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그게 아니라니까(2)

왔다면 벌써 왔을 시간이었기에 하는 수 없이 우리 쪽에서 야우라를 찾아갔다. 달리 연락할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적당히 때가 되면 돌아오겠거니 하며 기다리고 있을 상황도 아니었다.
우리가 봐두었던 작은 계곡은 멀지 않았다. 만일 야우라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 그 애가 소리를 질렀다면 들을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특별히 걱정하고 있던 것은 아니지만 왜 안 나타나는 건가 궁금하기는 했다. 그리하여 좁게 흐르는 작은 계곡에 도착한 우리는 개 중 작은 바위 위에 앉아있는 야우라를 볼 수 있었다. 그 애는 아주 작정하고 신발도 벗어둔 채 계곡 안에 발을 담그고 앉아 있었다.

잎사귀를 뚫고 새어든 햇빛을 받은 그 애의 머리칼은 신묘한 빛깔로 반짝였다. 무언가에 집중하는 듯 살짝 내리뜬 눈으로 물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 모습은... 영락없는 엘프다.
틀림없는 상상 속의 엘프였다. 그러고 보면 야우라는 한 겨울에 눈 맞은 똥개가 아니라 레메른이란 곳에서 온 엘프였다.

그러나 야우라에게는 굉장한 능력이 한 가지 있었으니, 아무 일 없이 잘 지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 아니꼽게 만드는 힘이 바로 그것이었다.
사실 그건 평소 행실의 문제지만.

멀찍이서 그 모습을 본 다른 애들의 표정도 참 식상했다.

"가서 데려와."

더 가까이 가기도 싫다는 듯, 반 랜드레이가 말했다.

그 순간만큼은 네가 뭔데 날 시켜먹냐라는 묘한 저항의식도 생기지 않았다. 나조차도 그냥 빨리 데려와서 한 소리하고 하던 일하고 싶었다.

나는 뛰다시피 한 걸음으로 물가 앞까지 갔다.
인기척을 느낀 야우라는 말도 걸기 전에 몸을 돌려 앉아 이쪽을 보았다.

"너 여기서 뭐해?"

내가 물었다.

"뭐하기는."

별 걸 다 묻는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를 하던 야우라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갑자기 소리 없는 웃음을 픽 터뜨렸다.

"있지? 들어봐봐. 내가 여기서 도롱뇽을 한 마리 봤거든? 그래서..."
"그걸 왜 잡아!"

안 들어도 무슨 내용일지 뻔한 이야기에 나는 끝까지 듣지도 않고 야우라의 말을 잘라 먹었다.
그래서... 하며 잡으려고 하다가 여태 여기 있었다는 얘기하려는 것 아니냔 말이다.
대관절 도롱뇽을 봤으면 본 거지 그걸 왜 잡느냐고.

내가 그렇게 소리부터 지를 줄은 몰랐던 것인지 잠시 주춤했던 기세를 곧 회복되었다.

"왜에에! 한 손으로 도롱뇽 잡기가 얼마나 힘든데! 네가 한 번 해볼래? 넌 자빠진다?"

야우라는 부목을 대고 있는 오른팔을 휘두르듯 내밀며 성을 내었다.
넘겨짚은 부분은 사실이었던 건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그건 잠시 밀어두더라도 왜 적반하장인지 모르겠다.
부러진 건 아니더라도 다친 팔로 노력한 자기 고생을 왜 몰라주냐고 말하는 거 같은데, 그딴 고생 알고 싶지 않았다. 거기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건만 서럽다 못해 억울한 척까지 하니 짜증이 팍 오른다.
그렇게 아프면 얌전히 있으면 될 것이지...

"...됐고. 물통이나 줘봐."

더 얘기해봐야 내 속만 더 타들어 간다.
야우라는 선뜻 물통을 내게 넘겨주었다. 의외로 얌전한 품새에 의심스러웠지만 물 뜨러 가서 도롱뇽 잡는 거보다 더 기상천외 한 게 있을까 싶었던 나는 뚜껑을 열고 물을 들이켰다.

