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는 의외의 곳에서(4)

웅성거리던 소리가 잦아들고 곧 연극이 시작되었다. 어두컴컴한 단상, 아니 무대라고 했었지? 아무튼 그 무대 위에 흐린 빛이 한 소년을 비추고 있었다.
저거 솔쥬얼로 저렇게 만든거냐고 물어보려고 했던 나는 슬며시 내밀었던 몸을 다시 바로 세웠다.

이것저것 물어보면 촌놈인 거 티 나잖아.
심지어 그 나스 경도 조용히 있었다.
내가 떠들고 있을 수는 없지.
살짝 눈동자를 굴려 나스 경의 눈치를 살폈다. 뒤에 서있는 기엔 경의 손이 나스 경의 어께를 지긋이 누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손에 힘줄이 빳빳히 서있다.

억제하고 있는 건가...?
그건 그렇고 나스 경도 앉아 있는데 선배인 기옌 경은 왜 뒤에 서있는 거지.

-"그렇다면 내가 태양을 되찾아오겠소!"

저 밑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 소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이곳까지 닿는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에 참 대단한 목소리였다.
그 레샤가 저 정도 소리를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충동적으로 오긴 했는데, 역시 좀 지루하네."

뮤리엘 비셔스라던, 기옌 경보다 높은 사람인 것 같던 그 여인이 말했다.
조용한 공기에 홀로 붕 뜰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그럼 다른 곳에 들리시겠습니까?"

기옌 경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아니. 내가 오자고 해서 기옌이 티켓까지 구한건데 그럴 순 없지."

거기에... 라며 비셔스 경은 이쪽으로 흘깃 눈을 흘겼다.

"론데미르 분들 앞에서 그러면 실례 아니겠어?"
"저희는 괜찮으니 연극이 재미 없다면 돌아가시죠."

토렌 씨의 대꾸는 어쩐지 매우 딱딱했다.
정작 론데미르 가의 사람인 트리샤는 대본과 연극에 빠져 이 쪽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있었다. 나스 경도 마찬가지고.
기옌 경만 추락 중인 꽃병을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하하, 거슬렸다면 미안하군. 너무 신경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연극이 재미없다는 게 아니라 단순히 이런 게 적성에 안 맞는 거니까."

비셔스 경은 여유롭게 말을 이어나갔다.

"이런 작은 극단까지 지원 하다니, 그 쪽 주인 어른께서 참 좋은 일을 많이 해. 러너스 하이 아니면 누가 이런 일을 하겠나. 혹시 경비대를 지원할 계획은 없는 건가? 애들이 좋아할 거 같은데."
"저희야 그러면 좋겠지만 감히 그럴 수는 없지요."

토렌 씨는 의례적으로 웃음 소리를 내었다.

"저희가 지원한다고 경비대가 기사단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아하하. 맞아, 기사를 만드는 건 고유한 정신이지 돈이 아니니까. 론데미르도 그걸 잘 알고 있으리라 믿네."

-"그렇다면 이 비를 그치게 하면 태양을 되찾을 수 있다는 건가?"

소년의 목소리에 두 사람 약속이라도 한 듯 이야기를 그만두었다.
왠지는 모르지만 가시가 잔뜩 돋혔다고 느껴지는 대화가 끝나자 나도 비로소 연극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레샤는 언제나오는 거야.

"오, 날씨가 정말 실감나는군."

비셔스 경은 이야기보다는 시시각각 변하는 무대의 환경에 더 관심을 보였다.

"기옌, 미크로셀 경비대 애들도 저런 걸 할 수 있을까?"
"예? 연극 말씀이십니까? 그런건 갑자기 왜..."

"시키면 재밌을 거 같아서. 아하하."

글쎄 잠깐 무대 뒤를 본 이력이 있는 내 소견으론 할 수 있는 건 둘째 치고 하기 싫어할 것 같았다.

"부디 그런 장난은 삼가주시죠... 난리납니다."
"그것보단 말이야, 저번에 얘기했던 그 레이크 아이힐데른이라는 꼬마. 아직 여기에 있다지?"

"예. 딱히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어보였습니다."
"그 친구랑 얘기 한 번 해보고 싶은데 괜찮을까?"

