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그게 아니라니까(5)

나무는 빠르게 모습을 감춰가고 있었다. 오르면 오를수록 키만 줄어드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풀떼기가 더 많이 보였다.
숲은 오래 전에 끝났다.

하늘은 가릴 것 없이 뻥 뚫려 잊고 있던 땡볕이 내내 내리 쬐었다. 우리가 구름보다 더 높이 왔을 리는 없고 태양하고 더 가까워져서 더 뜨겁게 느껴지는 걸까. 그런데 왕국에는 알펜스하임이라고 팔라슈보다 더 높은 산맥이 있었다.
그 곳의 꼭대기는 1년 365일 새하얀 눈이 내려앉아 녹지 않는다고 한다.
뭐 여기도 새하얗긴 하다. 재질이 조금 다른 것뿐이지.

울퉁불퉁한 바윗길을 생각하는 것보다 더 발을 헛딛기 쉬웠다. 다리보다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힘이 바짝 들어간 발목이 더 아프다.
항상 약간은 불편해 보이는 옷을 입고 다니는 에반젤린이 걱정이다. 다른 옷을 입기는 하는 건지 모르겠다.
실은 옷이 딱 한 벌뿐인 거 아닐까?
워낙 힘든 기색을 표하지 않는 애라서 알 수가 없다.
지금도 큰 스태프를 흐느적대며 걷는 레샤의 뒤를 조용히 걷고 있었다.

나는 에반젤린이 있는 쪽으로 가까이 갔다. 그리고 살짝 어께를 두드려 부르려 고하다가 튀어나온 돌부리에 그만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헉 넘어진다!

온 몸의 핏기가 가시는 감각에 나는 얼른 에반젤린의 양 어께를 붙잡고 넘어지지 않았다.

"어어?!"

앞으로 떠밀린 에반젤린은 엉겁결에 레샤를 붙잡아 기댔다.

"으히익....!"

도미노의 끝인 레샤가 괴성을 지르며 스태프를 먼 땅에 짚었다.
버텨낸 것이다.

이야, 큰일 한 건 할 뻔 했네...
아마 넘어졌으면 까져서 피가 나네 뭐네 할 정도가 아니라 뼈를 걱정해야할 정도였을 것이다.

"야우라...! 장난치지 마요...! 돌바닥에 넘어져서 무릎 깨질 뻔 했잖아요오...!"

과연 아직도 목소리가 떨리는 레샤가 깨진다는 표현을 써가며 버럭 소리쳤다. 내가 한 건데 이상하게 야우라를 찾았다.
평소에 당한 게 그렇게 많은 걸까.

"나 아무 짓도 안 했어! 왜 나한테 그래!"

뒤편의 스렌과 이쪽 사이에서 걷고 있던 야우라가 소리쳤다.
전혀 상정외의 전개였던 것인지 뒤 돌아있던 레샤가 제 눈을 의심하며 이쪽과 저쪽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그러다가 곧 나와 눈을 마주쳤다.

"레이크였습니까...?"
"어... 어. 발을 헛디뎌서. 미안."

나는 일체 변명 따윈 한 마디도 덧붙이지 않고 바로 사과했다. 이건 여지없는 내 실수였다.

"이거... 기억해둘겁니다...? 기억해둘거라고요...? 언젠가 이런 업보들이 전부 레이크한테 돌아갈 날이 올 거란 말입니다...!"
"아이, 안 다쳤잖아."

"안 다치면 상관없는 겁니까...? 과연 무책임한 백수폐인이나 할 법한... 힉!"

뭔가 저주를 퍼붓고 또 욕을 하던 레샤는 갑자기 사색이 되어 앞으로 도망쳤다.
곧 야우라가 오른팔의 부목을 무기라도 되는 양, 어께를 흔들며 스쳐지나갔다.

"레샤, 너어! 거기 서!"
"착각했습니다, 착각한 거라고요...!"

체력차이가 워낙 많이 나다보니 둘 사이의 거리는 금방 좁혀져갔다.

오, 붙잡혔다.

"아아...!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야우라 잘못아니에요그래요맞아요그러니까...! 으악...!"

무슨 짓을 당하는 건진 정확히 보이지 않았지만 레샤는 소낙비처럼 아무 말이나 내뱉다가 비명을 질렀다.
그 무렵 나는 내가 아직도 에반젤린의 어께를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미안."

