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

세상이 어둠에 잠겨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축축하고 끈적끈적한 기분이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어서 일어나서 목욕이라도 해서 씿어내고 싶은데..


무엇을?


아아, 생각난다.

분명 뿔토끼를 잡으러 가서.. 성공했었나?

그래, 다 기억난다.

내 몸에 흩뿌려지던 붉은 피, 따뜻하고 끈적끈적한 기분나쁜 액체.

내 손을 타고 느껴지던 살을 베고 생명을 베어들어가는 단검의 감촉.

꺼지는 생명속에 나를 바라보던 뿔토끼의 붉은 눈.

알고 싶지 않았던 것들이다.


사실 어느정도 예상은 하고있었다.

게임같은 세상이라도 엄연한 현실인데, 정말 게임처럼 뿅 하고 사라진다던가 꾸엑 하고 시체로 바뀔리는 없었겠지.

단지 내가 너무 들떠서 이 간단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나보다. 아니, 잊어버리고 싶었는걸지도 모르겠다.


게임을 할때는 동경같은게 있었다. 게임 캐릭터가 성장하고, 더 강한 몬스터와 싸우고, 거대한 괴수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이겨내는 모습. 그게 멋있어 보여서, 그래서 이 세계가 게임처럼 사람과 몬스터가 싸우는 세계라는걸 알고 나서도, 두근두근한 마음이 있었다.

이게 현실이라는 것을 알았어야 했는데, 바보같다.

몬스터와의 싸움은 모니터 안에 있을때나 멋있지만, 실제로 일어난다고 하면, 그저 죽고 죽이는 추악한 싸움일 뿐이다. 죽으면 아프고 그걸로 끝이겠지만 죽이면 이런 더러운 기분을 계속 느끼며 살아가겠지.

마치 춥고 비오는날 집안에서 이불을 둘러싸고 창밖을 바라보면서 아늑함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게임을 할때 나는 집 안에 있었고, 지금 나는 그 반대로 비 맞은 생쥐꼴이다.

춥고 축축한 기분. 어서 목욕을 해서 이것을 다 씿어내고 싶은데..



정신이 천천히 돌아온다. 감각이 돌아오면서 따뜻함과 푹신푹신함이 느껴진다.

눈을 뜨니, 곰돌이가 보여서 껴안아 본다. 부드러워서 껴안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옆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고있는 리즈가 보인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거야?

“그래, 이제 괜찮니?”

방금 자다 일어났는데 괜찮냐니, 무슨 질문이 그래? 고개를 옆으로 까딱해본다.

“보니까 이제 괜찮은거 같구나.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집에 와보니 마당에 그런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으니..”

그런 모습?

무슨 일이 있었나?

분명 자기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같고.. 끈적끈적하고 축축한 그런 일이...

아.. 그래, 뿔토끼 사냥하러 갔었지..그리고 사냥은 성공했었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눌러놓았던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나온다.

이런것 싫다, 무섭다.. 그리고 아프다.

나를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리즈의 품안에서 결국 울음을 터뜨린다.




한참을 울다보니 감정이 조금씩 추스려진다.

내 몸을 살펴보니 어제와 다른 옷을 입고 있고, 피는 하나도 묻어 있지 않다.

아무래도 리즈가 씿기고 갈아입혀 주었나 보다. 어제 마당에 쓰러져 있었다고 했는데, 피투성이였겠지.

리즈는 가만히 내 등을 토닥여 준다. 이럴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가만히 위로해주는게 너무나도 고맙다.

“미안해..”

내 멋대로 나가고 내 멋대로 상처받고 걱정시켜서..

리즈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대답해준다.

“이제 좀 괜찮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대충 짐작이 가는구나.”

음.. 내가 뭘 했는지 짐작한다고?

“사실 네가 항상 불안해 하는거 같아서, 뭔가에 쫓기는듯 해서 걱정했었는데”

.. 리즈는 독심술을 할줄 아는거 같다. 깜짝 놀라서 리즈를 쳐다본다.

“그래도 네가 즐거워 하는거 같아서 그냥 놔뒀거든.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뒀으면 좋겠구나.

하기 싫은건 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와 윌이 너를 지켜줄 테니까.

우리를 좀더 믿고 의지하고 응석부려도 괜찮단다.

럭스 너는 우는 모습보다 즐거워하는 모습이 훨씬 귀엽고 예쁘니까,

그 웃음을 내가 지켜주도록 허락해 주겠니?”

