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가지 말고 쉬세요.”
아직 카드빚이 2천만원 가량 남아 있었지만 엄마에게 분식점에 나가지 말라고 했다.
아빠를 잃은 엄마가 장례를 치루자 마자 분식점에 나가서 김밥을 말아야 하는 현실은 너무나 가혹하다.
조금 돈이 부족하고 조금 쫄리겠지만 내 생각을 말씀 드렸다.
“가만 있으면 어디서 돈이 떨어지니···이제 연지 수능 대비 학원도 보내야 하고···”
엄마는 씁쓸하게 말씀하신다.
그동안 우리집은 나만 좀 정신 차리고 살았더라면 행복한 집안이 되었을 집이다.
나만 아니었다면 아빠가 직장끝나고 대리운전을 하지 않으셨어도 될 테고 뺑소니 사고도 나지 않았을 텐데···
그런 먹먹함을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삶에 대한 강한 욕망과 함께 과거를 바꾸지 못한 불효자로 남을 수 밖에 없는 그 기분을.
너무 늦었지만 아빠를 되살릴 순 없지만 이제라도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그게 아빠의 희생에 대해 내가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엄마 일하더라도 조금만 더 쉬셨다고 하세요. 엄마 지금 얼굴이 말이 아니야.”
내 말에 엄마가 희미한 미소로 웃으신다.
“그래도 우리 오성이가 정신차려서 엄마는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엄마 걱정은 하지 말아. 엄만 괜찮아.”
만약 부모님이 어딘가 아파보인다면, 만약 괜찮다고 말씀하신다면 그건 거짓말을 가능성이 높다. 자식이 보고 있는 시각 그대로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오성아···너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엄마가 어렵게 입을 떼시곤 서류뭉치를 꺼내신다.
“이게 다 뭐예요?”
“···”
엄마는 대답대신 눈물이 글썽거리신다.
“뭔데? 왜 그래?”
“아무래도 우리 이사가야 할 것 같다.”
“왜? 빚 다 갚았잖아요 아빠 퇴직금으로···”
“그게, 사채로 빌린것들만 있는줄 알았는데 아빠가 아는 사람한테 돈을 빌리셨던 모양이야.”
서류뭉치들은 일종의 차용증같은 것이었다.
아빠가 아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린 것을 증명하는 차용증의 복사 용지들이 수십장이었다.
작은건 백만원 이백만원이고 큰건 2천만원가량 되는 것들도 몇장 있었다.
“아빠가 왜 이걸···”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 내가 사기쳣던 사람들, 작은건 십만원이었고 큰건 삼사백정도 되었었다.
그들의 돈을 갚고 위약금을 갚고 난 다음에야 고소를 취하하거나 형사절차를 생략했었다.
나 때문에 생기게 된 빚이었다.
그중에 몇은 계좌가 동결되어 손에 쥘 수도 없었던 경우도 많았다.
내손에 쥔 것은 이천사십만원, 작은 돈은 아니었지만 게임비 아이템비로 대부분 소진되었다.
그게 뭔지도 모르고 저질렀던 어리석은 내가 아빠를 잡아먹은 것이다.
총 금액을 계산해보니 7천만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평 아파트가 3억 5천만원 정도지만 대출이 1억 3천만원이었다.
그 이자만도 다달이 50~60만원인데 이제 집을 팔아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엄마 이건 내가 어떻게 한번 해 볼게요.”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일단 엄마 먼저 위로했다. 아빠가 없는 이상 아빠의 역할을 내가 해야 한다.
“니가 무슨 재주로···”
한층 더 슬퍼보이는 얼굴이 된 엄마가 고개를 떨구고 말씀하신다.
***
“오 좀 나은데. 신기하게 의외로 명품이 잘 받네.”
토요일, 진채영은 나를 불러내더니 매장에 있는 옷들을 내게 입힌다.
플랫슈즈부터 면바지, 과장스러운 커다란 칼라가 올라간 와이셔츠, 그리고 검은뿔테안경대신 티타늄코팅된 안경, 하나하나가 다 이상했지만 전신 거울에 내 모습을 살펴보니 그럴듯 했다.
“뭘 이런 걸 입어야해? 불편하게 그냥 입던거 입으면 안돼?”
내말에 진채영은 콧방귀도 끼지 않는다.
“이거 상하지 않게 잘 입어! 아래위로만 이천 오백이야. 음 이정도면 되겠어?”
마치 음식세팅이 끝난 쉐프처럼 진채영은 내 아래위를 훑어보며 만족해 한다. 난 이천 오백이라는 말에 움츠러들어 조심스러워진다. 왜 생돈을 옷에다가 투자하는지 나로선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데···너 운전은 하니?”
