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 못 들어보셨습니까?"
나긋나긋 흐르는 목소리.
레샤는 의자에 바른 자세로 앉아 진리를 설파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지당하신 말씀이라 어떻게 대꾸할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어쩐지 항상 입고다니는 로브도 오늘따라 더 묵직하고 힘있어 보이는 것이 함부로 말 걸면 안될 거 같고 손짓 한 번이면 바닥에 납작 조아려야만 할 거 같은 그런 모습.
아니 ''같은 모습'' 따위가 아니다. 오늘의 레샤는 그래도 된다. 그래도 되는 사람이다.
마땅히 그리하여 그 권위로 나에게 자비를 배풀어 줄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많이 달라는 것도 아니니까. 조금만 빌려줘, 조금만. 응? 내가 부탁한다, 어?"
나는 여왕을 마주한 상인처럼 무릎을 꿇고 손바닥을 비볐다.
먹고 살아야하지 않은가? 사람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 따라서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자신보다 어린 친구에게도 얼마든지 굽실댈 수 있어야한다는 뜻이었다. 괜히 아침부터 레샤의 방에 와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다.
"이는 이미 예정된 사태이지 않습니까.... 레이크? 레이크는 이렇게될 걸 진작 알고 있었다고요."
여왕님은 무섭도록 시린 눈으로 날 내려다 보며 말을 이었다.
"에반젤린 사제님도 늘 말씀하셨잖아요. 일 좀 하라고."
"노력했어, 노력했는데..."
일단 말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어허."
레샤는 손을 들어 제지 의사를 표하는 것으로 내가 입을 다물기를 바랐다. 약자의 신분인 나로선 순순히 따르는 수밖에.
지금 망치든 칼이든 뭐든 들고 있는 쪽은 레샤였다.
"어제 뭘했는지는 이미 야우라한테 다 들었습니다. 어제밤에 생각한대로 레이크는 저를 찾아왔군요..."
아 내가 잘못한 거지만, 저 거드름 피우는 말투 정말 듣기 싫다.
"요새 레이크가 골라주는 로망소설도 영 시원찮고..."
"그건 취향 차이지, 취향차이! 네가 고르라고, 네가!"
그 이야기만큼은 너무 억울해서 나는 손바닥으로 바닥을 두들기며 말했다.
사람이 같은 걸 보고서 서로 의견이 다를 수도 있는거지 그걸 왜 나한테 따지느냔 말이다. 그럴거면 추천해달라고 하지말고 지가 직접 헌책방에 가면 해결되는 일이다.
그런데 그건 곧 죽어도 싫다고 박박 우기면서 이럴 때만 기고만장해져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으니.
"네가... 라고요?"
"아니요, 레샤님... 말이 헛나왔습니다."
그 담담한 한 마디에 곧장 꼬리를 만 나는 입맛을 다시며 뒤통수를 긁었다.
"어쨌든 돈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래 좀 도와줘라, 응?"
잠시 자기 후드를 비벼 옆통수를 문지르던 레샤는 의자에서 일어나 서랍장으로 갔다. 그리고는 째려보며 말했다.
"보지마요."
비밀 공간을 열테니 보지 말라신다.
"아, 예예."
나는 고분고분 뒤돌아 눈을 감았다.
부스럭부스럭하는 소리가 몇 차례인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 레샤로부터 눈을 떠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아까처럼 의자에 앉아있는 레샤의 모습. 차이점이라면 갈색 가죽주머니를 들고 있다는 것. 그 애는 주머니를 열어 안을 보았다. 과연 얼마나 빌려주실수 있을까.
고대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주머니를 들여다보던 레샤의 얼굴에 갑자기 음영이 짙어졌다.
"뭐야? 왜 그래?"
내가 묻자 레샤는 얼른 주머니를 등 뒤로 감췄다.
입 싹 다물고 딴 데 보고있지만 뭐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한 번만 보자."
나는 레샤의 후드를 꾹 잡고 말했다.
"왜... 왜 레이크가 남의 재산에 관심을 가지는 겁니까...?"
"그냥 한 번 보자고."
그게 정말 궁금한 일이라도 되는양 묻긴했지만 그 말이 그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레샤 또한 느끼고 있는 듯 했다.
"싫다면요...?"
"아니이, 꺼드럭대는 걸로 봐선 당장 하늘그림이라도 살 수 있을 것 같길레 얼마나 있나 궁금해서."
"남한테 돈주머니 함부로 보여주는 거 아니라고 했습니다..."
"어엉? 그건 누가 한 얘기냐, 셀라임? 실프? 누구? 불러와봐. 얼굴 한 번 보자."
"뭔가요, 갑자기...! 정령들이 레이크가 보고싶다고 해서 얼씨구나 나오는 친구들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레샤는 조금씩 조금씩 논점을 흐리려고 하고 있었다.
평소엔 어땠을지 몰라도 오늘만큼은 통하지 않는다.
사람이 먹고사는 문제로 농락당하면 아주 무섭게 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했다.
"뭐든간에 빌려줄 돈 없다는 거잖아?! 어?!"
