그녀가 오랜 시간 동안의 잠에서 깨어나 활동을 재개하는 순간이다.




“너무 오래 걸렸네. 이번에는 제대로 결판이 났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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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7-18 22:23 | 조회 : 121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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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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