"거기 도롱뇽 들었는데."

야우라의 한 마디에 머금고 있던 물이 풍선 터지듯 격하게 튀어나왔다.
사레들린 목구멍이 바늘로 찌른 것처럼 따끔거린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여기다 도롱뇽을 왜 넣어!"

채집통이 없으면 없는 거지 사람 물 먹는 통을 채집통 삼아 도롱뇽을 넣는 건 대체 무슨 뭐하는 짓이냐고.
얼른 물통을 햇빛 가까이 가져다 대고 적당히 기울여 안쪽까지 햇빛이 들어가게 만들었다. 물통 안에 도롱뇽은 보이지 않았다. 안 보인다기보단 아무리 물통을 돌려봐도 어두워서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흔들어 봐도 알기 힘들었다.

나는 야우라를 힐끗 노려보았다. 그런 짓을 하고서도 실실 대던 그 애는 나랑 눈이 마주치더니, 핳하! 하고 짧고 크게 웃음소릴 내었다.

"뻥인데."

뿐만 아니라 뻥인데, 뻥인데, 하고 계속 사람 속을 박박 긁고 있었다.
나는 별 말 없이 입 속에 물을 가득 넣었다. 그런 다음 넋 놓고 웃고 있는 야우라의 얼굴에 흩뿌려 뱉었다.

"아아악! 야아...!"

기고만장해 있다가 물벼락을 맞은 야우라가 비명을 지르며 도끼눈을 뜨고 날 노려보았다. 그럼 어쩔 거란 말인가, 지금 야우라는 오른팔을 다쳐서 절대로 내가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게 방심이었다.
야우라는 왼손으로 잽싸게 물통을 빼앗았다. 그리고 고개를 젖혀들고 남은 물을 전부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이후에 무슨 일이 있을지 직감적으로 느낀 나는 헐레벌떡 도망가기 시작했다.

"음움! 음움우...!"

뒤쫓아 오는 야우라가 웅얼거렸다. 뭐라고 하는 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대강 예상되는 말로는 거기 서, 아님 넌 죽었어, 두 가지 정도가 떠올랐다.
어느 쪽이든 따라잡히면 안 된다는 거다.

계곡을 따라 달리던 나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다른 애들이 있는 쪽으로 달렸다. 반 랜드레이 녀석은 정말 진지하게 정색을 할 테니까 안 되고, 챠라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못 한다 쳐서 슥 지나가니, 그 다음으로 눈에 띈 건 레샤였다.

내가 저에게 달려간다는 걸 눈치 챈 시점부터 레샤는 도망갈 방향을 찾기 위해 눈동자가 무지막지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그냥 흔들리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방향을 결정하지는 못했다.
걔는 그런 애였다.

"으아아아...! 뭔가요, 갑자기...! 왜 저한테 그래요...!"

나는 레샤의 어께를 눌러 잡고 그 뒤에 숨었다. 형편없이 작은 방패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 세상에 설마 아무 짓도 안 한 애한테까지 물을 뿌리는 몰상식한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아니.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과연 그 야우라조차 입에 머금은 물을 뱉지 않고 레샤를 사이에 둔 채 나랑 대치했다.

"우웁우움 움 웁움."

야우라가 옹알거렸다.
물이라도 뱉고 말하던가,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저렇게 말하면 누가 알아듣는단 말인가.

"예에...? 비키라고요...?"

놀랍게도 레샤가 알아들었다.
야우라의 암호를 해독한 레샤는 슬쩍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어... 레이크...?"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무래도 놔달라는 거 같은데 마음 같아선 나도 그래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걱정하지 마. 나만 믿어. 아무리 야우라라도 설마 무고한 소녀에 물을 뱉겠어?"
"아... 할 거 같은데요...?"

그래도 난 레샤를 놓지 않았다.
그 때부터 뭔가 심상찮다고 느낀 레샤는 빠져나가기 위해 조금씩 몸을 흔들었다.

"이거 좀 놔주시겠습니까...? 저... 가야 한다고요...? 가야 한단 말입니다...!"
"가긴, 너 혼자 어딜 가는데."

