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그게 아니라니까(3)

"저 쏩니다...! 진짜 쏴요...? 쏜다구요오...!"
"쏜다고 말을 할 거면 뭘 꺼내놓고 쏜다고 하던가...!"

나는 정령도 부르지도 않고 쏜다 타령을 하고 있는 레샤에게 한 소리했다.
쏘긴 뭘 쏜단 말인가, 숲속에서 불이라도 쓰겠다는 건가. 그건 내가 살고 싶다는 게 아니고 다 같이 죽자는 거였다.
애가 당황해서 정령을 부르는 걸 깜빡해서 망정이지 침착하게 셀라임이라도 불러냈다가는 큰일 한 번 제대로 치를 뻔 했다.

셀라임은 생나무에 불을 지를 수 있을까?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수풀 너머의 무언가는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버리는 것도 아니고 경계를 한다하기에는 너무 움직임이 많았다. 자꾸 부스럭 거린다는 거다.

이럴 때는 흔히 있는 이야기들이 있지 않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의문의 존재. 소리만 내면서 사람들의 공포심을 유발했으나 알고 보니 쥐. 그게 아니라면 토끼. 그것도 아니라면... 사슴이라던가. 정말 그마저도 아니라면 여우.
여우까지는 어떻게 무사히 넘어갈 자신이 있었다.

"그래 쏴버려! 뭐든 쏴버리라고!"

야우라가 주먹을 앞으로 내질렀다.
코볼트와 싸우고 난 다음이라 그런지 다들 안 그런 것 같으면서도 예민해져 있었다.

"나와주세요...!"

아니나 다를까 레샤가 정말로 셀라임을 불러냈다.
셀라임이 생나무에도 한 방에 불을 지를 정도로 화력이 강한지 지금 물어봐야하는 걸까.

셀라임에게 목표를 알려주기 위해 내밀어졌던 레샤의 스태프가 도루 뒤로 거두어졌다.

부스럭거리는 소리.
웬 기둥이 불쑥 튀어나왔다.
아니, 기둥이라고 하기엔 좀 작고, 그 형태가... 스우렌우나 같이 생겼다.
물 빠진 푸른 머리. 반밖에 없는 왼쪽 귀. 그래 틀림없는 스우렌우나였다.

"에엥? 스렌?"

가장 먼저 알아본 야우라가 소리쳤다.
수풀에서 튀어나온 건 진짜 순도 만땅의 실물 스우렌우나였다.

"네가 거기서 왜 나와...?"

이번엔 내가 물었다.
하도 기가차서 헛웃음이 섞여 나온다.

"아. 드디어 만났군. 다친 곳은 없는 건가."

스렌은 어께 위에 묻은 작은 잎 조각들을 털어내며 말했다.
태연히 덤불 속에서 나오는 모습이 다친 곳 없냐고 질문할 게 아니라 질문 받아야 할 거 같았다.

"그 안에서 뭐하고 있던 거야?"

왔으면 나오면 되는 거지 왜 쓰잘데기 없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느냐, 그런 의미였다.
괜히 힘 빠지고 옆구리 아프고 허탈하고 진땀만 빼고 손해 본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 발목에 덩굴이 걸려서 좀 처리하고 있었다."

스렌은 손에 들고 있던 끊어진 덤불을 잠깐 보여주더니 그걸 저 뒤편으로 던져서 버렸다.

"왜에! 갑자기 그런 답지도 않은 어설픔을 보이고 그래! 그런 거 하면 누가 귀엽다고 해줄 줄 알고?!"
"아니, 나는 그럴 생각은..."

내가 소리치자 스렌은 당황한 것인지 말끝을 흐렸다.

"그래 맞아! 징그러운 할아범탱 주제에! 분수도 모르고!"
"아니, 내 나이가 아직 그 정도는..."

그 사이를 치고 들어온 야우라에게 대꾸하기도 전에.

"이렇게 가슴만 졸이다간 제 명에 못 살 겁니다...! 못 살 거라고요...!"

레샤가 하늘을 향해 개탄했다. 차마 스렌에겐 말하지 못하고 허공에 지르는 게 뻔했으나 그 마저도 저 탓을 한다는 걸 안 스렌은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손가락만 까닥였다.

"음..."

잠시 그렇게 말을 고르다가 나온 말은.

"사과... 해야 하는 건가?"

질문이었다.

"그래 사과해!"
"맞아 맞아! 사죄를 요구한다!"

나랑 야우라가 동시에 말했다.
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받을 수 있을 때 받아둬야할 거 같았다.

"아...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끝내 사과를 하긴 했지만 스렌은 여전히 저가 왜 사과를 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눈치였다.

