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바랐던 것(7)

이제 문을 열면 어떻게 될진 아무도 모르는거다.
나는 문고리를 잡고 심호흡을 했다.

"거기 용사지망 이력이 있는 형제니임...! 우선 준비를 하자고."

기운 빠질 정도로 나른한 이젤 에텔리어의 목소리, 그 호칭이 거슬리지 않을 수 없다. 아니 거슬리는 정도가 아니라 무진장 마음에 안 들었다.

"무슨 준비요. 시간도 없다면서."

막말로다가 쓰러지기 직전인 주제에 말도 많다.
짜증나는 사람은 말이 많든 적든 짜증난다는 걸 오늘 새삼 깨닫게 되었다.
아 잘됐네 잘됐어. 정말 잘됐다.

"시간이 없으니까. 딱 한 번뿐인 거잖아. 확실히 해야지."

이젤은 정론을 펼치며 테이블 앞으로 움직였다. 그리고는 그 아래를 가리키며 나한테 명령했다.

"부숴봐."
"직접해요, 직접! 바로 앞에 서 있으면서 너무 당당하게 시키네."

"누구 떄문에 다리가 아파서."
"아, 진짜!"

일단 소리쳤지만 그렇다고하니 딱히 할 말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테이블 앞으로 갔다.

"진짜 부숴요?"
"그래, 다리 한 쪽만 부수면 돼."

테이블은 이미 많이 낡아있었기 때문에 옆으로 뉘어 발로 차는 것만으로 쉽게 부숴졌다.

...띠리링! 레이크 아이힐데른은 나무막대를 획득했다!
속으로 외쳐봤지만 딱히 신나지는 않았다.

"이걸로 어쩌자고요."

기껏 물었건만 이젤의 신경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져 있었다. 바로 작은 선반 서랍장이다.

"맨 밑에거 열어 봐."

나는 군소리없이 서랍을 열었다. 안에 들어있는 건 와인병처럼 주둥이가 긴 유리병이 전부였다.

"이건 뭐에요?"
"랜턴에 쓰는 보충용 오일. 다음은... 그 위에 거 열어봐."

"띠리링! 레이크 아이힐데른은 기름을 획득했다."

다음 서랍을 열기 전에 우선 획득선언을 했다.

"뭐냐."

그 행동을 기이하다고 생각한 건지 이젤이 조금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그 표정이 참 뭣하다.

"아뇨 그냥, 입으로 내봐도 신나진 않네요."
"그래 뭐든간에 열어 봐."

밑에서 두번째 서랍 안에는 쇠로된 짧은 꼬챙이 여러개와 대패, 그리고 철사와 시커먼게 잔뜩 묻은 더러운 헝겊조각들이 있었다.
무슨 손질 도구인 것 같았다.

"헝겊하고 철사 꺼내. 그거면 되겠다."

띠리링...
까지 중얼거리긴 했지만 거기서 그만두었다. 실없는 짓을 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속절 없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로 했다.

"이걸로 어쩌게요?"

내가 물었다.

"딱 보면 모르냐?"

이젤은 대뜸 성을 내었다.

"횃불 만드려는 거잖아. 시키면 시키는대로만 하지말고 생각을 좀 해."
"저기요 저도 어디가면 똑똑하다 소리듣는 남의 집 귀한 아들이거든요?"

"알았으면 똑똑하게 만들어봐, 빨리."

하는 것 없으면서 이러쿵저러쿵 말만 많다.
어쩌다 저런 인간을 사제로 만든건지 그 대주교라는 사람도 참 사람 보는 눈 없다 싶었다.

어쨌거나 횃불은 확실히 유효하고 유용한 도구가 될 터였기 때문에 나는 주섬주섬 테이블 다리에 헝겊을 두텁게 감고 그 위에 다시 철사를 감았다. 그 다음엔 오일을 헝겊에 오일을 들이부었다. 적당한 대야가 없어서 맨바닥에 대고 들이부었지만 헝겊은 얼추 기름을 먹은 것 같았다.

