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는 의외의 곳에서(2)

레샤는 종이뭉치를 읽느라 여념이 없었다. 딱히 나를 상대해주지도 않았다. 그저 종이를 한 장 한 장 훓을 뿐 불러봐도 대꾸하지 않고 앞에서 손을 흔들어봐도 고개를 돌렸다.
삐져서 그런 건지, 정말 집중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전자든 후자든 건드려서 좋을 게 없었으므로 나는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그러는 편이 여기가 뭐 하는 곳인지 알아내는데 훨씬 이로울 것이란 생각에서 였다.

종이에 얼굴을 박은 레샤가 알지 못 할 정도로 조용히 나는 걸음을 옮겼다. 살짝 문을 열자 어쩐지 후덥지근한 공기가 느껴졌다.
누군가 벽에서 살짝 튀어나간 그 문에 부딪혔다.

"열거면 열고 말거면 말아요!"

어떤 여성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들렸다.

"아 죄송합니..."

나는 황급히 사과하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봤지만 이미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좁은 복도는 오가는 사람들 투성이에, 모두 바빠보였고 그것만으론 부딪힌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이런 이야기하면 조금 이상하겠지만 조금 주눅들어버렸다.
분위기에 압도되었다고 하나, 뭔가 함부로 나서면 안될 거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호기심과 공포심 가운데 선택해야만 했고 나는 호기심을 골랐다.

좁은 복도는 그리 길지 않았으므로 나는 금방 빠져나올 수있었다.
예의 그 넓은 공간은 이제 더 이상 넓은 공간이 아니었다. 갖가지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쌓여 조심스럽게 걷지 않으면 발 뻗는대로 물건이 차이는 잡동사니의 바다를 건너 도착한 곳은 높은 단상이었다. 어찌나 큰지 내 키보다 커서 처음엔 담벼락인 줄 알았는데 양 옆에 계단이 있는 걸 보고 단상이란 걸 알았다.

"비켜요, 비켜. 길막고 서있지 말고."
"아, 예예."

큼지막한 봉을 어께에 맨 남자가 으름장을 놓았다. 계단을 막지 말라는 거였다. 따로 비킬 곳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계단을 오르는 것으로 비켜서는 걸 대신했다.

단상은 엄청 넓었고 이상한 사다리들이 세워져있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가로막고 있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암막.
나는 바보가 아니다. 이쯤되니 어렴풋이 감이 왔다. 그래도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럴 리 없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암막 사이를 열고 슬쩍 얼굴을 내밀었다.
의자가 있다. 의자가 있었다. 사람도 몇 명 있었다. 앉아서 기다리는 사람들.

아니야 침착해라 레이크 아이힐데른.
레샤잖아. 네가 알고있는 레샤 레스트레이드는...

잘못봤다고 생각했기에, 확실히 다져두기 위해 다시 한 번 암막을 들췄다. 그러나 이번엔 그 너머를 보기 전에 뒤로 넘어질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누군가 뒷깃을 잡아챘다.
한 순간에 뒤로 끌어당겨진 나는 뒷걸음질로 겨우 넘어지지 않고 버텼다.
버티기만 했지 고개는 회까닥 올라가 거꾸로선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함부로 들춰보지마. 그럴 시간에 가서 저거나 옮겨."

아저씨는 내 깃을 흔들어 날 바로 세우고는 뒤편의 분주한 곳을 가리켰다.
머리가 빠지기 시작한 것인지 갈색 머리를 짧게 자른 덩치 큰 아저씨, 근육질, 험악한 표정.
판단은 순식간에 끝났다.

"예? 아니 저는 어..."
"네가 어디 소속이든 상관없으니까 일단 저것부터 해."

당연히 그 판단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었다.

"아, 예예."

하는 수 없이 눈빛으로 등 떠밀려 하게 된 일은 크고 작은 나무 판자들을 단상 위로 옮겨놓는 작업이었다. 넓적한 판의 뒷면 나무받침를 덧대어 혼자 설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앞면엔 여러가지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게 나무, 열매달린 나무, 가지만 남은 나무, 빨간 벽돌 담벼락, 하얀 벽돌 담벼락...
이거 그거잖아? 그거 할 때 쓰는 그거잖아. 그거... 그거!
왜인지 모르게 난 멈춰 서버렸다.