어찌되었건 셀라임이 생나무를 태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게 되었으니 천만 다행이었다.
언젠가 다음 기회가 또 찾아올지는 몰라도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고 앞으로도 가능하면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스렌 형제님이 여긴 어쩐 일이신가요? 혹시 미크로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우리가 사과를 받고서 정체불명의 통쾌함을 느끼며 웃는 동안 에반젤린이 제대로 된 질문을 했다.

사실 지금 우리가 무엇보다 더 쟁점으로 두어야 했던 건 사과 받는 게 아니라 미크로셀에 있어야 할 스우렌우나가 어째서 팔라슈, 그것도 안쪽에 와있냐는 것이었다.

스렌은 지금 비셔스 경의 임시 부관, 이 정도로 멀리 떨어진 곳에 홀로 왔다면 그건 개인의 판단이라기 보단 비셔스 경의 지시가 있었다고 보는 게 더 일반적이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스칸달른 용사는 어디에 있지?"

스렌은 그렇게 되물었다.

반 랜드레이 얘기가 나오면 급속도로 할 말이 없어졌기 때문에 방금 전까지 신나게 웃었던 나랑 레샤, 야우라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모르는 건가? 같이 갔던 게 아니었나?"

스렌은 담담히 다시 물었다.
별 수 없이 나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꿀렁꿀렁 입을 열었다.

"어어, 같이 갔었지... 어... 갔었는데. 어, 그, 저, 약간 의견 대립이 있었다고 해야 하나. 그..."
"레이크님이랑 싸우시고 챠라 자매님이랑 먼저 가셨어요."

내가 돌려 돌려 말했던 것이 무색하게 에반젤린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해버렸다.
판을 엎어도 그렇게 엎을 수가 없어서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 애를 봤지만, 에반젤린은 그저 미소 지으며 왜 보느냐고,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그래, 사실대로 말하는 게 제일이지...
뭐 다들 말로는 그렇게 하지.

"그럼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건가?"

스렌이 다시 나에게 물었다. 나랑 싸웠다고 했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 모르는데."

나는 사실대로 순순히 말했다.

"그럼 지도도 스칸달른 용사가 가지고 있는 건가?"
"당연히 그것도 걔가 가져갔지."

덕분에 조난당한 기분 제대로 느꼈었고 말이다.

"근데 반 랜드레이가 왜? 걔도 스칸달른에서 누가 잡으러 왔데? 그래서 가야 된데?"
"그런 건 아니다. 외부요인이 아니라 내부의 문제다."

내부문제라는 건, 우리를 말하는 걸까 아니면...

"아무튼, 너희라도 먼저 봤으니 다행이다. 이제 스칸달른 용사도 어서 찾아야겠군."
"아니, 뭔데 뭐냐고 말을 좀 해줘."

나도 머리로 생각할 수 있고 등뼈 튼튼하고 포크도 혼자 들 수 있는데 말 해줄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아, 그래, 그렇지. 너희들도 알아야하는 부분이다."

스렌 품 안에서 작은 종이 두루마리를 꺼냈다.

"전달해줘야 할 지도가 바뀌었다."

데엥... 데엥...

머릿속에 성당의 종소리가 울렸다.



대체 뭐가-

아주 오래 전, 이름 모를 한 사내가 있었다. 그 사람은 용병이었다고 한다. 그 이름이 널리 퍼져 온 대륙을 호령하진 않았어도 근방의 사람이라면 전부 이름을 들어 본 그런 사람. 그러나 기록되어지진 않는 그런 사람.
그런 탓일까, 안타깝게도 그 사람의 이름은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그저 검을 다룰 줄 알고 탐험에 조예가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전통적으로 용병은 서류에 이름을 남기지 않는다. 그건 의뢰의 보안을 위해서였다. 동시에 수행하는 용병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과거에는 그런 일이 잦았다고 한다.

다만, 지역 토박이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와 비슷한 필체가 적힌 낡은 의뢰서, 계약서가 같은 장소에서 잔뜩 발견되었다는 것으로 추정하는 거였다.

그 사람이 살고 있던 곳은 팔라슈의 남쪽, 렉쟈인이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지금은 팔라슈에서 내려오던 물줄기가 완전히 끊겨 마을이 사라져가고 있어 굳이 다른 곳으로 옮겨 살 의지가 없는 노인들 정도가 남아 있다고 한다.

그 용병의 이야기는 끈긴 물줄기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팔라슈는 바위산이었다. 다소 척박했으며 인근의 유일한 수맥이기도 했다. 하지만 개간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곳이다. 오로지 자연적으로 흐르는 물줄기만이 사용될 수 있는 곳이었다.

여신의 축복으로 문명이 부흥한 이래 사람들에게 척박한 곳이라는 것은 짐승들에겐 더 없이 평화로운 곳을 의미했다.
팔라슈는 야생의 궁전이었다.

