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병자

#0
구해줘. 아린이의 손이 내 손을 파고들었다. 따뜻하지만 파르르 떨려왔다. 엄마, 아빠, 모두한테 그렇게 사라지고 있어. 구해줘.

#1
내 증상이 처음 보인 건 매미가 시끄럽던 여름이었다. 선생님은 나를 크게 다그치셨지만, 뒤늦게 사태를 깨닫고는 입을 다물 뿐이었다. 아린이는 학교에서 볼 수 없었다. 안 박사님이 방과 후에 만나자 하셨다. 먼저 아린이를 만나러 가고 싶었지만, 약속은 꼭 지켜야한다고 기억도 안나는 어릴 적부터 배워왔다. 안 박사는 과자와 코코아 같은 것들을 준비해놓고 먼저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는 선생님과 마주 앉은 채 비스킷을 씹었다. 코코아는 바로 먹기엔 너무 뜨거웠다. 말재주 없이 조용하던 나 대신 박사님이 먼저 말을 꺼내셨다. 이제 병은 괜찮니?

#2
그릇에 과자는 벌써 두개 밖에 남지 않았다. 적당히 식은 코코아는 이제 반 정도 남았고. 컵을 비우려 코코아를 들이켰을 때, 내 얘길 들으며 종이에 뭔갈 끄적거리던 박사님은 내게 넌지시 말하셨다. "힘들겠지만, 이젠 네 증상과 당당히 맞서야 될 시기라고 생각한단다. 회피하기만 하면 악화될 뿐이야." 그러면서 몸을 앞으로 내밀고. "한 번 보여줄 수 있겠니?" 증상이 나오는 건 내 의지와는 별개였다. 그렇게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선생님 말대로 시도해보았다. 그 감각을 떠올려보며, 천천히 쉼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내가 공이 되어 땅에 튕기는 모습을 상상을 했다. 바닥에 내리꽂히고 정확히 직선으로 튀어오른다. 부드럽게 통통 거리며 재밌는 질감과 소리를 내기도 하고, 때론 땅을 구부려 요리조리 굴려보다, 힘을 한 껏 주고 공중에 띄운다음 굉음을 내며 강하게 내리꽂았다. 공과 함께 지면을 박살내기 위해. "죄송해요."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3
아린이의 말이 하루종일 머리에 맴돌았다. 안 박사님 부탁이 잘 안된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이 아닐까. 그런 핑계를 나는 생각해냈다. 아린이는 지금 혼자서 뭘 하며, 무슨 생각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배고픈 것도 모른 채 쫄쫄 굶어있진 않을까. 눈이 쪼그라들게 울고 있진 않을까. 티비도 뭣도 질려 심심해하고 있진 않을까. 발길을 재촉하는데 그런 생각들이 들더라. 아린아. 아린아아아. 문을 힘차게 두드려도 아무런 대꾸도 없이 조용했다. 나는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기로 했다. 아린아?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4
띵동, 하고 초인종이 울렸다. 그러나 이불 깊숙히 몸을 파뭍은 나는 문까지 다가갈 여력이 없었다. 고작 하루 동안 온 동네를 뛰어다닌 것 가지고 며칠 동안 뻗어있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 이 이불 속 온기와 함께 온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그러나 재촉하듯 다시 띵동, 하고 울리는 소리에 시간은 자꾸만 흘러 가려했다. 시간을 영원히 멈출 순 없었다. 움직이자. 내 좁고 아늑한 세상을 망친 것에 대한 분노로서 짜증난 듯 세게 벌컥, 문을 열었다. 선생님이었다. 없는 척 할 걸 그랬나. 후회가 막심하다.
선생님과 집에서 나란히 마주본다는 건 예상대로 불편한 일이었다. 특히 내게 신경쓰이는 듯 쭈뼛거리는 커다란 어른은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거기다 오래간만에 입을 열어보니 감기걸린 것처럼 목이 다 쉬어있었다. 아린이가 사라진 날 그 이름을 부르느라 다 써버린 탓이었다. "괜찮니? 힘이 없어 보이는구나. 학교는 괜찮아질 때까지 안나와도 된단다. 신경쓰지 말고 집에서 편하게 푹 쉬고 있으렴. 선생님이 뭔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없겠니?" 죄송해요 선생님. 아무리 선생님이라도 할 수 없는 일이 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학교엔 가지 않을 것 같구요.


