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뭣도 모르고 녀석을 꽉 잡았다. 슈리츠는 말 치고는 약간 왜소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험한 길을 빠른 속도로 달렸다. 오히려 작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까, 짐을 메고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짐을 지키도록 훈련이 돼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용사님! 우리 어디로 가는 건가요?!"
나는 뒤편에서 쫓아오고 있는 도마뱀을 보며 소리쳤다.
말은 쉽사리 따라잡히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그럴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는 거였다.
"다시 위로 오를 거다!"
반 랜드레이는 뒤돌아 볼 생각도 않고 정면을 주시한 채 대꾸했다.
"다시 오른다니. 따라잡히는 거 아냐? 말이 바위산을 그렇게 잘 오르나?"
거대 바위 도마뱀보다도 더?
남의 속 타 들어가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반 랜드레이는 거리낌 없이 간단히만 말했다.
"스칸달른에 와보면 알 거다."
글쎄요, 제가 거기 갈 일은 없을 거 같네요.
크게 돌아 지나간 우리는 처음의 절벽과는 다른 곳까지 갔다. 아마, 반대편이 아닐까 싶지만 정확히 알 순 없었다. 그런 걸 가늠할 여유는 없었고 도마뱀과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가 달리는 내내 우리의 최대 관심사였다.
슈리츠는 두 명을 태우고도 성큼성큼 뛰어올라 바위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약간의 내리막. 슈리츠의 편자가 바위에 미끄러졌다. 하지만 살짝 비틀거렸을 뿐 연이어 계속 올랐다. 사실 말 같이 생겼지만 산양 같은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질주에 거리낌이 없었다.
바위 도마뱀은 슬슬 약이 오르는지 파괴적으로 그 뒤를 쫓아왔다. 뒤에서 볼 수 있는 나는 알 수 있었다. 놈은 오른 다기보단 물에서 허우적대듯 다리를 저으며 쫓아왔다. 죄다 부수면서 오르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어보였다.
그런 대로 시간은 번 편인가.
"근데, 올라간 다음은?!"
나는 다시 반 랜드레이에게 물었다. 슈리츠가 산을 기가 막히게 잘 탄다는 건 알았다. 그건 알겠는데 올라서 그 다음은 어쩌겠다는 것인지가 알고 싶었다. 설마하니 오르기로 승부를 보면 따돌릴 수 있을 줄 알았다 뭐 그런 건 아니었겠지.
"글쎄..."
라는 말로 얕은 웃음소리를 냈던 반 랜드레이는 아예 하! 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나 보네?!
확실히 슈리츠는 굉장한 말이었다. 믿음직하다. 반 랜드레이보다 더 멋졌다. 하지만 한계는 극명하다. 둘이나 태우고 있는데다가 쉬지 않고 도망치고 쫓고 찾기를 반복했을 테니 곧 힘에 부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건 반 랜드레이 역시 염두에 두어둔 거 같았다.
"스우렌우나는 어디 있지..."
녀석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근데 다 들렸다.
"이제, 이 꼴이 나서야 걔 생각이 나냐?!"
참 염치도 없었다.
"저런 게 나타날 거라고 누가 알았겠어. 기껏해야 코볼트나 더 나올 줄 알았지...! 이제 보니 왕국도 수준이 높은가 보군?"
반 랜드레이가 그렇게 구는 것도 이해할만하긴 했다. 저런 게 있을 거라고 정말 누가 생각했겠어. 수준이 높은 정도가 아니었다. 아예 판이 다르다.
그런데 스우렌우나라고 이 괴물을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아주 약간의 도움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도망칠 방법을 알 수 있다면, 잠깐이라도 틈을 낼 수 있다면... 그런 생각뿐이었다.
"우릴 찾겠다고 내려간 거 아니야?"
"그 녀석들을 전부 다 끌고 섣부르게 움직일 아키에스가 아니다."
그러고 보면 스렌 말고도 에반젤린, 레샤, 야우라, 챠라까지 4명이나 더 이 산에 있었다. 스렌은 분명 그 애들까지 전부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다.