나의 눈을 바라보며 따뜻하게 말하는 리즈를 보고, 품에 안기면서 생각한다.

행복하다.


그 날 이후 나는 검술 연습을 그만두었고, 평화로운 나날이 지나간다.





“럭스, 일어나! 어서!”

으응, 벌써 아침인가? 오늘 아침은 왠지 달걀프라이를 먹고 싶은데..

“으응, 5분만...”

“그게 아니고, 도망쳐야해. 빨리 일어나!”

“럭스는 어때? 여기는 준비 끝났어.”

윌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며 위화감을 느낀다. 무거운 눈꺼풀을 열어보니 리즈와 윌은 어느새 외출복으로 옷을 갈아입었고, 얼래? 나도 옷이 갈아입혀져 있다.

“일어났구나, 어서 떠나야해, 가자.”

“응.. 무슨 일이야?”

“고블린들이야. 아마 여기로 곧 올거야. 그 전에 빨리 도망가야해.”

고블린?

보통 게임에서 최약의 몬스터로 나오는 고블린이지만, 이 세계에서는 그렇게 약하지만은 않다.

아니, 보통 고블린이라면 확실히 약하다. 레벨 10도 안되고 (그래도 나보다는 높지만), 보통 어른의 평균 레벨이 10인걸 감안하면, 마을사람 A 한테도 지는게 고블린이다.

하지만 고블린들도 사냥을 하다보면 레벨이 오르고, 그러면 진화를 한다. 그래서 나오는 상위종들은 월등한 전투능력을 가지고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며, 드문 확률로 종족을 하나로 모으고 지배하는 로드가 탄생하기도 한다고 한다. 출처: 몬스터대백과(어린이용)

그런데 레벨이 30이 넘는 윌이 도망가야 한다고 하면 강한 개체라도 나온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리즈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온다.


하늘에 떠있는 수많은 별과 두개의 달이 아직 한 밤중이라고 알려준다.

하지만 평소와는 다른 한가지 더의 광원. 동쪽의 하늘을 밝게 비추는 빛이 오는 곳은..

“마을이.. 불타고 있어?”

“그래. 아무래도 고블린들이 습격한 것 같구나. 마을이 저렇게 될 정도면 보통 녀석들이 아니야.”

갑자기 잠이 확 깨면서 상황이 정리된다. 우리 집은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리고 마을의 방어를 뚫었다면 그만큼 강한 개체들이 있다는 뜻. 이녀석들은 횟불따위는 쓰지 않기에 불속성 마법을 쓰는 고블린 메이지 몇마리는 확실히 있다.

“도와줘야 하지 않아?”

윌이라면 고블린 정도는 어떻게 할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물어본다. 하지만 돌아오는건 부정.

“아니, 저정도로 불이 번졌다면, 싸움은 일방적으로 이미 끝났어. 우리는 여기서 최대한 멀어져야해.”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수 밖에 없었다.





세명의 남녀가 숲속에서 달려간다. 푸른머리의 근육질의 남자는 등에 대검을 메고있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연두색의 장발이 인상적인 여인은 허리에 세검을 차고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그녀와 닮은 작은 아이는, 그 체구에 알맞지 않은 속도로 달리고 있다.

바람마법에 안목이 있는 자가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이의 주변에서 움직임을 보조해주는 바람은, 초보마법인 윈드워크의 상위마법인 가속. 그리고 그 시전자는 걱정스러운 듯이 아이의 손을 꼭 잡고있는 여인이다.

지칠법도 한 아이의 모습을 힐끔힐끔 보던 남자가 갑자기 달리는걸 멈춘다. 그 모습을 본 여인과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돌아가는게 좋지 않을까?”

“아니, 그러면 북쪽의 마을로 목표를 바꿔야 하는데, 너무 멀어. 게다가 이 타이밍..”

마을이 몬스터들에게 습격받은걸 알고 가장 가까운 남쪽의 마을로 도주하는 도중 발견한 적. 매복하고 있는것을 이쪽이 먼저 발견한 것은 천만 다행이지만, 문제는 이 녀석들이 매복하고 있었다는것 자체이다.

기감을 펼쳐 알아본 바, 몬스터의 정체는 고블린. 이들은 보통 마을을 공격할때 따로 병력을 빼내서 도망가는 자들을 쫓지는 않는다. 마을을 공격하는 것에 온 힘을 집중시킨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이고, 따로 전멸시키는 것에 이의를 두지 않는다는 것이 두번째 이유.