#5
그렇게 나는 다시 혼자로 돌아왔다. 쓸데없는 사람들은 보고 싶지 않았다. 티비는 물렸다. 잠은 잘 만큼 잤다. 그럼 이제 할 게 없는데. 아린이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구해줘. 내 손을 아프로독 꽉 쥐던 손이 생각났다. 빨개진 얼굴. 글성이는 눈망울. 지금까지도 내 가슴을 쿡쿡 찔러온다. 네게 너무 무신경했다.
바로 내일이든 모레든 아차 하면 이미 떠나버린 한 순간 일텐데. 네가 지금 앞에 있어도 나는 무슨 낯으로 너를 반길까.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걸까. 그 애처로운 목소리가 너무 세게 박혔다. 허하게 부푼 시간만큼 죄책감에 쫒긴다. 집구석 어디를 눕든 쿡쿡 쑤시는데도, 어찌할 도리를 모르겠다는 것이 최대의 난제. 뭘 어떻게 할까. 온 집안이 가시방석이 된 듯 누워있는 것 만으로도 불편했던 나는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았다. 그리고는 도저히 전하지 못할 말을 혼자 반복하며 시곗바늘을 보냈다. 움찔, 움찔. 또 다. 증상이었다. 어쩌면 잘된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앞으로도 흘러갈 빈 시간들을 버틸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이대로 아린이를 따라 영영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다해도 그게 나을 판이다. 움찔, 움찔. 안 박사님이 지금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움찔, 움찔. 좋아. 어떻게든 해보자. 미안해, 아린아.


#6
선생님이 미안하다. 내가 너무 무심했어. 계속 잠만 자는거야? 난 이러려고 널 부른게 아닌데. 선생님 환자상태가 이상합니다! 어쩌면좋지어쩌면좋지.
언제까지 누워만 있을거야? 이젠 그만 일어나.

"아, 환자분."
하얀 천장, 하얀 옷, 하얀 사람, 하얀 전등, 하얀 커튼, 하얀 옷. 거기다 하얀 타일들. "괜찮으세요?" 내가 눈을 뜬 건 병원이었다. 나와 처음 대면했던 간호사는 안 박사를 불러왔고, 삽시간에 나는 유명인사가 된 듯했다. 그의 말로는 내가 오랜 시간 동안 깨어나질 않았다고 했다. 안 박사와 간호사들은 나를 둘러싸고는 이것저것 귀찮게 하다, 안정을 취해야한다고 하곤 물러가 주었다. 내 몸엔 아무런 이상도 없었지만, 후유증을 지켜본다며 조금 더 병원 침대에 누워있게 되었다. 그 아이는 그렇게 만나게 된 것이다. 그 애의 이름 이 연이었다.


#7
나는 길고 따분할 것만 같은 병원생활이 시작되고, 보드게임의 무인도처럼 꼼짝없이 시간을 낭비해야한다는 것과 아린이를 찾지도, 세상에서 사라지지도 못했다는 것에 대해 침대에 누운 채 패배의 쓴맛을 다시고 있었다. 병실이 답답한 건 물론 그 새하얗고 깨끗한 이미지와 그런 장소에 배여있는 특유의 조심스러움, 그리고 생활을 통제받기 때문이기는 했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 탈출극을 상상하는 건 이 백지처럼 새하얀 건물 때문에 아린이의 흔적이 아른거릴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안 박사와는 종종 상담을 하거나, 정기검진을 받곤 했고, 선생님은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병문안을 오셨다. 이 연은 그런 안 박사나 선생님 뒤에서 이 쪽을 유심히 바라보는 게 항상 눈에 밟히던 아이였다. 이 연. 휴게실에서 재밌지도 않으면서 티비 화면만 쳐다보던 내게 다가왔다. 심심하지? 녀석은 내 옆자리에 앉아 같은 또래라는 점을 이용해 살갑게 말을 붙여왔다. 그리고는 당연히 알고 있던 사실을 새삼스럽게 꺼내더라. 나, 전부터 쭉 널 지켜봤어.