"뭐야, 멍하니 서서 뭐해?"

예의 그 아저씨가 내 어께를 툭쳤다.

"이럴 시간 없어..."

아저씨의 목소리는 묻히고 대신 주변의 다른 소리들이 점점 귓바퀴를 가득 메워갔다.

"그거 다 옮겼으면 이쪽으로도 좀 와!"

"시간 얼마나 남았지? 벌써?"

"카트린느 양이 아직도 안 왔어?! 아직도 안 오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그러고 맹하니 있지 말고 차라리 사람을 보내봐."

"여기 있는 랜턴 어디갔어? 뭐? 누가 발로 찼다고?"

"이거 여기다 가져다 놓은 놈 누구야!"

"오늘 그 사람들이 온다고? 일반석? 미쳤어?"

어쩐지 붕 떠버린 기분이었다.
복잡하고 시끄럽고 다들 중요한 얘기를 하는 거 같은데 나는 딱히 쓸모없지 않나 하는 그런...
나는 이런 일은 적성에 안 맞는 걸까.
그런 혼란 속에서도 어느 한 단어가 똑똑히 들렸다.

"솔쥬얼이 어디 있는데? 뭐? 아, 오늘 레샤 양 오는 날이었어?"

"레샤가 대기실에 와있다고? 이따가 잠깐 들러야지."

"그러면 오늘은 좀 쉽게쉽게 가겠네. 아, 심심하지 않게 나가서 사탕이라도 사올까?"

"그런데 레샤 양은 그런 거 안 받잖아."

"어? 왜?"

"부담스러워하는 거 같던데."

"레샤 양이 이런 건 좋아하려나?"

레샤, 레샤, 레샤, 한 번 언급되자 그 곳은 온통 레샤 얘기 뿐이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다고...

나는 들고 있던 판때기를 바닥에 내팽겨치고 단상을 달려 내려갔다.

"아닛, 야! 일하다 말고 어디가?!"

붙잡으려는 아저씨의 손을 피해낸 나는 쉬지 않고 달렸다. 달리고 달려서 공터를 나갔고 좁은 복도를 지나 레샤가 기다리는 방으로 들어갔다.

벌컥 문이 열리자 그 소리에 놀란 것인지 레샤는 움찔 놀라며 눈을 크게 치떴다. 그러고는 나인 걸 알아서인지 이내 원래대로 돌아온다.

"뭔가요, 갑자기... 깜짝 놀랐잖아요...!"

더 깜짝놀란 건 나야...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전력질주를 한 탓에 숨이 차서 우선 숨을 골랐다.

"언제부터야..."

어느정도 진정하고 나서, 내가 말했다.
아직 평탄치 못한 숨이 목소리에 섞여 나왔다.

"뭘... 말입니까...?"

레샤는 한심하다는 듯 눈을 내리 뜨고선 되물어왔다.
이 녀석 오늘따라 표정이 풍부하네.
이제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다는거냐, 그런 거냐!

"너 언제부터 이런 딴따라가 된거야!"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갑자기...!"

"오빠는 널 그렇게 키운 적이 없다!"
"뭔 소립니까, 저 외동이라고요...?"

"언제 나를 두고 그렇게 멀리 가버린거냐고오!"

분에 받친 나는 레샤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너는 항상 외톨이일 줄 알았는데!"
"뭔가요, 지금 선전포고하는 겁니까? 저 반격합니다...? 반격할거라고요...!? 지금 스태프 잡았어요?!"

"난 연극같은 건 본 적도 없는데! 너는!"

그 시골에서 연극 볼 일이 어디있었겠나, 그저 이야기로 들었던 거랑 풍경이 똑같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내 검술 선생이었던 토비 아저씨는 말이 드럽게 많은 걸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었다. 당연히 젊을 적 겪었던 얘기는 적어도 네 번씩 들었다. 그런 단련이 아니었으면 난 쿤투아마 씨에게 화를 냈겠지.
아니 냈던가.
아무튼, 나는 구경 한 번 못해봤는데!

