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그게 아니라니까(6)

어느샌가 우리는 능선을 넘어 다시 팔라슈의 건너편으로 넘어왔다.
험했던 길을 따라 올라 때로는 키만한 바위를 오르기도 하고 벼랑 옆을 지나가며 다시 아래로 내려가는 길에 들어서기 시작한 거다.
예상하고 있던 것보다 일이 너무 쉽게 풀려서 허탈한 기분마저 들 정도다. 뭔가 아쉽다고 말 할 수는 없지만 괜히 찝찝한, 그런 오묘한 감각.

"이상하군. 너무 조용한데."

반 랜드레이 또한 그런 기분을 느낀 모양이었다. 녀석은 걸으면서도 끊임없이 주위를 둘러보고 또 경계했다.
나도 거기에 동의하는 편이긴 했지만 콕 집어 그렇다 말할 수는 없었다.

"챠라, 무슨 냄새 안 나?"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경계담당인 챠라 역시 별다른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반 랜드레이는 끝내 그게 거슬리는 거였다. 처음 아무것도 모르고 이곳에 왔을 때랑은 다르다. 그 때는 여기가 그저 케이드린이 있는 곳이라고만 생각하고 설명을 들어 간단한 일 일거라 여겼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완전히 모르는 곳이 되어버린 거다.

"도둑독수리다."

스렌이었다.
맨 뒤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쫓아오던 스렌은 알게 모르게 가까이 다가와서는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듣고 보니 저 쾌청한 푸른 하늘에 까만 점들이 몇 개 날아다니고 있었다.
정말 높게 나는 새다.

"저게 보여요?"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하늘을 보던 챠라가 기가 막힌 듯 물었다.

"도둑독수리?"

그게 뭔지는 모르는 내가 물었다. 아무래도 카르킥 같이 특별한 종이 아니라면 궁수에게 맡기는 것이 메뉴얼의 내용이었기 때문에 새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종류가 그리 많지 않았다.

"시체를 뜯어먹는 고지방의 독수리다. 원래는 저렇게 일정한 터를 가지고 주변을 맴도는 게 아니라 계속 시체를 찾아 옮겨 다니는 것들인데... 팔라슈라서 그런 건가..."
"그만."

반 랜드레이가 스렌의 말을 끊어먹었다.

"네가 끼어들면 의미가 없잖아."
"그저 조심하라고 말해주는 것뿐이다. 이 이상은 이야기하지 않겠다."

그렇게 담담히 남긴 스렌은 도루 행렬의 끝으로 돌아갔다. 중간에 야우라가 무슨 얘기를 한 거냐고 묻는 듯 보였지만 하늘을 살짝 가리켰을 뿐 별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설마 삐진 건 아니겠지.
스렌이 그럴 것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고작 그런 걸로... 아니 근데 약간 어께가 쳐진 거 같기도 하고.

"스렌이 말을 의미가 없다는 게 무슨 소리야?"

나는 반 랜드레이에게 물었다.
굳이 그런 말을 해야 했을까 싶었다.

"저 자식은 우리와 수준의 층이 다르다. 층이라기보다도 탑하고 우물의 차이 정도지."

탑하고 우물의 차이라니, 너무 자조적인 것 아니냐고 하려다가 신나게 엎어지던 반 랜드레이의 모습이 떠올라서 그만두기로 했다. 나도 만약 야우라 없이 혼자였다면 정말 신나게 맞았을 터였다.

"상대가 안 돼. 그런 녀석의 도움을 받으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아무리 그래도 좀 특이한 상황이니까... 저기, 저것 봐."

적절한 타협점을 찾으려는 찰나, 우리의 진로 앞에 뭔가 있었다.
작은 새끼... 곰? 여우? 뭔가 애매하게 생긴 게 있었다.

"저게 뭐야."

마침 그걸 발견한 반 랜드레이도 뭔지 모르는 거 같았다.

"새끼 곰 아니야?"
"세상에 저렇게 귀가 뾰족한 곰이 어디 있어. 왕국 토착 생물이냐?"