“아니, 나 아직 미성년자야!”
“아 맞아 그렇지.”
멀리서 봐도 한눈에 뜨일만큼 우수워 보이는 감청색 재킷을 입히더니 페라리차에 타라고 한다.
“이게 뭐야? 코메디언도 아니고···”
“로제타 블루라는 거야. 그냥 참고 입어···”
다른 건 참겠는데 푸루죽죽한 코메디언 의상같은 재킷이 마음에 안든다.
진채영은 내가 뭐라고 하던 가볍게 무시하고서 자동차를 몰아 근처에 있는 건물로 들어간다.
“걸어가지, 바로 앞인데 뭐하러 차를 타고 와?”
“모냥빠지는 소리하지 말고 조용히 해.”
한 2백미터나 될까? 진채영이 있던 건물에서 아래로 조금만 내려가자 문이 열린 커다란 입구가 있고
마당과 같은 잔디에 테이블이 놓여있고 사람들이 맥주나 컵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비트 빠른 음악이 나오지만 귓청을 때릴 만큼 크지가 않다.
진채영은 평소와 달리 블라우스와 재킷, 짧은 스커트와 스타킹을 신은 오피셜 룩으로 빼 입고 있다.
내리자마자 스텝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키를 맡기고 진채영이 앞서서 들어간다.
“뭐해? 따라와. 촌스럽게 멀뚱거리지 말고.”
웃으면서 낮게 읖조리는 진채영의 음성에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어머 채영아 누구야?”
보석으로 치장한 모델같은 여자가 진채영에게 다가와 나를 턱짓으로 가르킨다.
“내 친구!”
“친구?”
“응 내 남자친구.”
“풋 남자친구?”
여자는 놀란 눈으로 진채영을 바라본다.
진채영은 여자를 무시하듯 스쳐 나를 이끌고 건물로 들어선다.
“어머 채영아 누구!”, “누구야 설마?”
진채영은 이곳에서 유명인사였다. 만나는 여자들 마다 진채영에게 말을 건다.
그러면 진채영은 가볍게 한마디 하거나 웃으면서 무시한다.
“누구?”
왠 싸가지 없게 생긴 귀를 뚫은 남자가 진채영의 앞을 막는다.
“내 남자친구.”
그 말에 싸가지가 웃음을 터트린다.
“니 남자친구는 나잖아.”
“웃기고 있네 누구 맘대로.”
진채영은 남자를 밀어내고서 비어있는 테이블에 가서 앉는다.
나는 진채영을 따라서 옆에 앉았다. 체육관 넓이정도 되는 공간에 가운데 스테이지가 있고 분수와 소파, 피아노 등 다양한 물건들이 놓여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마치 남자아이돌처럼 옷을 입고 있다. 몇몇은 슈트를 입고 있고 또 몇몇은 우수광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색의 옷을 입고있다.
“촌스럽게 돌아보지 좀 말아.”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나에게 핀잔을 준다.
“여긴 뭐하는 데야? 아까 그사람은 누구고?”
“여기?”
여우에 홀린다는게 뭔지 아는가? 진채영의 좀 전의 표정이 바로 그랬다.
웃는 얼굴로 눈썹을 치켜올리자 어지간한 남자가 빨려갈듯 매력적으로 변한다.
물론 난 어지간한 남자가 아니지만
“돈 많고 지 잘난줄 아는 애들의 놀이터라고 할까? 가끔 뉴스에도 나오고 그럴텐데 재벌가 파티장.”
그때서야 어떤 곳에 왔는지 이해가 되었다. 토요일마다 재벌가 3세들이 모여서 파티를 연다는 소리를 떠도는 소문으로 들었는데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너 쟤 몰라? 쟤가 유영진이잖아!”
그 소리를 듣자 머리가 망치로 맞은 것 같았다. 좀전에 진채영을 막았던 남자가 바로 유영진이었다.
아빠를 차로 치고도 뺑소니를 했던 쓰레기 같은 새끼, 가슴속에서 심장소리가 점점 커지고 꽉 쥐고 있는 주먹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든다.
진채영의 고개짓이 가르키는 곳을 바라보니 유영진이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내가 원래 좀 인기가 많은데 쟤가 나한테 꽃여서 요즘 저래.”
진채영은 별것 아닌듯 웃으면서 말한다.
“뭐 마실것 줄까? 맥주···. 아 넌 안되지···. 가벼운 펀치 같은거는 될려나?”
좀처럼 숨이 가빠져 오는걸 멈출수가 없었다.