"알겠습니다. 자리를 마련해보도록 하죠."

음... 못들은 척 하기로 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저 아줌마, 라고 하기엔 좀 젊지만 나한테 위협이 되는 사람은 그냥 아줌마였다. 아무튼 엮여서 마음 편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따라서 자리도 좀 더 끝 쪽으로 옮겨 토렌 씨를 벽 삼아 숨었다.

"그 자식 백수니까요."

그러나 그 행동이 무색하게 기옌 경이 뒤에서 나타나 어께에 손을 짚었다.
여기가 극장만 아니었으면 면전에 대고 소리질렀을 것이다.

"아니 사람이 모른척 하면 같이 모른 척해주는 게 인지상정 아니에요?!"

결국은 질렀다.

"그리고 백수라는 말은 왜 나한테 와서 한데? 진짜 너무하네...!"

여기가 극장 안이란 걸 가까스로 기억해 내 목소리는 줄였지만.

"너야말로 지인이 곤경에 처했으면 아는 체 하는 게 인지상정 아니냐."

기옌 경은 저쪽까지 들리지 않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기옌 경도 저, 한 번도 봐준 적 없잖아요."
"두 번이나 봐줬지. 직업이 없어서 양심도 없어졌냐?"

다시 생각해보니 두 번이나 잡히긴 했어도 두 번 다 아무 일 없이 풀려난 것도 사실이었다.

"그 직업 얘긴 안 넣으면 문장이 안 만들어져요?"
"좋아... 그럼 그 얘긴 안 할테니까, 가자고."

"왜요... 저 사람 되게 높은 사람 아니에요? 엄마가 높은 사람이랑은 엮이지 말랬는데. 팔자 망가진다고."
"비셔스 경은 이미 네가 누군지 알아. 나름대로 배려해주신거다. 나중에 진짜 팔자 망가지기 싫으면 지금 가는 게 좋을 걸. 제발 부탁한다."

협박인지 부탁인지 헷갈린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말하니 또 마냥 거절하기도 뭣해서 나는 비셔스 경이 있는 소파의 옆에 섰다.

"아아?"

고개를 돌린 비셔스 경은 이 녀석은 누구지? 하는 얼굴로 기옌 경을 보았다.
이미 날 알고 있다는 사실을 미리 들어서 그런 것인지 그 표정이 굉장히 과장되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레이크 아이힐데른 군입니다. 극장에 있던 걸 방금 우연히 봤습니다."
"아아."

비셔스 경은 느지막히 탄성을 지르며 미소를 지었다.

"인사드려라. 뮤리엘 비셔스 경이다."

역시 기사였다.
경비대에선 한 번도 못봤는데 경비대 계급도가 어떻게 되더라.
기사단장 밑에 경비대장 밑에...

"경비대 분이세요?"

잘 기억 안 나서 슬쩍 기옌 경한테 물었다.

"중앙 기사단 분이니까. 인사부터 해..."

기옌 경이 핏발 선 눈으로 짓이겨 말했다. 친한 것처럼 어께를 잡은 손에도 바짝 힘이 들어갔다.

세상에 중앙 기사단이라니 어쩌다가 그런 분한테까지 내 소문이 흘러들었지.
혹시 나도 나만 모르지 실은 유명인인 거 아니야?

"아... 안녕하세요."

망상은 그쯤해두고 꾸벅 인사부터 했다.

"이 친구가 그 스칸달른 용사 코피를 냈다던 그 친구 맞아? 영 패기가 없는데?"
"예, 이 녀석이 그 친구 맞습니다."

라고 웃으며 말하던 기옌 경은 대뜸 내 옆구리를 쳤다.

"야, 뭐라도 좀 해봐."
"아니 그렇게 갑자기 뭘 해보라고 해도 저 분 코피를 낼 수도 없고..."

그렇게 휘파람 한 번 불어봐 하는 느낌으로 시킬 게 아니었다.

"아하하, 얘 맞아요."

조용히 있던 나스 경은 그렇게 덧붙이더니 다시 연극에 집중했다.

"뭐 반 랜드레이 그 녀석도 어지간히 안됐구만. 이런 친구에게 당해버리다니. 거기에 무직이라고..."