"잇, 그, 저기... 그, 그런 데가 있습니다...! 아무튼 얼른 놔달라고요...!"

하지만 놓으면 나는 바로 물을 맞는다.

"움!"

크게 소리를 내 주의를 주목시킨 야우라는 엄지부터 중지까지 세 개의 손가락을 펼쳐보였다.
뭐지, 하는 순간에 중지가 접혔다.

셋을 세겠다는 거다.
벌써 두 개 남았다.

"으히익...! 놔요! 얼른 놓으라고요...! 왜 저한테 그러는 겁니까...!"

이리저리 팔을 휘젓던 레샤가 기겁을 하며 팔을 뒤로 뻗어 내 양 옆구리를 꼬집었다.

"아아, 아아아, 아!"

비명을 지르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 엄지가 접히고 검지 하나만 남아있었다.

"레이끄으....!"

단말마.


그리하여-

오늘의 나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한 가지 얻게 되었다. 그건 생존과 굉장히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는데 의외로 어려운 부분이 아니었다.
다른 게 아니라 원소계 정령술사한테는 물싸움 걸지 말라는 것이다. 잘못하면 나이아스한테 죽기 직전까지 갈 수 있다.
진짜 죽기 직전까지.

"으으흐으 으흐흐흐으..."

온 몸이 흠뻑 젖어 부들부들 떠는 야우라.
그 애는 이상한 신음을 흘리며 제 무릎을 껴안아 웅크리고 있었다.

"킁...!"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콧물이 자꾸 흐르는데 이 물이 내가 만든 물인지 주입당한 물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온 몸이 젖은 채로 숲의 바람을 맞는 건 무지막지하게 추웠다는 것이다.
그래도 아예 물에 빠진 생쥐 꼴을 만들어 버린 건 조금 심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레샤는 셀라임도 잠깐 불러내어 모닥불을 피워주었고 나랑 야우라는 사이좋게 그 앞에 앉아 화해했다.
겉으로는.

뭐, 가끔 따가운 시선끼리 서로 부딪히긴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은 없었다.

"대체 뭘 하는 거냐..."

드디어 할 말은 고른 것인지 반 랜드레이가 말했다.
한 참 전부터 한심하다 못해 경멸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말을 안 하고 있었다.
어쩌면 당장 말하면 너무 심한 욕을 할까봐 나름대로 배려해준 것일지도 모르지.

"그런 거 물어보지 마라..."

스스로도 비참한지라, 그렇게 대꾸하는 수밖에 없었다.

"네 임무가 뭔지는 기억하는 거냐?"

임무? 임무라.
틀림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의 내 임무는.

"당연하지. 내 임무는 레샤 레스트레이드님의 옷을 말리는 거거든. 아주 명확하지."

나는 아주 평이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물이 잔뜩 튄 후드로브는 나랑 야우라가 맡게 되었다. 안 그래도 지금 한 쪽 면이 다 마른 거 같다.

"야, 돌려."

나는 반대편을 잡고 있는 야우라에게 말했다.
한 짓이 있는지라 그 애는 얌전히, 또 조심스럽게 레샤의 로브를 잡은 손을 어떻게 잘 바꾸어 로브를 뒤집었다. 다친 팔로도 용케 그런 걸 한다.
어쨌거나 원래 불을 쬐던 면이 반대편으로 갔으니 더 빨리 마르겠지.

"시간 낭비도 이런 시간낭비가 없군."

반 랜드레이의 어금니가 또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너 그런 식으로 말하는 버릇 안 고치면 나중에 나이 먹고 이빨 금방 닳는다?"
"그건 네가 걱정할 바가 아니다."

"아휴, 알았어. 옷만 마르면..."
"됐다, 필요 없어."

반 랜드레이는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 때까지도 조금 무심하게 굴었던 나는 슬쩍 녀석의 눈치를 살폈다.
눈에 핏발이 서지도 않았고 목에 힘줄이 솟지도 않았다. 그저 목소리만 부글부글 끓는 게, 왠지 더 위험해보였다.