#8
이 연은 같이 놀지 않겠냐며 나를 병원 밖으로 끌고 나왔다. 의사 선생님도, 간호사 누나들도, 안 박사 또한 몸의 안정을 누누히 언급해왔다. 그런데 녀석은 뻔뻔스럽다고 할 정도로 당당하게도 들고 있는 농구공을 자랑스럽다는 듯이 보여주었다. 우리는 병원에서 약간 떨어진 농구장으로 갔다. 나를 이끌고 온 건 녀석이었지만 이 연은 몸이 아프다며 가만히 앉아서는 내가 홀로 공을 튀기는 모습을 지켜만 봤다. 조금 뻘줌한 모양새에 어색하게 머뭇거리긴 했지만, 오래간만에 몸을 놀리다보니 신난 듯 점점 격렬해지고, 이내 땀에 흠뻑 젖어있는 나를 깨달았다. 그렇게 간만에 원껏 코트에서 뛰고는 슬슬 가보려 할 때, 나무 그늘 아래서 그런 나를 향해 산뜻하게 미소짓던 이 연을 봤다.


#9
나도 너랑 같은 증상이야. 오래지 않아 이 연이 입원한 이유를 쉽게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입을 연 적이 없는데 내 병은 어떻게 알았을까. 딱 보면 알거든. 너같은 애들. 녀석은 그렇게 대답했다.(아마 이런 증상을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는 안 박사의 담당이기 때문이겠지.) 병원에서 이 연과 나는 함께 붙어다니게 되었다. 둘이서 특별히 뭔갈 하는 건 아니었다. 얘기나 몇 마디 주고 받거나, 종종 밖으로 나와 이 연은 내 옆자리에서 책을 읽었고, 나는 티비를 보거나 그 곳으로 가 공을 튀겼다. 종종 선생님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들고 찾아와 내가 너무 무신경 했구나, 같은 말을 하며 내게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한 뒤 같이 사과나 깎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 덕에 한가득 쌓인 병문안 선물들을 이 연과 곧잘 나눠 먹곤 했다. 병원의 단조로움이나 늘 같은 생활패턴이라던지, 늘 똑같은 병원 정원에 질려버렸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역시 아린이의 모습을 찾아보려 애쓰듯 나는 늘 창 밖을 바라보곤 했다. 한동안 아린이의 말들과 손짓과 몸짓과 얼굴에 앓다가 이 연으로 그를 잠시 잊을 수 있어 솔직히 편했다는 것이 아린이에게 미안한 점. 구해줘. 아린이는 그렇게 부탁했다. 내 손을 쥔 그 손은 따뜻했지만 가느다랗게 떨려왔다. 엄마, 아빠, 모두한테 그렇게 사라지고 있어. 구해줘. 침대에 누워 병실 불이 꺼진 천장을 바라보며 마지막 그 때의 아린이를 그리던 중,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맞은편 침대에서 나를 향해 미소짓는 이 연의 얼굴이 보였다.


#10
나와 같은 증상을 가진 상대에 대한 관심. 나는 그렇게 설명을 붙이며 안 박사의 대답을 기다렸다. 안 박사에게 이 연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안 박사가 실토하듯 조심스럽게, 이 연은 문제아라고 대답했을 때 나는 의아한 얼굴을 지어보였다. 그 아이와는 조금 거리를 두는 편이 좋을 것 같구나. 안 박사는 그렇게 말했다.


#11
아린이에 대해 선생님은 무기력하게 유감을 표했고, 안 박사는 대책을 짜고 있다며 내게 헛바람을 불어넣었다. 이 연에게도 아린이의 얘기를 꺼내보려 했던 적도 있었지만, 나를 돌아보며 슬며시 웃어주는 이 연의 얼굴과 맞닥드리자 왠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같은 나잇대와 비슷한 가정사(나는 어릴적 부터 선생님의 집에 살았고, 이 연은 양아버지와 함께 살았다고 했다)에 같은 증상을 호소하고 있던 우리는 묘한 동질감으로 이어져있었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어느덧 이 연과 함께인 병원생활에 익숙해졌고, 오히려 집 보다 낫다고도 생각했다. 그렇게 날이 갈 수록 자유투는 더 잘 들어갔고. 그 아래서 배시시 웃으며 조용히 박수를 쳐주는 연이가 따분할 것 같았던 병원생활의 보람이자 낙이었다.