어쩌면 가능한 한 멀리 이동하지 않고 이 위에서 안전한 곳을 찾으려고 했을 수도 있다.
"근데, 충격 반전으로 애들의 안전을 위해서 내려갔으면 어떡해?"
나는 혹시나 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럼 끝난 거지."
반 랜드레이는 심드렁하게 들릴 정도로 간단히 대꾸했다.
"야 너 되게 대책 없다."
"너만 하겠냐."
"난 경우가 다르지."
"다르긴 뭘, 그러다 죽어서도 다르다 핑계 댈 거냐?"
아니 그건 아니고...
내가 받아칠 말을 고르는 동안 반 랜드레이가 고삐를 틀었다.
"떨어져서 뒤통수 깨지고 싶지 않으면 조심해!"
슈리츠가 자세를 낮게 낮추고 방향을 틀었다.
나는 반 랜드레이의 옆구리를 쥐어뜯듯이 꽉 잡았다.
편자가 바위에 미끄러지며 빠져버릴 듯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고 뒤이어 놈의 발톱이 그 자리를 덮쳤다.
떨어져서 뒤통수 깨지는 걸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녀석의 발톱조각과 부서진 바위 조각이 공중으로 튀어올라 머리위로 떨어졌다. 발톱이 깨져나갈 정도로 내려친다는 건 화가 엄청 났다는 거겠지.
"온다! 온다! 온다! 야 온다고!"
나는 반 랜드레이의 목덜미와 어께를 잡고 소리쳤다.
한 번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뒤쫓고 있는 녀석은 움직이기 위해 발을 뻗으면 그게 곧 공격이 되었다.
"나도 알아! 눈은 너만 달린 줄 알아?!"
"넌 앞 밖에 안 보잖아!"
뒤 돌아보면 완전 다르다니까, 지금 그렇게 말할 게 아니라니까!
"난 앞만 보기도 바쁘거든."
"더 빨리는 못 달려?"
"무게가 줄면 더 빨라지겠지!"
반 랜드레이가 짜증을 내었다.
지금 슈리츠는 지고 있는 짐이 없었다. 타고 있는 거라곤 고삐를 잡은 반 랜드레이랑 뒤에 매달린 나뿐이다.
그렇다는 건.
"우워! 선량한 백성을 버리지 마! 넌 용사잖아!"
괜히 반 랜드레이를 잡은 손가락에 힘이 더 들어갔다.
반 랜드레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게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속내를 숨긴 것인지 가늠이 안 된다.
어쩌면 내려버리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었다. 스칸달른의 용사님이 '숭고한' 희생을 하는 것이지 덩치 큰 녀석이니까 고기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음...
그 사이 그림자가 졌다.
거대한 다리와 몸뚱이가 하늘을 가려 만들어진 그늘이 나와 반 랜드레이를 덮었다.
놈의 발톱이 아슬아슬하게 우리를 빗겨갔다. 제가 부숴놓은 바위 잔해 다리가 미끄러지지 않았다면 납작 개구리가 될 뻔 했다.
"야! 내릴까?!"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소리였다.
정말 그 말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있다!"
그것과 관계없이 반 랜드레이는 전혀 다른 소릴 했다.
있다니 뭐가. 뭔가 있다면 지상최강의 마법사 같은 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심정으로 나는 얼른 정면을 보았다.
진짜 있다!
스우렌우나가 있었다. 저 앞, 바위틈의 아래에서 살짝 고개를 내민 스렌은 주변을 살피다가 금방 올라왔다.
밑에 있다가 소리를 듣고 올라온 것처럼 보였다.
"이랴!"
반 랜드레이가 박차를 가하자 슈리츠 한 층 더 속도를 내었다.
달려오는 우리를 본 스렌은 바위 위로 온전히 올라와 물러섰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세를 곧게 잡고 활의 시위를 당겼다.