"이제 됐죠? 갑시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불 붙여야지, 불!"

이젤이 벽에 걸려있는 랜턴을 가리키며 딴지를 걸었다.
기껏 횃불 만들어놓고 그냥 가려고하니 짜증을 내는 것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이쪽에도 이쪽 나름대로의 이유가 다 있는 법이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헝겊에 살짝 손을 대는 것으로 불을 붙였다. 이그니션.

"됐죠?"

한 방 먹은 듯 멍하게 헛숨을 뱉은 이젤은 더 이상 아무말 하지 않고 내 어께 위에 팔을 걸었다.

"뭐에요?"
"갑시다, 목형발제님."

쯧, 하여간에-

우리는, 아니 한 명은 제 힘으로 걷는 게 아니니, 나는 이젤 선도사를 부축하고 밖으로 나왔다. 횃불은 랜턴이나 내 마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불길이 강해 주변을 훤히 비추었다.

크르르...!
짐승이 제 목을 긁는 소리가 들린다. 불빛 안에 모습을 드러내진 않지만 어렴풋한 그림자는 계속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신경 쓸 거 없어. 본당까지 계속 걸어."

망설였던 기색을 눈치챈 것인지 이젤이 어께에 올린 팔로 내 몸을 살짝 밀었다.

"그냥 무턱대고 가도 되겠어요?"

쫓아낸다던가 마주 본다던가 하는 조치없이 계속 걸어거도 문제 안 생기겠냐는 질문이었다.

"코요테는 보통 가족 단위 사냥을 해. 그런데 저 녀석은 지금 혼자야. 추적을 교대 해주는 동료도 없고 몰이사냥도 못 하는데, 공격까지 전부 혼자 해야 돼."

그 말인 즉슨.

"게다가 처음에 목이 아니라 팔을 물었잖아. 당황하고 있는 거야. 형제님이랑 똑같은 초보자인 셈이지."
"그럴 줄 알았는데 대뜸 달려들면요."

"동물을 바보라고 생각하지마. 저 놈들은 밥먹고 어떻게 살아남을지만 생각하는 것들이야. 계속 생각해. 사냥은 계속 생각해야만 성공할 수 있어. 사냥꾼하고 사냥감이 머리싸움을 하는거야."

그렇게 말한데도 갑자기 코요테의 머리속을 읽으라는 건 조금 무리한 요구였다.

"어딜 노리는 걸까, 언제를 노리는 걸까. 내가 아니야, 상대방을 생각해. 사냥은 그렇게 하는거야. 어때 감이 와?"
"선도사님은요?"

솔직히 아무 생각이 안 나서 그렇게 되물었다.

"미안하지만, 난 지금 머리속이 하얘서."

아까 말했듯 졸리지 않기 위해서인지, 이젤은 끊임없이 말했다.

"사냥감의 가장 취약한 부위는 어디일까. 어디로 몰아야 자세가 무너질까. 시야각은 얼마나 될까. 지금도 날 보고 있을까. 그 놈이 우리 주위를 배회하면서 하는 생각이야."
"어떻게 알아요, 얘기라도 해봤어요?"

너무 자신있게 말하길레 난 그렇게 물었다.
이 불통의 화신이 동물하고 얘기를 하는 건 좀, 뭐 쏠리는 광경이 아닌가.

"내가 활 쏘기 전에 짚는 목록이야."

아. 그, 그러시구나...

"그럼, 본당에 갈 때까지 안 달려들수도 있겠네요."
"형제님은 본인이 그렇게 빈틈 없다고 생각하나봐?"

"예컨데 하는 얘기죠, 예컨데."
"흐응, 딱히 그렇지도 않아. 꼭 완벽하지 않아도 아쉬워서라도 시위를 당길 때가 가끔 있거든."

"그래도 소사관까지 갈 땐 별 일 없었으니까 거꾸로 본당 갈 때까지도..."
"맞아요, 선도사 오른팔이 별 거라고. 이번엔 왼팔 주면 되겠지."