"그럼 여우인가?"
"무슨 여우가 몸하고 꼬리가 저렇게 짧아."

"아이구, 참 증말. 그렇게 불만이면 네가 생각해내 보던가."

내가 다그치자 반 랜드레이는 고개만 살짝 까딱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른다는 거다.

귀가 뾰족하고 퉁퉁한 삼각형의 얼굴. 짧고 동그랗게 말린 꼬리. 검은색에 가까운 검붉은 털, 얼굴에 황색 털이 직선으로 그어져 있어 꼭 눈을 감고 있는 것처럼 생긴 그 새끼동물은 홀로 덩그러니 길 앞에 누워있었다.

"그냥 지나가도 될 거 같은데?"

가만히 놔두면 나중에 어미가 와서 데려가겠지.

"저건 가이즐랍터다. 새끼처럼 보이지만 저게 수컷 성체다. 속이고 있는 거지. 한 마리가 있으면 주변에 서너 마리의 암컷이 매복하고 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크다. 연약한 수컷과는 달리 강한 발톱을 숨기고 있고 송곳니도 두꺼워서 까다롭지. 하지만 미끼를 건드리지 않으면 암컷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완전히 속였다고 생각할 때만 덮치는 아주 교활한 놈들이다."

구구절절한 설명.
언제 또 앞으로 온 건지 모를 스렌이 한 말이었다.
설명은 고맙긴 한데 뭔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반 랜드레이도 상당히 불편한 얼굴로 보고 있었고.
분명 제 입으로 간섭 안 하겠다고 한지 얼마 안 된 사람이다.

잠시 우리를 지켜보던 스렌은 아... 하는 탄식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알았다... 뒤에서... 가만히 있겠다..."

그리고는 또 뒤로 돌아갔다.

"돌아서 가지."
"그래."

반 랜드레이가 제안했고 나는 간단히 동의했다.
우리가 진로를 살짝 바꾸어, 아니 살짝 바꾸는 정도도 아니었다. 그냥 말 그대로 열심히 불쌍한 척을 하고 있는 가이즐랍터 수컷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 살짝 비켜 지나갔을 뿐이다. 거의 길에서 똥을 보고 피해가는 거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그마저도 스렌이 말해주지 않았으면 하지 않았을 테니 다행이었다.

"그냥 가이드 세우지 그래?"
"두 번 말해야 알아듣는 거냐?"

어련하시겠어.
그 무렵 뒤편에서 야우라가 날 불렀다.

"야, 레이크레이크."
"왜."

나는 고개만 돌려 뒤를 보았다.
야우라는 곰인지 여우인지 모를 작은 새끼 동물을 왼팔로 안아들고 있었다.

"이거, 버러져 있던 애인데 클로에한테 키우자고 하면 허락받을 수 있을까?"

뭐? 뭘 키워?
반 랜드레이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야! 이 화상아! 넌 뭐 들었냐?! 그 귀는 도대체 왜 길쭉한 거야!"

내가 버럭 소리치자 야우라는 대뜸 볼멘소리부터 냈다.

"뭐야아, 내 귀 긴 거에 네가 뭐 보태준 거 있냐?!"

그래, 쟤가 저걸 안 건드릴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내 잘못이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야우라가 안고 있는 가이즐랍터 수컷의 목 뒷덜미를 잡고 있는 힘껏 던졌다.
녀석은 힘없이 바닥에 떨어지는 게 아니라 마치 고양잇과 동물처럼 잽싸게 균형을 잡고 서서는 키야악 하고 미약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벌어진 송곳니와 뜬 눈 안에 보이는 황색 눈동자는 영락없는 맹수의 것이었다.

쿵 쿵 쿵 쿵...

곧 암컷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 상상이상으로 크기가 컸다. 수컷의 열배? 아니면 그 이상? 곰이나 다를 바 없는 크기였다.
수컷과 달리 외모에서부터 귀여움이라고는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는 포식자다.
그런 게 여섯 마리나 있었다.

"...내가 잘못한 거야?"