슈리츠는 스렌을 기준으로 오른편으로 돌며 통과했고 뒤따르는 도마뱀이 자신의 옆을 지나치는 순간, 스렌이 쏜 우나의 화살이 녀석의 옆통수에 박혔다.
"크흥...?"
코를 풀기라도 하는 것 같은 아주 약간의 울음소리. 그리고 작은 돌멩이를 맞은 것처럼 고개를 까닥이는 것이 녀석이 보인 반응의 전부였다. 화살을 거꾸로 뽑아낼 때도 아주 잠깐 스렌을 노려보며 위협의 소리를 낼 뿐 놈은 아픈 채도 하지 않았다.
"저 앞에 봉우리로 달려라!"
뒤편에서 스렌의 목소리가 얼핏 들렸다.
"들었어?!"
내가 물었다.
"그래, 저 앞의 걸 말하는 거 같은데?!"
손가락이라던가, 고갯짓이라던가, 하는 것들은 전혀 없었지만 어떤 걸 말하는 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정면에 봉우리라 할 만한 건 우측에 하나뿐이다. 반 랜드레이는 그 방향으로 슈리츠를 몰았다.
스렌은 어쩔 생각인거지.
그러는 새에 검은 물체가 우리 옆을 빠르게 날아갔다. 스렌이였다. 화살을 먼저 박아 넣고 바람실을 당겨서 화살을 회수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자신이 날아가 .
저렇게도 쓸 수 있구나... 이 정도면 왕국은 수호능력 시험보지 말고 그냥 아키에스 중에 하나로 뽑지 왜 평범한 사람들한테까지 희망을 심어주는 건지 모르겠다.
먼저 봉우리에 도착한 스렌은 마찬가지로 바람실을 이용해 재빠르게 아래로 내려와 그 주변을 빙빙 돌았다.
그 동안 나와 반 랜드레이가 도착했다.
"앞으로 쭉 달려라!"
다시 봉우리로 올라간 스렌이 우리에게 소리쳤다.
"이것저것 바라는 게 많아...!"
반 랜드레이가 투덜거리면서도 오른쪽으로 봉우리를 돌려던 진로를 바꾸어 직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렌이 우나의 화살을 걸어 쏘았다.
연달아 날아온 네 발의 화살이 도마뱀의 머리에 박혀 들어갔다.
이번에도 녀석은 무시하고 내달렸다.
아니 한 번쯤은 화살을 쏘는 녀석을 봐줘도 되는 거 아니냐고!
"무슨 작전이라도 짜뒀어?"
내가 물었다.
이대로 가다간 그냥 붙잡혀서 뼈째 씹어 먹힐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죽음은 너무 끔찍했다.
"네 눈엔 그럴 시간이 있어보였냐...?!"
반 랜드레이가 성을 내었다.
"그럼 뭔데?!"
"...!"
도마뱀이 기둥을 지나치기 직전, 스렌이 봉우리에서 내려가 있던 스렌이 바람실을 당겼다.
키이이잉...! 드드... 드득...!
실이 팽창하는 위태로운 소리, 동시에 모가지가 돌아가 버린 도마뱀이 제 관성을 견디지 못 하고 봉우리에 머리를 들이받았다.
쾅.
무슨 폭발이라도 일어난 양, 힘껏 봉우리를 들이받은 도마뱀은 그대로 바위더미에 처박혔다.
문제는 기존에 달리던 녀석의 속도가 너무 빠르고 몸이 무거워서 녀석의 뒷다리와 꼬리가 그대로 돌아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야!"
나는 소리쳤다.
"왜!"
뒤는 돌아보지 않는 반 랜드레이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주제에 자꾸 부르는 게 짜증나는 건 이해하겠지만...
아니, 됐다.
이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클 났다...!"
그대로 도마뱀의 꼬리가 나와 반 랜드레이가 탄 슈리츠를 덮쳤다.
허공을 날았다. 나는 무엇이든 잡으려고 애썼다. 이대로 땅바닥에 곤두박질 쳤다가는 몸 성치 못할 거란 생각밖에 머릿속에 없었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으면서 의미 없이 뻗던 손길에 무언가 걸렸다. 나는 한 줌의 지푸라기 같은 그것을 힘껏 꽉 잡았다.