"그걸 왜 저한테 그러는 겁니까..."

스태프는 말로만 잡은 건지 맨 손이던 레샤는 내 머리를 덥썩 잡았다. 내가 레샤를 잡아 흔들면 그 힘이 그대로 전해져 레샤가 내 머리를 쥐어뜯게 되는 구조.

이 녀석 제법 머리를 썼구나, 하지만 난 지지 않는다!
라고 잠깐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금방 그만두게 되었다.

"안 그래도 이거 때문에 머리 아픈데 왜 레이크까지 그래요."

레샤는 종이 흔들어 보이며 투덜거렸다.

"너, 인기 좀 있다고 되게 비싸게 군다?"
"지금 비꼬는 거죠... 그렇죠?!"

짜증난다는 듯 목을 쭉빼고 인상을 찌푸린 레샤는 옆에 세워둔 스태프로 나를 쿡쿡 찔러댔다.

"아, 아, 야 이거 진짜 아파, 진짜로."
"그럼 가짜로 아프라고 찌르겠습니까...!"

뒤로 무르고 물러서 결국 벽까지 내몰린 나는 벽에 뒤통수를 부딪히지 않기 위해 손을 벽에 짚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공허감, 문은 열려 있었고 나는 바닥에 넘어졌다.

문을 연 건 한 여성이었다. 갈색 생머리를 방해되지 않게 묶은 여자. 그 사람은 나는 안중에도 없는 듯 안으로 들어와 레샤에게 갔다.

"레샤 양, 이 쿠키. 다들 먹다가 남은 건데 레샤 양에게도 줄게요. 그럼 바쁘니까 이만!"

그렇게 제 할 말만 하고 여자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자칫하면 발걸음에 차일 기세이기에 얼른 일어나 비켜앉아 다행히 다치지는 않게 되었다.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가버린 여자를 뒤로하고 방 안에 남아있는 건 미묘한 리본이 매듭지어진 커다란 종이봉투였다.
...남았다고 하기엔 좀 많다.

그걸 물끄러미 보고 있던 레샤는 조심스럽게 종이봉투를 좁은 방 구석에 내려놓았다.

"안 먹냐?"

다른 건 몰라도 과자는 좋아하던 녀석이 저러니 이상했다.

"예...? 이걸 어떻게 먹어요...! 레이크는 어디가서 함부로 이상한 거 받아먹지 말라는 말 못 들어봤습니까...?"

그냥 이상한 정도가 아니었네.

"아니 우리 집은 누가 뭐 주면 당연히 받아먹는 주의였다만... 지금 그게 아니잖아! 아까 그 분이 너 먹으라고 주고 간 거잖아!"
"당연히 먹으라고 주겠죠...!"

"그럼 먹어!"

레샤는 말이 안통한다고 생각한 것인지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후드를 눌러쓴 다음에 말을 이었다.

"남은 거라잖아요..."
"남은 거 줘서 기분 나쁘다고?"

"어떻게 이 만큼이나 남아요..!"

레샤는 바닥에 놓은 쿠키 봉투를 가리키며 숨죽여 소리쳤다.
그래 확실히 남았다는 핑계 치고는 그 크기가 컸다.

"이거... 그거잖아요...! 먹기 싫으니까, 마음에 안드는 사람 몰아주는 그거잖아요...!"
"아니... 그건 아닌 거 같은데..."

그거 너가 예전에 부담스럽다고 거절한 적이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 거 같던데.

"그게 아니어도...! 왜 주는 겁니까, 이걸 갑자기...?"
"줄 수도 있지 뭘..."

"레이크 그 셔츠의 단추 하나만 줘요, 그냥."
"뭐? 이걸 왜 달래, 어따 쓰게?"

나는 셔츠 깃에 매달린 두 개의 단추를 가리듯 손으로 잡았다.

"거봐요 레이크도 그냥은 안 주잖아요. 다 그런 겁니다...!"
"아니 이게 지금 그거랑 같냐?"

그 와중에 다시 한 번 문이 열렸다.

"아, 레샤 양. 이거 먹다 남은 쥬스인데 여기다 두고 갈게요."