"너희들은 그냥 집으로 돌아가라. 뮤리엘 비셔스는 걱정하지마라, 알아서 잘 둘러대지."

그러고는 휙 돌아서 가버렸다.

"뭐, 뭐, 뭐뭐뭐?"

나는 멍청한 소리를 내었다.
말로만 그렇게 하다가 정말로 실천해버리니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반! 굳이 그럴 것까지는..."

오히려 챠라가 녀석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러는 너도 집중 못하고 있는데. 급료라도 까내려야 정신 차릴 건가?"
"아하... 그래요. 그냥 두고 가죠, 뭐."

챠라는 재빠르게 태세전환해 반 랜드레이를 따라갔다.

"랜드레이 형제님!"

그나마 대우를 해주던 플라나 사제, 에반젤린이 불러도 반 랜드레이는 멈추지 않았다.

진짜 가버리는 거야?
어안이 벙벙했다.
솔직히 우리 실없는 짓이 오늘따라 심하긴 했지만...

"잘 됐네."

야우라가 말했다.

"뭐가 잘 돼."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어 나는 그렇게 되물었다.

"어? 아아, 잘 말랐다고."

야우라는 반 랜드레이가 아니라 레샤의 로브를 이리저리 보면서 말하고 있었다.
나도 단 하루만이라도 얘처럼 살아보고 싶다. 진짜 편할 텐데.

"저렇게 두 분이서만 가셔도 괜찮을 까요?"

에반젤린이 사뭇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뭐... 원래도 둘, 아니, 셋, 아니 그냥 둘이라고하자. 나는 힐끗 야우라에게 향했던 눈길을 거두었다.
아무튼 본래 둘이서 다니던 파티였으니 큰 문제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진 않았다.
그보다는 우리가 문제지.

"그럼 우린 그냥 돌아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

에반젤린의 뒤 쪽에 숨어있던 레샤가 말했다.
왜 숨어있던 거지.
그거야 어련히 이유가 있겠거니 싶더라도 지금 레샤가 한 말엔 심각한 오류가 있었다.

'그냥' 돌아간다니.
돌아가서 뮤리엘 비셔스 경에게 들키지 않고 보수를 받을 수 있느냐 마느냐, 보다도 그 전에 해결돼야할 문제가 있었다.

"너 여기 길 알아?"

나는 레샤에게 물었다.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레이크가 알아야지?"

레샤는 그게 아주 당연한 것처럼 굴었다.

"잘 봐. 우린 길을 몰라. 근데 지도는 반 랜드레이가 가져갔어. 우리 물건을 실은 말은 사라졌고 한 마리 남은 건 반 랜드레이가 데려갔겠지? 우리 중에 그나마 길눈이 밝았던 건 챠라였는데 챠라도 반 랜드레이 따라 갔잖아?"

남아있는 우리 모두에게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럼, 어떻게 돌아갈 거야?"

돌아갈 방법이 없다. 아니, 돌아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법도 있고 새로운 길을 찾아도 되고. 다만 돌아가는 길엔 코볼트 무리가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고 새로운 길을 찾는 건 그저 운에 맡긴다는 거나 다름없었다.
반 랜드레이 녀석도 너무 화가 나서 뒷일에 대해 생각 안 하고 우릴 두고 가 버린 거다.
나도 막연히 좀 힘들겠지만 돌아갈 순 있겠지 생각하다가 방금 떠오른 거다.

그제야 사태 파악을 한 야우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야 그럼 어떡해!"
"뭐, 능선이 보이니까 방향은 알 수 있으니 걷다보면..."

"말도 안 돼! 용사님 도와줘요오!"

야우라가 왼손만으로 손나팔을 만들어 저 멀리 소리쳤다. 나는 얼른 레샤의 로브를 잡아 당겨 힘들게 말려 놓은 게 더럽혀지지 않도록 잘 말아 잡았다.
야우라의 간절한 외침 후... 당연히 반 랜드레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걔, 용사 아니야. 내가 오늘 정했어. 누구냐고 물어보면 동네 기둥서방질 하는 놈이라 그래야지. 결혼은 두 번 했고 이혼은 세 번 했는데 아이가 없는 속 빈 강정이라고 할 거야."