날아가던 몸이 툭하고 걸리며 멈췄다.
내가 붙잡은 것도 있지만 그보다도 뭔가 내 몸을 막았다.
도마뱀의 꼬리였다.
내가 간신히 부여잡고 있는 건 녀석의 꼬리에 달린 갈기 같은 짧은 비늘이었다. 꼬리와 함께 움직이고 있는 거다.
약간은 안도하고 있었던 감각이 갑자기 아래로 훅 꺼졌다. 꼬리가 모퉁이 끝을 넘어 벼랑 아래로 늘어졌다.
안 그래도 모자라던 숨이 더 가빠졌다. 1초에도 다섯 번은 들이쉬었다 내뱉는 것 같았다.
가슴이 아프다.
아래는 쳐다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떨어지면 어떻게 될지 뻔한 거 아닌가. 나는 어떻게든 올라가기 위해 녀석의 갈기를 새로 잡았다.
갈기는 비늘이라기보다도 약간은 두꺼운 가죽 같은 느낌이라서 구겨 쥘 수 있었다.
나는 꾸역꾸역 오르고 올라, 꼬리의 중간 부근에서 벼랑이 끝나고 바닥에 오를 수 있었다.
그 때까지 흐느적대는 움직임만 보이던 녀석은 느닷없이 꼬리를 마구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힘들게 올라온 게 무색하게, 도마뱀은 꼬리를 말아 벼랑 위에서 꺼냈다. 그리고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꼬리를 말고 몸을 비트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왼쪽 눈에선 아직도 검붉은 피를 철철 흘리고 있고 이빨에서 걸쭉한 침을 잔뜩 흘리고 있는 녀석은 내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건지 잠깐 고개를 흔들고 있다가 덥석 제 꼬리를 물었다.
나는 녀석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제 꼬리다. 아예 으깨질 정도로 물지 않았기 때문에 꼬리에 붙어있는 날 골라서 깨물 수가 없었다.
갈라진 혀끝이 팔과 손을 스쳐 지나갔다.
"이잇... 윽덷...!
차마 비명도 나오지 않고 헛바람을 뱉었다.
제대로 물지 못했다는 걸 깨닫자 녀석은 턱을 열고 고개를 뒤로 물렀다.
그리고 한 번 더 이빨을 들이밀었다.
이번에는 아예 엄한 곳을 물어버렸다.
그래, 이 녀석 왼쪽 눈알이 짓물러 터져버려서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거였다.
나는 조심조심 일어나서 녀석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어디서 그런 미친 발상이 나온 지 모르겠다.
하지만 밑에선 깔려 죽을 게 뻔하고, 실 감고 날아가는 능력도 없는 내겐 그 외에 도망갈 방법도 없었다.
여전히 녀석의 눈꺼풀 위엔 밧줄이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달려있던 가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게 벼랑에 부딪히면서 머리 안으로 밀고 들어가 눈을 찔러버린 것 같았다.
잡을 게 없네.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떨어지면 죽는다. 높아서 죽든, 밟혀 죽든, 잡아 먹혀 죽든, 죽는 건 죽는 거다.
나는 대렁거리는 그 피 묻은 밧줄을 허리에 감아 묶었다. 그리고 녀석의 이마 위에 납작 엎드렸다.
갑자기 내가 사라지자 도마뱀은 머리를 높게 쳐들었다.
사람은 떨어질 때 말고, 올라갈 때도 심장이 덜컥덜컥한다는 걸 그 때 처음 알았다.
경치 좋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고 해도 잘되지 않았다.
반 랜드레이는 보이지 않았고 슈리츠는 다리를 다친 듯 구석의 바위까지 날아가 누워있었다. 죽은 건지 살은 건지도 모르겠다.
이곳에서 보니 바위틈 아래에 숨어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는 다른 애들까지도 보였다.