예의 그 여자가 이번에도 목소리만 흔적처럼 흘리고는 컵을 두고 갔다.

잠시 침묵.

"저거 봐요...! 남은 건 다 나한테 가져오잖아요...!"
"아니, 아무리봐도 새 건데?"

나는 바닥에 놓여있는 컵을 집어들어 살펴봤다.
바닥에 두고간 건 내가 보기에도 조금 아니었지만 테이블이 없으니 그렇다쳐도 이 쥬스는 분명히 컵의 9할정도를 채우고 있었다.
이거 몇 번을 봐도 새거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샤는 잔뜩 음영이 낀 얼굴로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요... 여기 사람들은 저를 쓰레기통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갖다주면 뭐든지 다 먹어치우는 바보돼지라고 생각하는 거라고요...!"

중증 중의 중증인거 같은데.

"거기다가 이거 봐요...! 레이크가 없는동안 이런 걸 주고 갔다고요...!"

레샤의 손바닥에 들려있는 건 작은 머리핀이었다.
그런데 그 모양이.

"해골이잖아요, 해골...! 무슨 의미냐고요, 이거...!"

선물 준 사람의 취향 문제라고 생각해,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건 괴롭힌다고 착각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뭐, 레샤의 검은 오라야 늘 그러니 넘어간다 치더라도.

"너 그럼 여태까지 받은 건 어떻게 했어?"
"예? 아... 이렇게 로브 안에 숨겨넣어서..."

레샤는 자세한 설명을 위해 직접 쿠키 봉투를 로브 안에 넣어보였다.
옷이 불룩 튀어나온 게 너무 티난다.
그냥 보면 영락없이 좋아하는 걸 뺏기기 싫어하는 꼬마애였다. 그러니까 많이 주는 거구만.

"...몰래 밖에다 버렸습니다."

상상 이상으로 쓰레기 같은 대응 방법에 나도 모르게 질린 표정을 지어버렸다. 그래도 제딴엔 제법 심각해 보여서 나는 얼른 그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가렸다.
다른 방향에서 접근을 해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래도 그런 건 아닐걸? 너 왔을 때도 막 되게 잘 해주고 먼저 인사해주고 지나가라고 하고 그랬잖아."
"그래요, 세상물정 모르는 레이크는 그게 전부 좋게 보이겠죠..."

나는 한 대 쥐어박으려던 주먹을 애써 등 뒤로 감췄다.

"그건 제가 여기 처음왔을 때도 그랬어요..."

레샤는 회상하듯 고개를 들었다.
대체 어떻게 고개를 들어도 저렇게 그림자가 진 것처럼 보일수가 있는 걸까.
아무튼 그 애의 말은...

"저 그 때 분명히 실수 했는데... 실수를 했는데... 다음에도 또 왔으면 좋겠다고 그러고... 자주 오라고 막 그러고... 고맙다고 막 그러고...!"
"좋네, 엄청 좋구만 대체 뭐가 문제인데."

"그러니까 레이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겁니다...! 딱 봐도 오지 말라고 눈치주는 거잖아요...!"
"네 머리통이 문제였네!"

"그래요... 제 문제입니다... 그래서 여기오는 횟수도 조금씩 줄이고 있다구요..."

레샤는 의기소침하게 말을 끝맺었다.

글쎄, 나는 그 이상 고민하기를 그만두었다.
뭐 어떤가, 레샤도 나랑 같이 백수가 되면 적어도 내 마음은 편해지는 거였다.
그런 거 있지 않은가 동지가 있다고 느낀 순간, 왠지 이것도 나름대로 괜찮지 않나? 하는 안도감이 드는 그런 것.

우리의 실랑이가 잠시 소강 상태로 들어갔을 무렵, 밖에서 급하게 노크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레샤 양, 시간 됐어요. 슬슬 나오세요."

그 한 마디만 남기고 인기척은 또 사라졌다.

"저봐요... 같이 가자고도 안 해주잖아요...!"
"그럼 너는, 그렇게 말하면 같이 갈 거였냐?"

들려온 대꾸는 간단했다.

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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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19 09:40 | 조회 : 121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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