그렇대도 사람들은 어찌어찌 저가 존재하는 곳에 살아남는 법이다. 렉쟈인 역시 그랬다. 그 당시 렉쟈인이 어떤 곳이었는지는 잘 모른단다. 누구는 번성한 곳이었다고도 하고 누구는 떠나지 못해 존재하는 곳이라고 하고.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터라 그건 알 수 없다고 한다.

처음으로 렉쟈인이 언급된 문헌을 발견한 것은 인근의 영주에게 보내진 편지였다.

'마을의 물이 끊겼으니 도와주십시오.'
이것이 일부나마 남아있는 내용이었으며 답장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 내용은 유추가 가능했다.

의뢰서와 계약서에 렉쟈인의 수맥과 관련된 내용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내용의 계약서가 많은 것으로 보아 수많은 사람들이 그 의뢰에 도전했고 가장 마지막 사람이 그 이름 모를 남자였기 때문에 그가 성공했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렉쟈인은 메마른 곳이었다.

"어... 그 남자가 실패했다는 거야?"

계속 걸으면서 이야기를 듣다가 아무래도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 용병은 실패했다는 것 아닌가.

"성공했을 거다. 그렇지 않다면 렉쟈인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겠지. 수맥이 다시 막힌 건 또 최근의 일이다."
"어... 옛날 얘긴 재밌어서 좋았는데 그러니까 여기가 케이드린이랑 관계가 없다는 거... 맞지?"

스렌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어쩌다가 지도를 잘못 준 거야?"
"미안하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했어야 했는데. 잘은 모르겠지만 지도가 중간에 바뀐 것 같다. 비셔스 경은 가지고 있는 축음단의 지도가 많다. 실수로 뒤섞이거나 헷갈려도 이상하지 않지."

아니... 그럴 수도 있긴 하지만 좀 너무하지 않냐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이건 폐기됐어야 할 지도라는 거다."
"지도를 폐기한다고, 왜?"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지형이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도 아니고 지도라는 건 한 번 그리면 천년만년 쓰는 거 아니었던가.

"그 지도는 호쿤투라마와 렉쟈인의 검이 기록된 거다."
"어... 호쿤투라마...?"

그리고 렉쟈인의 검이라고...?

"나도 잘 모른다. 그만큼 오래된 일이다."
"그럼 여긴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는 거야?"

"그걸 확인한 적이 없는 거다. 축음단은 지도를 하나 밖에 만들지 않는다."

즉, 비셔스 경이 이 지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건 아무도 그 표식이 있는 곳을 찾아가보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래서 스렌이 이렇게 급파되어 온 거구나.

"이건 사실 엑시스레코드를 토대로 만든 지도라더군. 그래서 실제 의미와 좀 다를 수도 있고 과장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지도는 레메른에도 몇 개 있다."
"엑시스레코드...?"

다들 아는 물건이지만 수도원 이후로 오랜만에 듣는 단어에 괜히 질색하는 소리가 나왔다.
하기야 웬만한 호사가가 아니고서야 누가 그런 동화 원문에 관심을 가지겠는가.
요새는 책으로, 신문으로 또는 이렇게 지도로 다 나온다.

"그러니까, 얼른 반 랜드레이를 찾아서 미크로셀로 돌아가면 된다는 거지?"

돌아가면 또 반 랜드레이랑 비셔스 경이 한 판 붙을 거란 생각에 벌써 질린 기분이 들었다.
그래봐야 이제 난 이 속죄의 구렁에서 손 떼겠지만.

"스칸달른 용사가 유능해서 오히려 걱정이다."

엥?

"걔 유능했어?"
"그 벽창호가 유능하다고?"
"그 불량배가... 정말입니까...?"

그 동안 봐온 모습이 나랑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인지 야우라와 레샤도 아리송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어머, 전 그냥 싸움만 좋아하시는 분인 줄 알았는데."

에반젤린마저 웃으며 말했지만 비슷한 감상인 모양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달리기로 따지자면, 난 이미 도착한 거고 스칸달른 용사는 이제 절반 온 거다. 거기에 의지와 의욕이 충만하지. 그 끝이 어디인지 가늠 되나?"

스렌은 담담히 말했다.
너무 담담해서 이걸 자기자랑으로 받아들여야하는 건지 헷갈렸다.
어쨌든 지는 그 끝에 도달했다 이거지?

우리가 어떻게 쳐다보든 말든 스렌은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문제는 역시 축음단이 지도를 하나밖에 만들지 않는다는 거다."

벌써부터 그 다음 말이 듣고 싶지 않았다.

"샅샅이 뒤지는 수밖에."

스렌은 예상한대로 이야기를 끝맺었다.

이 팔라슈에서, 코볼트도 튀어나오는 팔라슈에서 반 랜드레이를 찾아야한다는 거다.

어우, 아무리 그래도 앞날 창창한 용사님인데 그 정돈 알아서 하지 않을까?
...차마 인륜적으로 그렇게까지 묻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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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3-12 18:31 | 조회 : 657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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