전부 다 보인다. 이러니 숨는 게 불가능 한 거였다.
만약 이 녀석의 양쪽 눈이 모두 정상이라 제대로 볼 수 있었다면 스렌이 봉우리에 올라가있던 걸 못 봤을 리 없었다.
지금도 녀석은 제 좌측 아래의 바위에 올라 서있는 스렌을 찾지 못했다.
"이 자식 왼쪽 눈이 없어!"
나는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알았다! 화살을 하나 보내겠다!"
스렌은 그렇게 소리치고는 올라서 있던 바위에서 내려가 몸을 숨겼다.
소리를 들은 도마뱀이 고개를 아래로 내려 꺾는 통에 나는 온 몸에 힘을 바짝 주고 버텨야했다.
화살을 보낸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생각할 틈도 없이, 도마뱀은 자세를 낮추고 스렌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스렌이 바람실을 이용해 한 번 도약할 때는 거의 수 십 미터를 날아갔다. 그런 식으로 계속 이동한다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화살의 비행과 회수였다.
화살을 쏘고 바람실을 당기고 화살을 뽑아내고 다시 쏘고, 그 다음 또 한 번 도약하는 과정. 그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스렌은 잡히지 않고 도망쳤다.
실제로 빈 바위더미를 몇 번 내려치던 도마뱀의 아래턱에서 에서 끈적끈적한 침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게 여기서도 보였다.
하지만 그것까지였다. 스렌 역시 공격할 기회를 전혀 잡을 수 없었다. 쏘기는커녕 겨눌 사이시간 조차 생기지 않는다.
"레이크! 화살이다!"
불현듯 스렌이 소리쳤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화살을 한 발 쏘았다. 일단 불렀으니 보고는 있는데...
그 화살은 높이 날아 내가 누워있는 뒤편, 놈의 목덜미에 박혔다.
저걸로 뭘 어쩌라고.
묻는다고 한들, 제대로 설명을 들을 수 있을지나 모르겠다.
"이 뒤는 벼랑이다!"
그렇게 소리친 다음, 스렌은 다시 한 번 바람실로 멀찍이 날아갔다.
그러니까 뭐 어쩌라고!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화살은 무기다. 스렌은 맨손이던 나에게 무기를 주고 갔다. 활은 없어도 화살촉은 철이고 우나의 화살은 더 무겁기까지 하다.
나는 놈의 목덜미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울퉁불퉁한 비늘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비늘 사이에 끼워져 들어간 스렌의 화살을 뽑아냈...
내려고 했는데 이거 엄청 안 뽑히네!
결국 두 손으로 잡고 팔꿈치를 지레삼아 겨우겨우 뽑아낸 나는 그걸 바지와 허리춤 사이에 걸어 넣었다.
일단 무기는 얻었다.
그런데 무기라고는 해도 이 괴물의 비늘을 뚫고 들어가기에 화살은 너무 짧았다.
스렌의 생각은 뭐였을까.
이 앞은 벼랑이야, 나에겐 화살이 하나 있어. 그리고 이 눈도 한 짝 밖에 없는 못생기고 냄새나는 비늘 바위 괴물 자식은...
그래, 그 때 스렌의 생각을 알아챘다.
나는 조금씩 앞으로 기어갔다. 기어갈 필요도 없다. 앞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럼 원하는 게 뭐였겠냐고.
게다가 난 밧줄에 몸을 묶은 상태였다. 혹여나 이 녀석의 몸에 떨어지더라도 끝까지 떨어지지 않는다.
믿는 구석은 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흔들리긴 하지만 이곳은 머리다. 머리를 마구 떨며 움직이는 정신 나간 짐승은 존재하지 않는다.
걸을 수 있다. 조금이나마 뛸 수 있다.
나는 튀어나온 비늘에 발이 걸리지 않도록 뛰는 듯 마는 듯 움직였다.
이 짧은 화살로 효과적은 피해를 줄 수 있는 곳은 딱 한 곳. 녀석의 남은 오른쪽 눈.