비셔스 경은 쿡쿡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니 왜 갑자기 시비실까.

"아니 왜 갑자, 긱!"

내 불순한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기옌 경이 내 오금을 걷어차고 넘어지려던 내 몸을 끌어당겨 도로 일으켜 세웠다.
말없이 노려보는 눈이 저번에 칼집었을 때보다 더 무서웠다.

"죄송합니다. 얘가 가끔 이렇게 발작을 해서."

아니 이봐요. 라고 딴지를 걸기도 전에 비셔스 경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다리를 꼬아 앉으며 똑바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괜찮아, 난 이 친구가 마음에 들어. 그 콧대 높은 스칸달른의 용사를 혼내준 동네 청년이라. 아하하하."

그 사람의 눈은 편하게 웃고있었지만 어쩐지 스스로의 매무새를 살피게 만드는 힘이 서려있었다.

"혹시 기사 지망생인가?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비셔스 경이 처음으로 나에게 직접 질문을 했다. 그러면서 내 팔을 잡아올려 꽉 눌렀다가 힘을 푼다.
꼭 두께나 강도라를 확인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아뇨 딱히 그건 아니고..."
"그럼 용병?"

"아뇨 그것도 아닌데요..."
"그럼 뭐지?"

나는 팔이 훅 당겨지는 감각에 속절없이 앞으로 끌려갔다. 비셔스 경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그 사람을 꿰뚫는 듯한 눈동자가 더, 더, 더 크게 보였다.
괜히 입의 침이 마른다.

"그냥 이것저것 하면서 근근히 생계를 이어나가는..."
"이것저것?"

비셔스 경은 요모조모 살피듯 내 뺨을 손가락으로 누르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손가락을 입안에 넣고 턱을 내려 이빨을 보기도 했다.

"뭐... 집주인한테 빈다거나... 성당의 일을 돕거나... 아, 저 쪽 러너스 하이에서 심부름을 하기도 했죠..."
"심부름? 예를 들면? 알려줄 수 있겠나?"

"창고에서 쥐를 잡거나... 던전에서 약초를 찾는 정도의..."

왜 순순히 대답하고 있는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저 거짓말하면 안될 거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 단지 그것 때문이었다.
어떤 위협도, 회유도 없었건만 그저 마주보고 있는 그것만으로도 그렇게 되어버렸다.

"아하하, 그런 일을 하면서 용병은 아니다?"

슬며시 미소를 짓던 비셔스 경은 내 얼굴을 놓아주고는 저쪽의 소파를 향해 물었다.

"어때요, 론데미르 양. 이 친구 쓸만하던가요?"

그에 대한 대답은 토렌 씨가 했다.

"아가씨께서는 연극에 집중하고 계시니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레이크 씨는 의뢰받은 일을 아주 성실히 수행하셨습니다."

잘했다고는 안 해주네.
도리어 적당한 대답을 들은 것인지 비셔스 경의 시선은 다시 나에게 향했다.

"좋아, 내 눈을 보고 똑바로 보고 말하는 아이는 오랜만이야. 정말 마음에 들어. 안심하고 일을 맡길 수 있겠군."
"네에?"

난데없이 진행되는 이야기에 나는 조금 벙찐 소리를 내버렸다.

"휴가를 나와서까지 따분한 건 슬프잖니."
"아 예, 예... 그렇죠... 휴가는 짧으니까. 즐겨야죠..."

나는 3개월 동안 휴가였지만.
잠깐만 일을 맡긴다고?
그게 무엇인지 체 묻기도 전에 비셔스 경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기옌 경의 어께를 두드리며 말했다.

"기옌, 자네는 나스랑 여기 있다가 연극 끝나면 돌아가서 쉬어. 오늘 비번이잖아?"

비셔스 경은 뚫어져라 무대를 보고있는 나스 경을 눈짓으로 가리키고는 아래로 내려갔다.
배웅하는 둥, 마는 둥, 적절한 단어를 고르지 못하고 답지않게 혀를 씹던 기옌 경은 나스 경의 뒤통수를 툭쳤다.

"엇?!"