나는 사과와 함께 얼른 손을 떼고 똑바로 걸었다.
혼자 가기도 힘든 산길, 남의 몸까지 얹어서 가면 배의 배는 힘들다. 깜빡했다고는 해도 도리가 아니지.
위험한 짓을 할지도 모르니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어떨까하며 힐끗 보았는데 에반젤린은 도리어 손가락의 깍지를 끼었다. 풀었다하며 쭈뼛쭈뼛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음... 아무리 급하셔도 그렇게 갑자기 뒤에서 껴안으시면..."

게다가 약간은 경직된 미소와 함께 얼굴을 붉혔다.

"아니, 급하다니, 그게 뭔. 뭔, 무슨 의미야 도대체..."

급해서 사람을 껴안는다니. 세상 그런 급함은 머리털 나고 처음 들어봤다.
위험한 거 아니야 그거?

"레이크님은 그런 거잖아요? 따뜻한 애정이... 필요하신 거잖아요."
"아뇨아뇨아뇨, 아니요. 발을 헛디딘 거거든요? 왜 사람을 찬 스프 먹고 자란 애로 만들고 그래?"

"말씀만 해주시면 저라도 얼마든지..."
"저기요, 제 말 안 들리세요. 사제님?"

"고해의 부끄러움은 한 번뿐이랍니다."
"안 들리는 거 맞죠? 그죠?"

나는 에반젤린의 옆머리를 살짝 들춰내고 드러난 귀에다 대고 말했다.

"그러어엄... 걸을 때 손잡아 드릴까요?"

안 들리는 게 확실하다.

"...산길을 걸을 땐 손잡고 가면 더 위험하다더라."

나는 반쯤 포기해서 생각나는 아무 말이나 했다.

"그건 걱정 마세요. 그럴 줄 알고 신발도 빌려왔거든요."

에반젤린은 제의를 살짝 걷어 발을 들어 보였다. 평소에는 수수한 가죽 단화였는데 오늘은 뭔가 강해보이는 신발을 신고 있었다. 가죽의 색도 더 짙고 굽도 크고 끈도 두껍고 밑바닥도 울퉁불퉁해 튼튼해 보이는 그런 신발.

받아칠 말이 있을 땐 들린다 이거지?
이런 치밀함, 아주 무서워.

거기에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내밀어진 손은 제 주인에게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잡아달라는 거겠지만, 왠지 부끄럽다.

그 뭐랄까... 내가 7살짜리 애도 아니고... 보는 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아이, 됐어. 그냥 실수로 헛디딘 거니까."

나는 애써 시선을 앞으로 보냈다. 그러자 에반젤린은 좀 더 다가와 팔짱을 꼈다.

"에이, 부끄러워 마시고 얼른요. 레이크님이 넘어져도 거뜬히 버틸 수 있어요. 아니면 제가 필요 없으세요?"

아무리 그래도 혼자 걸을 수 있는데 의지한다는 건 조금 이상해서 팔을 빼려고 했는데, 그게 쉽게 빠져나오지 않았다. 조금씩 움찔움찔할 뿐 팔을 붙잡고 있는 힘은 왠지 더 강하게 옥죄어...

나는 에반젤린을 보았다.
그 애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표정은 부드러운데 몸은 딱딱하게 굳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으허어...!"
"어머, 왜 그런 소릴 내고 그러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아니면 제가 불편하신건가요?"

"아니, 팔이 아파서..."
"정말 힘드실 땐 좀 더 저를 의지해주셔도 나쁘지 않아요. 아니면, 제가 의지가 되지 않는 건가요?"

"아니..."

힘든 게 아니라 아프다고.
전혀 무섭지 않은 이야기였다. 전혀 무섭지 않은 상황이었고. 우리는 나란히 잘 걷고 있었다.
근데 왜 괜히 등골이 서늘하지.

"이런 작은 일조차 도움이 될 수 없다면... 저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괜찮은 거라니까?"

가끔 이러는 거만 빼면 좋은 애인데.

"야! 레이크 아이힐데른!"

난처해진 날 구원해주려는 것인지 저 앞에 있던 용사님, 반 랜드레이가 소리쳤다.
잠시 놀란 에반젤린의 팔이 느슨해진 그 사이 나는 틈을 놓치지 않고 붙잡혀있던 팔을 빼내 살짝 거리를 두었다.

"앗...! 어디가세요!"
"나 부르는 거 같은데, 갔다 올게."