나는 허리에 묶어놓은 밧줄을 확인하며 화살을 꺼내 양손으로 꽉 쥐었다.
내꺼풀을 닫아버리기 전에 빠르게 찔러야 한다.
눈 딱 감고하면 좋겠는데 눈도 감을 수 없다.
나는 두 눈 부릅뜨고 녀석의 머리 오른쪽으로 뛰어 들어 오른쪽 눈에 화살을 박아 넣었다.
"키야아아아앍....!"
귀를 막고 싶어지는 울음소리였다.
나는 화살을 놓고 밧줄을 잡았다.
녀석의 내꺼풀이 닫힌다. 하지만 그게 더 끔찍할 것이다. 금속 화살은 부러지지 않고 안에서 긁어댈 것이다.
그 동안 내가 할 일은 기어오르는 것뿐이었다.
양쪽 눈을 전부 잃은 괴물 녀석은 방향감을 상실하고 그저 정면으로 내달렸다. 두 눈감고 달리는 것이다. 그것만큼 위험한 게 없지.
스렌이 말했던 대로 이 앞은 벼랑이었다.
마구잡이로 날뛰던 놈이 벼랑 앞에서 엎어졌다.
나도 덩달아 바닥 위를 굴렀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바닥에 꺼져버린 것을 느낀 녀석이 몸을 비틀며 방향을 바꾸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너무 무겁고 큰 건, 굉장한 무기지만 또 큰 약점이기도 했다.
아무리 발톱을 박아 넣어 버티려고 해도 놈의 크기와 무게를 견딜 수 있는 바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폭포를 거꾸로 오르기라도 하려는 벼랑 위에서 버티던 녀석은 서서히 미끄러져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기는 전에 떨어졌던 것보다 훨씬 높은 곳이다. 완만한 바깥쪽이 아니라 깎아 지르는 내벽 방향. 제 아무리 튼튼한 갑옷을 입고 있대도 쉽게 볼 높이가 아니었다.
다행히 같은 처지인 나는 비교적 가벼운 덕분에 바위 위에 몸을 걸치고 버틸 수 있었다.
큰 게 대수가 아니란 말이다, 이 자식아!
그렇게 잠깐 생각했는데... 나, 이 녀석이랑 밧줄로 연결돼 있지 않았던가.
"헉!"
순간, 허리가 훅 빠져버리는 감각이 들었다.
아래로 끌어내려지는 힘. 도저히 버틸만한 게 되지 못했다.
아, 반 랜드레이를 붙잡고 같이 떨어졌던 게 이렇게 돌아오나.
실없는 생각과 함께 풀어지는 내 손을 누군가 붙잡았다.
"잡았다! 잡았어! 잡았다고!"
야우라가 내 양 손을 꽉 붙잡고 소리쳤다.
"안 돼!"
나는 불현듯 소리쳤다.
한 사람, 두 사람으로는 절대 못 버틸 무게였다.
전부 떨어진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됐잖아!"
야우라가 엄하게 소리쳤다.
"어...? 허?"
그 애의 말이 맞았다. 나는 진작 떨어졌어야 했다. 하지만 야우라는 아직도 내 손을 잡고 버티고 있었다.
자연히 고개가 아래로 향한다. 벼랑 밑을 보자, 허리춤에 묶인 밧줄 끝에 녀석의 머리에 박혀있던 외뿔이 매달려 흔들거리는 것이 보였다.
뽑혀져 나온 것이다.
"야...!"
온 몸의 기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 나는 즉시 야우라부터 불렀다.
"나 절대 놓으면 안 돼? 알았지? 떨어지면 평생 저주할 거야!"
"걱정 하지 마! 절대 안 놔! 절대 안 놓을게! 어! 음...! 팔이 좀... 아프긴 한데...!"
그러고 보면 다친 팔로 얼마나 버티겠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레이크님!"
"레이끄으...! 야우라아...!"
뒤이어 따라 온 다른 애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그래, 셋이면 사람 한 명 정돈 충분히 건져 올릴 수 있겠지.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