아 진짜 말실수 한 번 했다고 더럽게 건들거렸다.

"그리고 대답하지마. 난 혼자 떠들테니까, 형제님은 다른 소리에 집중해."
"그게...!"

...말이나 쉽지.
나는 제멋대로 떠들어대려던 입을 억지로 닫았다.
어쨌거나 이젤은 나보다 실전경험이 풍부한 사냥꾼이었다.

"위협을 할 때는 옆에 서. 하지만 공격할 땐 뒤로 서지. 혼자여도 그 버릇은 어디 안 갈거야. 어디 있는지 계속 알고 대비해야 해."

이젤의 혼잣말 너머로 들리는 소리 중 가장 많은 건 바람소리. 그 다음은 마수가 내는 울음소리였다. 정확히는 숨소리겠지만 어쩐지 그 소리가 거칠어 꼭 울음소리 같았다.
그 뒤로 들리는, 풀과 흙을 밟는 소리가 재빠르다.

"아까 형제님이 어께에 칼을 박았지? 근육이 모인 곳이라 뺏겨버리긴 했지만 그 덕에 쟤도 뛸 때마다 아파 죽을 거야, 걸리적 거릴거고. 그럼 체격 차이가 커도 대응할 수 있어."

이젤 선도사의 이야기는 토비 아저씨가 알려 줬던 검술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토비 아저씨는 검을 다루는 법에 대해서, 균형과 몸무게, 길이 등 내 몸을 온전히 이용하는 법에 대한 것. ''나''가 주체가 되는 것들이었지만 지금은 ''상대''가 주요점이었다.
완전히 다른 관점이다.

"너희 동료 중에 전투력이 제일 강한 게 누구야, 형제님인가?"

이번엔 이젤이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아마도 레샤요."

아마도라고 하긴 했지만 나는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단순히 셀라임만 두고보더라도 우리 중에 화력이 가장 강한 건 단연 레샤였다.
도토리 중 대왕 도토리 같은 거라고 해야하나, 그런 느낌이다.

"그럼... 거긴 걱정 없겠고..."

그렇게 말한 이젤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언제서부턴가 그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덩달에 어께에 두른 팔도 점점 무거워져만 간다.

"...여태 안 달려드는 거보니 확실히 한 마리네... 혹시나 했는데... 후우..."
"무거우니까 힘 좀 내봐요."

"형제님, 미안한데 나 대신 브랜디좀 꺼내줘."

나는 비교적 자유로웠던 왼팔을 이용해 이젤의 품안에서 가죽 물통을 꺼내 주었다.
이젤은 걸음을 멈추고 이빨로 뚜껑을 열곤 그걸 입에 문 체 술을 마시고 다시 닫는 신기술을 보여주었다. 한 손만으로 뭔가를 하는 것도 나름대로 익숙한 모양이었다.

"내가 물려봐서 하는 얘기인데..."

뭔가 우스갯소리를 하려던 이젤은 나에게 물주머니를 넘겨주다 불현듯 쓰러졌다.

"오왓...! 야!"

화들짝 놀라 소리쳤건만 다행히 땅바닥에서 이젤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이야... 바로 반말 나오는 거봐..."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맞아요, 형제님. 이 선도사는 힘들어서 도저히 못 가겠으니까..."

중얼거리듯 말하던 이젤은 하고 있었던 말을 흐리고 다른 이야기를 했다.

"형제님이 아무리 초보여도 지금 상황은 알거고..."

고대하던 먹잇감이 쓰러졌다.
마수가 그토록 노리던 어디와 언제가 지금 결정되었다는 뜻이다.
배회하는 짐승의 발소리가 사라졌다.

왜지? 생각해봐, 어째서 그런걸까.

나름대로의 결론은 금방 나왔다.
더 이상 위협하며 체력을 뺄 필요가 없으니까. 공격할 준비를 하는거다.

"포식자는 공격하기 전에 자세를 낮추고 발소리를 죽여..."

그와중에도 이젤은 훈수 좋아하는 동네 아저씨마냥 읊조리고 있었다.