퍽 빈정이 상한 야우라가 무지막지한 막말을 중얼거리며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어떻게 결혼을 두 번 했는데 이혼은 세 번 하는 거지.
궁금했는데 왠지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그, 그, 그, 그럼... 그럼 저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 글쎄에?"

레샤의 물음엔 그렇게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모른다. 내가 어떻게 아나.

우선은 옷을 말리는 게 먼저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랑 야우라가 시시한 한탄을 계속하며 옷을 말리는 동안 레샤는 제 로브를 다시 입었고 에반젤린은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기도라도 하는 걸까.

그래, 차라리 기도라도 하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자칫하다간 정말 오늘 여기서 야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없이, 맨손으로.

"먹을 거라도 구해야하는데."

내가 말했다.

"그래, 이왕이면 맛있는 걸로 구해다 줘."

야우라가 답했고.

"지, 지, 진짜로 여기서 야영하려고요...? 레이크 제정신입니까...?"

레샤가 질색을 했으며.

"그래요. 이런 때일수록 식사는 든든히 해야죠."

그나마 에반젤린이 내게 있어 긍정적인 얘길 해주었다.
제일 심한 녀석은 가만히 앉아서 맛있는 거 구해오라는 누구겠지?
근데 팔 다친 애라서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일단 모닥불도 피웠고 근처에 계곡도 있으니까, 여길 캠프 삼을까?"
"그래서 뭐 먹을 건데?"

그런 건 됐다는 듯 야우라가 딴 소리를 했다.
결국 나는 역정을 내었다.

"뭐, 맛있는 게 먹고 싶으면 네 오른팔이라도 뜯어먹어."
"뭐어?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너, 식량이 부족해지면 나부터 잡아먹겠다?"

악! 귓가를 찌르는 고성. 레샤가 버럭 소리쳐 우리의 대화를 막았다.

"왜 그런 얘길 하고 그래요...! 이거 그거잖아요, 그거...! 동료들이 사소한 말다툼으로 균열이 생기고... 그래서 화가 난 레이크가 화장실을 간다고 혼자 나가는데 그 때 바로 우악! 하는 그거요...! 복선이잖아요, 복선...!"
"복선은 무슨 복선!"

안 그래도 오늘 있었던 최고의 복선은 셀라임의 체류한계 시간이었는데 싫은 체 하면서 괜히 어려운 말로 제일 불길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 때 어디선가 나뭇가지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소리 같은 것하고는 분명히 달랐다. 애초에 그런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고 있지도 않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돌 모래가 차이는 소리, 작은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틀림없이 뭔가 오고 있는 거다.

"왔다, 왔어! 레이크 저녁밥이 왔어!"

내 어께를 붙잡고 뒤에 선 야우라가 작게 호들갑을 떨었다.

"저녁밥이라면서 왜 내 뒤에 숨냐...!"
"거봐요...! 복선 회수잖아요... 회수...!"

대답은 듣지도 못 했는데 레샤도 내 옆구리 살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아니, 얘는 맨날 그랬다 쳐도.

"대체 뭘까요...?"

에반젤린까지 내 뒤에 숨었다.

"저기, 얘들아. 미안한데 나 갑옷 같은 거 안 입었거든. 근데 왜 다 내 뒤에 숨어?"
"왜요... 레이크도 했잖아요...!"

아, 그 부분에 대해선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다쳤으니까."

야우라는 당당하게 밉살스러운 얘기를 했고.

"다들 그렇게 하시길레요."

에반젤린마저 그렇게 말했을 때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면 결정했다.

만약 저 소리가 나는 곳에서 뭔가 튀어나온다면 나는 전력을 다해 도망가야지.
그 누구도 내 뒤에 숨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도망갈 것이다.

그러는 중에도 소리는 점점 가깝고 또렷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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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3-12 18:31 | 조회 : 692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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