#12
듣자하니, 친구가 하나 있었다고 하던데. 느닷없이 연이가 말했다. 안 박사에게 들었다면서. 아린이 얘기였다. 그 이름에 나는 잠시 얼빵한 얼굴로 그 아이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많이 외롭겠네. 연이는 내게 가까히 몸을 붙여 앉았다. 가엾고 딱해서 두고 볼 수가 없네. 나라도 옆에 있어줘야 겠구나. 이 연의 팔이 내 머리를 감싸고 제 가슴 쪽으로 끌어안았다. 고마워. 나는 그렇게 대답하곤 눈을 감아버렸다. 이대로 세상만사 전부 잊고 병원에서만 살 수 있다면.
통, 통, 농구공이 튀었다. 오밤중에 농구장을 찾아갔다. 천천히 골대로 공을 몰고가다 슛을 쏘려 자세를 잡았다. 그렇게 손에서 공이 나가는 순간. 옆에서 튀어나온 연이가 공을 낚아챈 뒤 빠르게 경황이 없는 나를 재치고 반대편으로 달렸다. 그렇게 다리에서 부터 손으로 흐르는 우아한 춤선을 타고 날아간 공은, 꽤 먼 거리였음에도 포물선을 그리며 부드럽게 골을 넣었다. 연이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병, 어떻게 해야할지 가르쳐줄까?


#13
공이 튄다. 바닥에 내리꽂히고 정확히 직선으로 튀어오른다. 부드럽게 통통 거리며 재밌는 질감과 소리를 내기도 하고, 때론 땅을 구부려 요리조리 굴려보다, 힘을 한 껏 주고 공중에 띄운다음 굉음을 내며 강하게 내리꽂는다. 그렇게 반동으로 튀어오른 공은 구름이 낀 하늘 넓은 곳에 떴다. 공이 하나, 둘, 셋넷다섯여섯.. 무수히 많은 공들이 쏟아지며 땅을 때린다. 팡! 하고 마지막 공이 땅을 찍자 지구가 반동으로 튀긴 듯 굉음과 함께 세상이 끝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천장이었다. 이내 그 천장은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응급실에 실려가는 모습이었다. 그 속도감에 머리가 아찔하게 흔들렸다.
그리곤 영문도 모르는 새 정신을 차려보니 다시 병실로 돌아와 있었다. 안 박사는 내 앞에서 이마를 짚고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또 시작됐구나.


#14
그 후로 안 박사의 얼굴을 자주 봐야만 했다. 그는 내게 이것 저것 물었지만, 연이 얘긴 꺼내지 않았다. 그 애한테 책임을 묻지 않았으면 했기 때문이다.
연이는 내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었다. 자기가 그 날 읽은 책에 대한 얘기를 해주기도 했고, 다큐나 뉴스에 나오는 그런 어려운 얘기들을 꺼낸 적도 있으며, 최근엔 자신의 경험을 공유해주기도 했다. 가령 일부러 증상을 일으키는 방법같은 거. 안 박사는 테스트랍시고 검은 화면 속에서 공이 통통 튀는 영상을 틀어주며 내게 여러 질문을 던졌다. 공의 색이나, 방향, 소리의 규칙성 같은 것들이었다. 치료는 불가능 한건가요? 나를 찾아온 선생님이 안 박사에게 물었다. 죄송합니다. 대답은 역시 그거였다. 선생님은 나를 보며 어찌해야할지 말을 잇지 못했지만, 나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겼다. 내 병은 고쳐지면 안되는 거였다. 적어도 아린이를 찾기 전까진. 그 때까진 증상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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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12-04 00:22 | 조회 : 558 목록
작가의 말
길키턱

미완임당 죄송함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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