"아잇 좀! 서 있을 체력 그냥 말하느라 다 쓴 거 아니야?!"
"하하. 그럴지도 모르지..."

적당한 웃음소릴 지어내던 이젤은 느지막히 덧붙였다.

"사냥은 정면승부가 아니야, 형제님."

다른 건 몰라도 그 말의 의미는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참 말 이상하게 하는 양반이다.

"난 사냥꾼 지망생이 아니거든요?"

나는 횃불을 높이 들어 정면을 보았다.
이젤 선도사의 말대로다. 녀석은 옛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자세를 낮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그것만으론 숨길 수 없을만큼 제 덩치가 커졌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크다. 다 큰 돼지보다도 더 컸다. 불리하다.
하지만 내가 찔러넣은 검 역시 아직도 몸뚱어리에 달고 있었다. 반쯤 박혀들어간 검은 녀석이 앞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함께 움직인다. 자세히보니 그 때마다 몸을 조금씩 비튼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드러난 이빨 사이로 침을 흘리며 콧등을 잔뜩 구기고 나타난 녀석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고 있었다.
이미 나와 눈을 마주친 건 전혀 상관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앞으로 나서 횃불을 흔들어 놈을 위협했다.

"하여간에 정교 놈들은 말을 들어처먹질 않아...!"

등 뒤에서 이젤이 투덜거렸다.

"말할 체력이 있으면 좀 비축해놔요!"

커다란 불이 다가오자 마수는 눈에 띄게 경계했다.
조심스러운 대치.
녀석이 먼저 앞발을 내딛는다. 나는 횃불을 휘둘러 녀석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상처 때문에 행동에 지연이 있는게 확연히 보인다.
불덩이를 맞은 녀석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안그래도 붉은 빛을 띤 눈이 핏발까지 서서 빨간색 고깃덩어리처럼 보였다.

마수가 다시 두 걸음 내딛었을 때 나는 그만큼 발을 뒤로 물러 똑같이 아가리를 후렸다.
손에 타고 흐른 충격으로 제대로 한 방 먹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녀석의 아래턱은 부서진 건지, 빠진 건지 다물지 못하고 메달려 덜렁거렸다.

으잇...!

그것도 잠시 녀석의 아래턱은 근육의 움직임에 이끌리듯 점차 제자리로 돌아갔다.

"저게 뭐야...!"

회복되었다라기보단, 대충 구멍을 메꾸는듯한 인상을 주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검도 빠지지 않고 메달려있는 거였다.
웬만히 패서는 쓰러지지 않는다는 건가.

아 그냥 선도사 말대로 도망이나 갈 걸.

그렇게 생각한다해도 이미 늦었다. 마수의 눈동자는 완전히 이쪽에 꽂혀있었다. 저 질척한 침 가득한 이빨을 내 목에다가 박고 말겠다는 그런 기세가 울음소리로 드러났다.
이대로 등을 보였다간 얄짤없이 달려들 것이다.

그런 생각이 안일했던 것이다.
녀석은 눈깜짝할 사이에 도약하여 달려들었다.

나는 어떻게해볼 틈없이 녀석에게 깔렸다. 앞발로 가슴을 누르는 탓에 꼼짝도 못하는 신세, 횃불은 놓쳐서 어디론가 날아가버렸고 물리지 않아도 이대로가다간 무게에 짓눌릴 것 같았다.
녀석의 주둥아리가 크게 벌려진다.

"으아아!"

방패가 되어주려나, 나는 냉큼 물주머리를 그 아가리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양 끝을 잡아 밀어 들이밀어지는 머리를 막아냈다.

"크르르륽...! 크흐엉!"

마수는 물주머니를 거듭 씹으며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그 힘이 밑에서 버틸게 못 되었다.
까득까득, 이빨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턱이 내려온다.

그 순간 터진 물주머니에서 고약한 향기의 물이 튀었다.
그래, 이 물주머니는 사실 술 주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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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14 21:10 | 조회 : 345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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