상관이 가는 것도 모를 정도로 집중하고 있던 나스 경은 번뜩 놀라며 주위를 살피다가 홀로 서있는 기옌 경을 보고선 일단 웃어보였다.

"집중도 적당히 해야될 거 아니야."
"아하하, 아하하하..."

잔소리하던 기옌 경의 시선은 다시 나한테 향했다.

"너도 참..."

그리고는 거기까지만 말하며 소파에 앉아 한 숨을 흘렸다.
탄식이라기보단 힘들어서 나온 것 같았다.

"왜요, 뭔데요."
"너 앞으로 시간 많이 비워놔라."

"왜요, 왜. 뭔데?"
"아 시간은 원래 많으니까. 괜찮겠구나."

"아니 뭐냐고. 야 나 반말하고 있다, 지금?"
"그래도 돼, 내가 오늘은 봐주마. 마음껏 즐겨."

뭐냐고...!
그러나 내 혼란을 잠재워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남은 연극을 보는 것 뿐이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주인공 제크는 비를 부르는 공주님의 저주를 풀어내고 무사히 왕국의 태양을 되찾았다고 한다.
이야 잘됐다. 잘됐어. 잘되긴 뭐가 잘됐어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거 같은데.
마지막 악당이 개구리 마왕이었던 건 둘 째 치고 마왕이라면서 화염마법 한 방에 나가 떨어진 것까지 셋 째치더라도... 레샤가 안 나왔잖아!

레샤는 커녕 비슷한 체격의 여자애 한 번 안 나왔다.

연극이 끝나는대로 두 기사는 홀가분하게 퇴근해버렸고 론데미르의 아가씨는 시찰을 계속하려고 하기에 나는 그쪽을 따라가 레샤를 찾았다.
여기서 레샤가 일한다는 건 트리샤에게도, 토렌 씨에게도 금시초문인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이 원래 있던 방에 가만히 기다리고 앉아있어보니 곧 문이 열렸다.

"아... 혹시 수행인이신가요? 그럼 이것좀 레샤 양한테 전해주세요. 아! 남아서 주는 거라고 해야되요?"

모르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 사람이 주고 간 과자를 천천히 씹으면서 계속 기다렸다. 어차피 걘 안 먹을테니까 이렇게라도 준 사람한테 보답을 해줘야지.

그 다음 문이 열렸을 때는 완전 시커먼 담요더미가 유유히 걸어들어왔다.
담요더미는 제 몸을 이리저리 비틀더니 곧 그 껍데기를 벗어 레샤를 뱉어냈다.

로브를 입은 체 그 위에 또 검은색 로브를 입고있던 그 애는 죽어가는 소릴 내며 날 의자에서 밀어냈다.

"야 밑에 걸 벗고 입었어야지."

나는 얌전히 의자에서 비키고 핀잔을 주었다.
미련해도 저렇게 미련해도 되나 싶다.

"벗어놨다가 누가 집어가면 안 되잖아요..."

허 참내.
그건 그렇다치고.

"그런데 너 한 번도 안 나오더라?"
"예에...?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더워서 그런 것인지 레샤는 질문만으로도 짜증을 내었다.

"아니, 그렇게 열심히 대본 외웠는데 한 번도 안 나왔잖아. 뭐 지가나는 행인 같은 거 했냐?"
"예에? 전 그런 거 안 한다구요...?"

얼씨구 좀 잘 나간다 이거야?

"그럼 뭐 했는데."

한 번 들어나보자는 식으로 묻자 레샤는 잠시 고민하더니 손가락을 꼽기 시작했다.

"태양하고... 비하고... 돌풍1하고... 돌풍2하고... 마지막 불 마법도 제가 했죠...?"

그리고는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비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든지나 알아요? 제가 없었으면 양동이 수 십개씩 나른다고요...?"

결과적으로 아무 일도 없었던 건데 이 공허감은 대체 뭐지.

"왜 그래요...? 아까 돈 안 준다고 그래서 그러는 거에요...?"

레샤가 물었다.

"레이크...? 진짜 돈 때문에 그래요...? 네? 말 좀 해봐요오...!"

나는 레샤가 흔드는대로 내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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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19 09:41 | 조회 : 113 목록
작가의 말
죄수번호53425854

눈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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