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의 마왕님 17화

용사의 마왕님 17화

부제 : 우중충한 날



항상 누군가 기분 좋은 손길로 내 머리카락을 정리해준다. 잠에서 깨어나면 가장 먼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날 보고 있는 마왕이 보인다. 늘 나의 아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날이 우주충해서 그런가, 내 옆엔 아무도 없었다. 요새 바빠 보이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바쁜가. 일어나자마자 못 본건 아쉽지만, 아침 식사 땐 볼 수 있으니까.

바빠도 식사 자리에는 꼭 참석하는 마왕이었지만, 아침 식사 때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내 옆에 나타날 테니까.

어느새 어주충했던 밖은 비가 내려 금방 어둠이 찾아왔다.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전부 읽지 못한 책을 읽고 있었다. 어느새 두꺼웠던 책을 다 읽어버렸다.

"태일."
"아, 윈더."
"날이 안 좋긴 하지만 둘이서만 산책이라도 할래?"

비 오는 날에 산책이라, 나름 괜찮겠다. 책도 슬슬 지겹기도 하고, 저번에 인간계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한 것도 물어보고 싶었으니까.

"좋아. 가자."

방을 나가자 평소와 다른 윈더의 분위기는 지금이라도 에리샤와 함께 가자고 그러고 싶을 정도로 이상했다. 윈더는 점점 인적이 드문, 아니 아예 없는 곳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윈더, 잠깐! 대체 어딜 가는 거야."
"잠시만 자고 있어."
"윈..."

윈더는 알 수 없는 가루를 나를 향해 뿌렸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미처 피하지 못한 나는 그대로 가루를 맞았다. 가루를 맞고 나니 이상하게도 힘이 풀리고 졸음이 찾아와 눈이 감겼다.

"누님! 태일은 제가 데려온다고 그랬잖아요."
"뭐가 불만이야. 아, 설마 내가 너로 변해서 용사를 납치해서 불만인 거야? 진짜 그런 거야?"
"그런 게 아니라!"
"그럼 됐네. 다치지 않게 잘 데려왔잖아."
"그래도 이건 아니죠. 전하께서 저에게 맡기신 일이기도 하고 누님이 쓰신 그 가루는 인간들에게 치명적일 수..."
"그래. 말 잘했다. 전하 인내심을 몰라서 그러는 거야?"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돼요, 누님."

누군가 싸우는 목소리. 그들 중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어디서 많이 들었.. 윈더다. 윈더랑 누가 싸우는 거지.

"깨어났으면 일어나."
"누가 깨어났다는 겁니까. 태일이라면 아직도.."
"....원더.."

깨어난 나와 눈을 마주친 윈더는 내 시선을 피하고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한다. 그 순간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와 깨어난 날 보며 환한 미소를 짓는다.

"일어났네요?"
"누구신데."
"'스칼렛' 제국의 황태자, 알렉스 란 아트젠트라고 합니다. 그리고 당신을 납치한 사람이기도 하고."

지금 이 사람 자기 입으로 날 납치했다고.. 너무 당당해서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알렉스라는 남자가 침대에 앉아 있는 나에게 다가와 침대 턱에 앉자 윈더와 같이 있던 여자는 방에서 나갔다. 알렉스는 방에 단둘이 있다는 걸 확인한 후, 침대에 올라와 내 앞에 앉는다.

"비켜."
"어딜 가려고요?"
"어디긴, 당연히 세이에게..!"

그 순간 알렉스는 내 턱을 잡아 올려 내 얼굴을 지그시 보며 말했다.

"포기하세요. 힘들게 납치 해왔는데 쉽게 놔줄리도 없고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당신이 무척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의 시선은 꼭 뱀이 내 몸을 감고 올라오는 듯해 등골이 오싹해졌다. 나도 모르게 알렉스에게 움칠렸다. 알렉스는 검은 내 머리카락을 만지다가 짧게 입맞춤을 하고 떨어진다.

"미친놈.."
"고마워요. 참, 얌전히 있으면 산책 정도는 허락해줄게요."
"시끄러워. 당장 날 세이에게 데려다줘."

계속 웃고 있던 알렉스는 내 말에 미소가 사라지며 날 눕혔다. 한순간에 알렉스 아래에 깔린 나는 당황해 동공이 흔들렸다.

"뭐, 뭐하는.."
"조용히 있어. 그놈의 세이, 세이.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아, 그래. 당신이 말하는 세이를 죽이면 얌전히 있으려나?"
"너.. 지금.. 뭐라고 했.."
"아, 미안해요. 놀랬죠? 그러니까 내 심기를 건들지 말아줘요. 그럼 친절하게 대해줄테니까. 물론 죽일 일도 없고."

알렉스는 다시 웃으며 나에게 벗어나 침대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힘들테니까 푹 쉬세요. 내일 봐요."

알렉스는 마왕과 똑같이 내 이마에 입맞춤을 한 뒤, 방을 나섰다. 알렉스가 나갔던 방은 달칵 - 소리와 들려왔다. 누가 들어도 방을 밖에서 잠궜다.

"미친놈.. 도망, 도망쳐야.."

"윽, 여기서 어떻게 도망쳐."

도망치고 싶다. 도망쳐서 당장 세이에게 달려가 안기고 싶다. 일렉스라는 남자의 눈빛이 이상하다 못해 더럽다고 느껴진다.

"세이, 빨리 와.."

저번처럼, 흰 장미 일때처럼. 빨리 와서 나 구해줘.

마계는 아까보단 약하지만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침부터 없었던 마왕과 아델은 비를 맞으며 돌아왔는지 물에 빠진 생쥐처럼 쫄딱 젖었다.

"마왕님, 아델 경 마른 수건 가져왔습니다."

황급히 시중은 마른 수건 두장을 가져와 각각 한명씩 나눠주고 물러선다. 마왕과 아델은 받은 마른 수건으로 젖은 머리부터 털며 성 안으로 들어간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아델은 주변을 살폈다. 이쯤이면 윗층에서 달려 내려와 어딜 갔냐며, 왜이리 늦었냐며, 다음부턴 절대 늦지마라며 말해야 하는 태일이 나타났어야했다.

"태일은? 자나? 흐음, 아직 이른 시간인데."
"그, 그것이.. 태일님께서 사라지셨습.."

기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델은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던 수건을 던지고 태일의 방을 향해 달려갔다. 그 사이 마왕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아델이 올라간 계단을 바라봤다.

잠시 후, 태일의 방을 다녀온 아델은 거친 숨을 내쉬며 마왕 앞에 무릎을 끓었다. 그런 아델의 뒤로 그곳에 있던 에리샤를 포함하고 모든 이들을 아델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흔적은."
"..못 찾았습니다."
"에리샤, 마지막으로 본 시간과 장소는."

마왕은 너무나도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에리샤의 뺨에 날카로운 칼날이 스쳐간다.

"점심을 드시고 윈더가 나타나 태일님께 단둘이 산책을 권유하셨습니다."
"윈, 더?"

'윈더' 라는 이름이 나오자 아델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에리샤는 굳어진 아델의 표정을 뒤로하고 마왕의 안색을 살폈다.

마왕은 방금보다 더욱 더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비내리고 있는 방 밖 너머로 저 멀리 보이는 인간계 중심에 있는 성을 바라봤다. 어두운 마왕성과는 다르게 화려하고 밝은 성을.

11
이번 화 신고 2019-03-26 17:28 | 조회 : 2,460 목록
작가의 말
하얀 손바닥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