야우라는 더 없이 침울한 얼굴로 물어왔다. 그렇게 슬픈 표정은 아껴먹던 샌드위치를 떨어뜨렸을 때도 짓지 않던 표정이다.

"그래!"
"그래!"

그러든 말든 반 랜드레이와 내가 동시에 성질을 냈다.

"이쪽으로 뛰어라!"

가장 뒤에 있었던 스렌이 소리쳤다.
나랑 야우라는 뒤도 볼 것 없이 뛰었고 자존심 강한 반 랜드레이조차 마지못해 스렌이 말한 대로 왔던 길을 되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가이즐랍터는 빠르지 않았다. 비대한 암컷들은 다른 짐승들과 비교하면 오히려 느린 편에 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날렵한 수컷을 미끼로 삼아 사냥하는 거였다.
스렌 또한 그걸 노리고 뒤로 오게 한 것이다. 우리가 온 길은 팔라슈를 다시 오르는 길이었다. 험한 바위산. 육중한 녀석들이 오르기에는 조금 벅찼다.

"빨리빨리빨리!"

나는 키가 조금 모자란 레샤를 얼른 밀어 올려 바위 위로 올려 보냈다. 먼저 올라가있던 야우라가 그 애를 잡아당겼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서로를 잡아당기고 밀고 끌어당겨 최대한 빠르게 바위를 올랐다. 근육덩어리 여우곰탱이보다 훨씬 빠르다.

그렇게 속도는 차이가 나는데 우리는 점점 따라잡히고 있었다. 체력에서 밀리는 거다.

가이즐랍터는 우악스럽게 달려들었다. 앞밖에 보이지 않는 멍청이들처럼 우둔하면서도 끈질기게 바위를 올랐다.

결국 우리는 벼랑 끝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스렌은 끝내 활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이제 다 잡은 먹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가이즐랍터가 선뜻 다가오지 않았다.

그것도 꽤나 멀찍이 서서 우리를 지켜보고만 있는 것이다.
그게 무슨 행동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인지 스렌도 섣불리 활을 쏘지 않았다.

"어우... 슈리츠가 잘 도망갔는지 모르겠네요? 무사해야 할 텐데."

겨우 한숨 돌린 챠라가 대뜸 말의 안부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금 말 같은 게 중요합니까...?! 중요하냐고요오...!"

평소라면 챠라한테 한 마디도 안 할 레샤가 버럭 성을 내었다.

"어떡하죠, 레이크님...?"

에반젤린 역시 낙관적으로 볼 수만은 없던 모양이었다.
근데 나보다는 스렌에게 묻는 게 좋지 않을까.

절벽 끝, 퇴로는 웬 처음 보는 괴물들이 막고 있고. 스렌조차 우리를 끼고서 세 마리를 동시에 전부 막아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쿠우우우...

땅이 진동하는 기묘한 소리였다. 울음소리라고 하기엔 그 울림이 비어이었고 바람소리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탁했다.
그 소리에 반응을 보인 건 가이즐랍터였다. 여섯 마리의 암컷 중 세 마리가 갑자기 뒷걸음질 치나 싶더니 슬그머니 꽁무니를 뺐다.
그래도 남아있는 녀석이 세 마리 그 녀석들은 도망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거리를 좁히지도 않았다.

쿠구구...
한 번 더 땅이 흔들렸다.
암컷들의 동요를 확인한 스렌이 다시 한 번 활을 겨눴다.

"끼어들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걸 제지한 건 반 랜드레이였다.

"지금은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다."

스렌도 이번엔 순순히 따라주지 않았다.

"이건 내가 할 일이다. 내가, 용사 반 랜드레이가 거치는 여정이란 말이다."
"야, 지금이 네 자존심 찾을 때냐?"

나도 스렌의 편을 들었다.

"입 다물고 넌 밧줄이나 풀어."