나는 레샤를 앉아있는 의자 째로 번쩍 들어올렸다.
그 상태에서 조금 흔들어주자 질색하는 비명이 머리 위에서 우렁차게 터져나왔다.
"떨어진다! 떨어진다고요...! 저 떨어져서 머리라도 깨지면 레이크가 고쳐줄겁니까...!"
물론 난 에반젤린처럼 치유 마법같은 거 쓸 줄 모른다.
"내 무릎 값은 어쩔거야! 바닥에 착 달라붙어있던 내 무릎은 위자료를 원한다!"
대신 다른 할 말이 있었다.
"저 일하러 가야되요. 일하러 가야한다고요! 내려줘요 빨리...!"
레샤의 다급한 변명에 나는 우뚝 멈추었다.
홧김에 하긴 했지만 의자와 함께 드는 것만으로 체감상 두 배는 더 무거운 것 같다.
"일 하러 간다고?"
난 흔들던 의자를 차분히 고정시키고 잠시 생각해보았다.
"그래요... 일하러 가야한단 말입니다... 빨리 내려줘요... 빨리...!"
레샤는 등받이에 매달려서 흐느꼈다.
일하러 간다라, 그러고보면 레샤는 항상 자기는 정기적으로 받는 일감이 있다며 내 앞에서 잘난체를 하곤 했다.
아무래도 그 얘기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거 돈 어떻게 받아?"
나는 레샤의 의자를 머리에 이고 양 손으로 받쳐 지탱에 안정감을 더 했다.
"예에...? 일당으로 받는데... 왜요...?"
협상의 기미가 보이자 레샤는 최대한 차분하게 대꾸했다.
"현장에서?"
"네..."
나는 레샤를 내려줬다.
금새 화색을 보이는 레샤, 그러나 내가 단순히 내려주려고 그런 건 아니다. 스태프를 가지고 들고있는 자세를 바꾸기 위해서였다.
나는 레샤의 스태프를 찾아 등에 맨 다음 이번엔 오른손으론 의자의 밑을 잡고 왼손으론 등받이를 받쳐 더 편하게 들어올렸다.
내려준 줄 알고 방심하고 있었던 레샤의 두 눈이 튀어나올듯 커진다.
"뭔가요, 갑자기...! 깜짝 놀랐잖아요...!"
"갑시다. 레샤님."
나는 그대로 레샤를 데리고 성큼성큼 밖으로 나와 복도를 걸었다.
"뭔데요, 뭐냐고요...!"
"돈 벌러 간다며."
자세를 바꾼 탓인지 들고 있기 편해진 나는 비교적 여유롭게 답할 수 있었다.
아니면 기분이 좋아져서 제대로 못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설사 그렇데도 상관없지만 말이다.
"내려줘요, 창피하니까...!"
"싫은데."
나는 레샤의 의견을 깡그리 무시하고 레스토랑으로 나왔다.
"너희... 뭐하는 거야...?"
테이블을 정리하던 클로에가 우릴 발견하자마자 질색을 했다.
"오왓! 뭐야? 그거 나도 해줘!"
덤으로 끼어있는 야우라는 신나서 가까이 오려했지만 이내 클로에에게 진압당했다.
"으아아! 내려줘요, 내려달라고요...!"
"아니 오늘은 이거다! 이걸로 돈을 벌거야!"
"이거 그거잖아요...! 멋대로 마차를 닦은 다음 돈 달라고 하는... 그거잖아요...!"
"좋잖아, 찾아가는 서비스란 그런거지."
"누가 좀...!"
레샤가 뭐라고하든 나는 의자를 들고 하늘그림 밖으로 나갔다.
거리로 나오자마자 레샤는 완전히 조용해졌다. 눈에 띄고 싶지 않아하는 거 뻔히 알지만 의자를 든 남자 위에 앉아있는 여자애라니 장님도 무심결에 고개를 돌릴 광경이었다.
여러가지 시선들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닌 레샤를 향한 것들이었다.
하하, 아무리 창피해도 함부로 움직였다간 정말로 떨어질테니 레샤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얌전히 앉아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세상을 외면하는 것뿐.
하지만 그것마저도 원하는대로 할 순 없었다.
그야 그럴게 나는 레샤가 어디서 일하는지 모르니까.
"야, 이제 어느 쪽으로 가야 돼?"
나는 슬며시 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레샤는 목소리는 내지 않고 그저 팔을 조금 움직여 방향을 가리켰다.
제 딴에는 창피해서 그런 거겠지만은 분명 그 모습이 더 높으신 분 같아 보였으리라.
그리하여-
시내의 골목길까지 나를 인도한 레샤는 손 짓으로 멈추기를 지시했다.
"어서 가마를 내리십시오... 하등한 이여..."
이제 다 포기한 듯, 레샤는 소설 속 건방진 귀족처럼 읊조렸다.
나는 얌전히 의자를 내려주었다.
내려주고 나니 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께도 쑤시고 팔도 무지하게 저린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오늘 어마어마한 단련을 한 것이리라.
"여기야?"