침착하자고 진정하자고 아무리 말을 해도 내 심장은 내 뜻과 상관없이 뛰고 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한대 후려치고
‘너만 도망가지 않았으면 우리아빠 살았어 이 새끼야!’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내 이성은 내 몸을 꾹 누르고 있다.
흥분해서 설쳐본들 마음은 후련하겠지만 아무것도 해결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야!”
누군가 뒤에서 부르는 것 같은 소리가 난다.
“야! 안들려? 이 새끼 뭐야?”
고개를 돌려 돌아보니 유영진이 덩치 큰 남자 둘과 함께 서 있다.
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가락으로 나를 가르켰다.
“나 부른거야?”
“그래 새끼야! 너 말고 여기 누가 있냐?”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을 봤나? 예전의 나라면 몰라도 산전수전을 다 ?M은 지금의 나는 그런 소리를 듣고선 참을 수 없다.
“새끼야?”
나는 흥분해서 일어섰다. 당장이라도 후려치고 싶은 놈이 제발로 다가오다니.
“왜? 꼽냐? 코딱지 만한게 어디서···”
들었던 것처럼 인성이 막장인 망나니 놈이다.
이성은 상대방의 나이를 잘 모르지만 비슷한 나이대의 동성은 서로의 나이를 귀신같이 가늠한다. 유영진은 내가 자기보다 나이가 어리다는걸 파악한 것이다.
“넌 뭔데 주둥이가 그렇게 더럽냐?”
싸움은 기선제압이다. 여기서 꼬리내리면 끝나는 것이었다. 나도 유영진에게 지지않고 대들었다.
“너? 이 새끼봐라 나이도 어린게.”
“나이 어리면 막대해도 되냐?”
내 기세에 유영진도 당황한듯 하다. 그 동안 그런 식으로 치받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야 이놈 버릇좀 고쳐줘라 좀 맞아야 되겠다.”
유영진의 말에 두 덩치가 다가온다.
“야! 니들 뭐해?”
진채영이 음료수 잔을 양손에 들고 어느새 내 뒤에 서 있다.
“아니···애가 싸가지가 너무 없어서”
유영진이 우물쭈물 변명을 한다.
“유영진이 다 되었네···추잡하게.”
“무슨 소리야?”
“이제 실력으로 안되니까 선수를 직접 치겠다?”
“선수?”
유영진은 진채영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워 한다.
“그럼 누군지도 모르고 시비를 건 거란 말이야?”
“누군데···”
“푸흣···그냥 내 남자친구인줄 알고서 그런거야? 질투해서? 하하하”
진채영은 유영진을 손바닥위에 올려 놓고 가지고 논다.
그렇게 한참을 웃더니 인상을 쓰고 있는 유영진을 바라보며 말한다.
“우리 내기 기억나냐? 우리 콘키스타 길드가 성을 빼앗기면 내가 너랑···.”
진채영은 ‘자기로 한 것’이라는 말을 마무리 짓지 않는다.
“대신 우리 콘키스타 길드가 니네 워치콘 길드 성을 빼앗으면 우리 쇼룸에서 10억원어치 사기로 한거.”
“기억나다마다 그날만 기다리고 있지···왜 이제와서 내기 취소하게? 취소하려면 현금 10억을 내 놓기로 한거 알고는 있지?”
내기라는 말에 유영진이 다시 미소를 짓는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너야 말로 10억 준비해 놔!”
“하하! 무슨 재주로? 니네 길드 지금 엉망이지 않나? 그 가이아스인가 뭔가가 사라져버려서···”
“사라지긴 무슨···”
“찾았어?”
“응.”
“어디있는데? 그 가이아스 라는 놈이···”
[리버스]에서 내 존재는 절대적이다. 내 밑으로 100명의 힘을 합친 것보다도 더 강하다. 유영진이 가이아스라는 아이디를 모를 리 없었다. 상대방 길드의 약점에 대해서는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니 눈앞에”
진채영의 말에 유영진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난 또 뭐라고 하하 어디서 구라를 쳐? 얘가 그 대 사령관 가이아스라고? 장난하냐?”
유영진은 진채영의 말을 믿지 않고 비웃는다.
“그 사람 가이아스 맞아!”
“누나?”
유영진의 뒤로 오피셜 투피스를 입은 토끼눈 유세진이 나타났다.
“같은 콘키스타 길드라고 장난치는 거야? 가이아스 행방은 우리도 찾아봤는데 이미 서버에서 아이디도 사라졌다고.”
유영진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세진은 내게 다가와 내 어깨에 팔을 기댄다.
“믿건 안 믿건 그건 니 자유고, 난 사실만 말할 뿐이야.”
토끼의 말에 분노와 당황함과 놀람이 함께 섞여있는 묘한 표정으로 유영진의 표정이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