반 랜드레이는 둥그렇게 말려 있다가 엉켜있는 밧줄을 끝을 내게 던졌다. 그리고 저는 반대편의 끄트머리를 잡고 절벽 위에 툭 튀어나와있는 기다란 돌 막대에 그걸 묶기 시작했다.
울퉁불퉁한 바닥이었다. 그런 게 하나쯤 있어도 이상하지 않지.

"세 마리가 도망쳤다. 뭔가 있는 거야. 싸우는 것보다는 도망치는 게 낫다. 밧줄을 타고 내려간다. 그렇게 하면 탈출할 수 있어."

끝내 스렌의 도움은 받지 않겠다는 거였다.
스렌은 정말로 활을 내렸다.
확실히 싸우지 않는 게 훨씬 안전할 수도 있었다. 우선은 다치지 않는 게 중요했으니까. 이겼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우리는 미크로셀까지 돌아가야 했고 그 중에 무슨 일이 더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난 몰라. 진짜 모르겠다.
모르겠으니 우선 할 수 있는 일인 밧줄부터 마구 풀었다.

그 동안 밧줄을 푸는 동안 남아있는 암컷들이 갑자기 달려들었다.
스렌이 재빨리 활의 시위를 당겨 쏘았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우나의 화살은 커다란 가이즐랍터의 눈에 박혀 들어가 일격에 쓰러뜨렸다. 그러나 아직 두 마리가 더 남아있었다.
밧줄은 다 풀었는데 내리고 또 내려갈 시간이 부족했다.

쩌저적...!

가이즐랍터가 쿵쿵대며 절반쯤 다가왔을 때 파쇄적인 소리가 울리며 바닥이 갈라졌다.
갈라졌다라기보다 부스러졌다. 그곳에서 튀어나온 건 거대한 눈... 아니, 이빨이었다.
커다란 가이즐랩터를 한 입에 집어삼키는 턱이었다.

콰직!

작은 과일이라도 씹는 것처럼 가볍게 벌어진 일이고, 쉽게 난 소리였다.
그건 용... 아니, 용은 설화에서나 나오는 날개달린 괴물이었다. 어디서는 신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어디서는 거대한 악마라고 불렀다.

이건 그런 게 아니었다.
벼락아래에서 튀어나온 그것은 거칠게 고개를 흔들며 가이즐랍터를 찢어내고 삼켰다.

겁에 질린 우리는 모두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주저앉았고 나머지 가이즐랍터 암컷들은 황급히 도망쳤다.

그래, 그건 절벽 아래에서 튀어나온 게 아니라 절벽 그 자체였다. 마치 안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거대한 도마뱀.

바위가 쪼개지고 돌이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절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도마뱀이라고 부르기조차 무서운 그것은 떨어지지 않기 위해, 혹은 나머지 먹잇감을 잡기 위해. 거대한 발톱을 휘두르며 바위를 다시 짚었다. 하지만 무너지기 시작한 절벽은 그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연쇄적으로 무너졌다.

발버둥 치면 발버둥 칠수록...
우리는 황급히 도망쳤다. 말하자면 가이즐랍터가 있는 곳으로 달린 셈이다.
저건 그야말로 땅 밑, 지옥의 괴물이었다. 악랄한 여우곰이 차라리 낫지.

"키야아아아악...!"

대기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괴물이 땅을 짚었다. 동시에 바닥은 무너져 그것은 다시 미끄러졌다. 공포심에 굳은 가이즐랍터 암컷이 그 붕괴에 휘말려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그것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건 끝내 절벽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벽을 할퀴어도 그 커다란 몸을 버틸 튼튼한 지반이 없었다.

아. 그 순간 나는 내 다리를 붙잡는 억센 힘을 느꼈다.
밧줄이 다리에 엉켜있었다.
뒤로 잡아당겨지는, 아니 잡아당겨지는 정도가 아니었다. 압도적인 힘으로 끌어내려지는 감각에 나는 나도 모르게 반 랜드레이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 순간 녀석이 외쳤던 말이 떠오른다.

"야 임마...!"

그래, 나라도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근데 나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닌걸.

나랑 녀석은 절벽 아래로 끌려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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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3-12 18:33 | 조회 : 658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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