나는 쑤시는 어께를 붙잡고 돌리며 물었다.
"그래요... 그렇다고요...!"
레샤는 아직도 화가 나있는 것인지 대뜸 성질을 내었다.
하긴 내가 한 짓이지만 그러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여기서 뭐하는데?"
"그걸 레이크가 알아서 뭐하려고요..."
정말 화가 많이 난 거 같아서 난 피식 웃으며 문을 열고 그 애의 어께를 밀어 안으로 들여넣었다.
"돈 달라고 안 할테니까 일단 들어가자."
물론 빌리긴 할 거지만.
들어간 건물의 내부는 한 눈에 보기에도 이리저리 물건을 옮기는 사람들로 분주해보였다.
어 뭐지? 한 눈에 감이 오지 않는 광경.
레샤가 물건 옮기는 일을 하러 온 건 아닐테고 그렇다고 딱히 뭔가 다른 모습이 보이진 않았다.
옮기는 물건들도 뭔가 잔뜩 들어있는 상자, 커다란 커튼, 커다란 막대, 나무 판자, 이상한 깃털장식 등등 종잡을 수 없다.
빠른 걸음으로 마구 지나치던 중 우리는 길다란 나무기둥이 지나가려고 하기에 우뚝 멈춰섰다.
그런데 둘이서 들고 옮기던 사람들도 같이 멈추었다. 개 중 앞에 있던 사람이 레샤에게 말을 걸었다.
"아, 레샤 양 왔군요. 먼저 지나가세요."
레샤는 슬쩍 고개를 꾸벅일뿐 다른 말은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묵묵히 앞으로 걸었다.
"야, 여기 뭐하는 데야?"
내가 물어도.
"따라오기나 해요..."
퉁명스럽게 대꾸할 뿐이었다.
어느샌가 우리는 좁은 복도를 지나고 있었다. 거기 역시 사람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지만 아까와는 조금 달랐다. 딱히 짐을 옮기는 풍경은 없고 말끔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쉴새없이 떠들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 중에도 이따금씩 인사를 해오는 이가 있었지만 레샤는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고개만 꾸벅이고 재빨리 지나쳤다.
그 사람들도 딱히 레샤를 더 붙잡거나 하진 않았다.
"아 레샤 양! 이쪽입니다, 이쪽."
처음으로 적극적으로 레샤를 찾는 남자의 목소리.
그는 복도 끝의 문 앞에서 이쪽으로 오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갈색 곱슬머리에 소매를 걷어붙인 셔츠, 베스트는 단추가 풀려있어 아무렇게나 벌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에선 예의가 없다는 인상이 아닌 어지러움, 급함, 실속이 느껴졌다.
우리가 가까이 오자 그는 문을 열어주며 레샤를 안으로 들여보내려 했다.
"그런데 이 분은..."
내가 끝까지 쫓아오려 할 줄은 몰랐다는 듯 그 남자는 뒤늦게 나를 가리켜 물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미쳐 생각하지 못한 것인지 레샤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어... 음... 하는 말문 막힌 소리만 계속 내었다.
"아, 수행인인가 보군요. 레샤 양 정도라면 수행인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죠. 실례했습니다. 들어가시죠."
남자는 때를 놓친 뱃사람처럼 우리를 방 안으로 밀어넣고 저도 따라 들어왔다.
방 안은 별 거 없었다. 아니 특이한 점이라면 거울이 있다는 것정도. 전신을 비출 수 있을만큼 크고 긴 거울이었다. 그리 의자 하나. 그게 다였다.
레샤는 정해진 수순처럼 의자에 앉았고 남자는 들고 있던 종이뭉치를 레샤에게 건내주었다.
그 때까지도 난 멍청하게 서있기만 했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평소처럼 해주시면 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읽어서 확인해보시고요. 혹시 저희가 알아야 할 부분이 있을까요?"
남자는 엄청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솔직히 나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어..."
레샤는 으레 그랬듯 바로 말을 꺼내지 못하고 고개만 저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폭풍이 지나가 듯, 남자는 끓는 기름처럼 말을 쏟아내고는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뭐야...?"
나는 얼빠진 놈처럼 중얼거렸다.
"뭐 말입니까?"
레샤는 남자에게서 받은 종이를 한 장씩 훓어보며 대꾸했다.
"여기 뭐하는 데야?"
"안 알려줄 겁니다..."
"야, 내가 오늘 네 수행인이라는데 좀 알려줘라."
나는 살짝 웃어보이며 물었지만 레샤는 여전히 꽁해있었다.
"스태프나 좀 돌려주시겠습니까...?"
스태프는 로브와 함께 레샤가 정말 제 몸처럼 지니는 물건 중 하나였기 때문에 나는 얌전히 매고있던 스태프를 벗어 레샤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면서 슬쩍 레샤가 보고 있는 종이를 곁눈질로 보았다.
'' "나는 여기에 있을 수 없소." ''
'' 퇴장하는 소년. ''
'' "기다려 줘요.'' "
'' 소녀는 소년을 붙잡는다. ''
...이게 뭔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