"예전의 레이크님은 이렇게 부르면 움직이는 성실한 분이 아니었는데!"
"너 저번엔 예전의 내가 성실하다고 하지 않았어?"

"그건 예전의 예전의 레이크님이고요. 그냥 예전의 레이크님은 딱 제 손 안에 있었는데에!"

뭔가 굉장히 섬뜩한 얘기를 들은 거 같았지만 우선 도망부터 쳤다. 저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해봐야겠다.
그것도 뛰긴 뛴 거라고 나는 숨을 고르며 반 랜드레이를 보았다.
왜 불렀냐고 묻기도 전에 녀석은 손끝으로 어느 한 쪽을 가리켰다.
그 쪽엔 여태까지 도망쳐온 레샤와 그걸 끈질기게 쫓은 야우라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쟤네들 좀 치워."

반 랜드레이가 말했다.
고작 그런 일로 그렇게 크게 부르다니 내 입장에선 억울할 따름이다.
뭐 도움은 되었지만서도.

"그걸 왜 나한테 그래."

반 랜드레이는 대꾸 없이 노려보기만 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이어 대꾸했다.

"저러다가 금방 말거야. 뭐 저 정도 가지고 그러냐."

야우라랑 레샤는 저렇게 투덕대다가도 금방 알아서 화해하고 얌전해질 것이다. 화해랄 것도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있는 일이니까 이젠 익숙했다.

"따라오는 건 상관하지 않는다. 그럼 거슬리진 않게 해야지."

녀석은 그리 말하곤 다시 앞서 걷기 시작했다.
거슬리지 않게만 하라고?
빈정이 상했던 나는 그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야, 저런 게 거슬리면 히스테리로 살 수나 있냐? 그리고 데리고 왔으면 데리고 돌아가는 것까지 일이지. 귀찮아지면 버리고 가는 법이 어디 있어. 스칸달른 풍습이냐?"
"진지하게 임하지 않는 놈들까지 데리고 다닐 만큼 아량이 넓진 않아."

아량이라, 아량이라 하면 또.

"너 용사잖아."
"스칸달른의 용사지."

"그래서 왕국 사람들한텐 팍팍하게 구시겠다?"
"네가 기대하는 상상하는 스칸달른 사람은 이런 게 아니었던가."

순간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너희 나라에서는 그렇게 하냐, 풍습이냐, 원래 그런거냐 등등. 실제로 반 랜드레이에게 자주 했던 말 중 하나가 스칸달른과 관련된 거였다.
혹시 기분이 나빴었나...?

"그건 네가 맨날 스칸달른에선 이렇게 한다고 하니까..."
"그래, 스칸달른 사람들이 왕국을 좋아하진 않지."

"그럼 왜 여기 와서 이러고 있는 건데."

고생을 하는 건 하더라도 굳이 좋아하지도 않는 곳에 와서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왕이면 고생도 좋은 곳에서 하는 게 좋았다. 집에서 하는 고생 같은 거. 사실 집에 있는 순간 그걸 고생이라고 부를 만 한 것인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일부러 왕국까지 온 데는 이유가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여기가 터가 좋아."
"터?"

"그래, 여정을 하기에도 경험을 쌓기에도 대륙 중앙으로 나가기에도 왕국이 좋지. 스칸달른은 3면이 바다다. 긴 항해를 통한 여정은 그리 좋지 않지."
"그걸 어떻게 알아."

"대체로 그래왔다. 바닷길을 택한 용사들은 실패했어."
"실패하다니... 그게 무슨..."

한 나라의 용사로 뽑혔으면 그것도 벌써 대단한 거 아닌가.

"한가한 동네 청년은 모르겠지만, 용사 선발은 시작에 불과해."

반 랜드레이는 선문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했다.
아무래도 녀석의 기준에선 뽑히는 것 자체는 아무 의미 없는 모양이었다.

"어어 넌 용사다 이거지, 지금? 그래요, 그래. 동네백수는 아무것도 몰라요."

나는 비아냥반, 자조 반으로 읊조렸다.
아니 잠깐만.

"것보다 내가 왜 백수야!"
"지 입으로 신나게 떠들어 놓고 이제 와서 뭐라는 거냐."

픽 비웃은 반 랜드레이는 발걸음을 더 재촉했다.
아오 저거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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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3-12 18:32 | 조회 : 702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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