그런데, 여기 매복이 있다는 것은, 이들의 세력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고, 또 따로 찾는 자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근방에서 고블린들의 타겟이 될만한 존재는..

'내가 목표인가?'

지금 상황에서 방향을 틀어서 북쪽 마을로 목표를 바꾼다고 해도, 결국 이들에게 시간을 주게되고 포위망만 좁아질 뿐이다. 그러니 지금은

“돌파한다. 럭스를 부탁해.”

그렇게 말하고는 윌은 대검을 잡고는 길을 벗어나 한치 앞도 보기 힘든 숲속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 모습을 걱정스럽게 보고 있는 작은 아이는 그저 엄마의 손을 꽉 잡고 있을 뿐이다.

“키에에엑!”

끔찍한 비명소리와 함께 풀썩 하고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곧 이어 근육질의 남자가 길가로 나온다.

“지원이 오기전에 서둘러야 할거 같군.”






숲속의 길을 달려가는 세명의 가족. 그 앞을 초록색의 괴물들이 몇번 가로막았지만, 근육질의 남자가 휘두르는 대검에 잘려나간다. 간혹 그를 피해서 여인과 아이를 공격하는 녀석들도 있었지만, 여인의 세검 앞에서 순식간에 목숨을 잃는다.

윌이 공격하고 리즈가 보조하며 방어한다. 마치 오랫동안 서로에게 맞춰온듯 자연스럽게 고블린들을 해치우는 모습을 보고 럭스는 조금이나마 불안을 지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크아아아아아”

거대한 포효와 함께 나타난 것은, 2미터는 되어보이는 늑대와 그 위에 타고있는 거구의 초록색 괴물. 고블린이라고 보기 힘든 거대한 체구와 야수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망토, 그리고 딱 보기에도 다른 고블린들의 무기와는 급을 달리하는 검을 지닌 괴물은 그 노란 눈을 근육질의 남자에게 고정시킨다.

“이런, 강한 녀석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로드인가?”

고블린 로드, 고블린들의 정점이라고 알려진 이들은, 다른 고블린들을 수하로 두고 다루는 능력 말고도 그들 자체의 능력도 출중하다. 어느계열로 진화했는가에 따라 능력도 다양하지만, 검을 들고있는 모습을 볼때 전사계열일 가능성이 높은 이 로드의 레벨은 30대 중반으로 보였다. 윌의 레벨이 35인 것을 감안할때, 싸우면 호각일터.

윌은 주위를 둘러본다.

로드의 뒤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메이지가 두마리, 그리고 주변에서 포위망을 이루고 있는 고블린이 10마리.

그리고 자신의 뒤에서 불안한듯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와, 그녀의 손을 꼭 잡고있는 리즈.

용병으로서, 모험자로서 그리고 사냥꾼으로서 쌓아온 경험을 토대로 상황을 판단했을때, 내린 결론은..

“리즈, 럭스를 데리고 먼저 가 있어.”

자신 혼자라면 싸울수 있다. 하지만 아직 어린 럭스를 지키려면?

불가능하다. 리즈가 있더라도 그렇다. 누군가를 지키면서 하는 싸움은 그만큼 어렵다. 원래라면 피할 수 있는 공격을 반드시 방어해야 한다는 약점. 그것 하나만으로도 세검을 가진 리즈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싸움이다. 그렇기에 윌이 로드를 포함한 대다수의 고블린들을 상대해 주어야 하고, 그들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끄는건 불가능하다.

“아..아빠?”

당황했는지, 이름을 부르는 것도 잊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럭스를 쓰다듬어주고는, 허리에 차고있던 단검을 작은 손에 쥐어준다.

“혹시 모르니까 가지고 있어. 아빠 강한거 알지? 나는 괜찮으니까, 우선 빠져나가서 엄마랑 남쪽 마을로 향해. 거기서 다시 만나는 거야.”

“싫어, 모두 함께 가지않으면..”

“아니, 이게 최선의 방법이야. 나는 괜찮을 테니까, 엄마랑 함께 먼저 가 있어.”

사실 너무나도 걱정된다. 내가 여기서 싸우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이 빠져나가서 또 다른 몬스터들에게 습격당하고, 그것들이 그녀들이 감당할 수 없는 정도의 몬스터라면..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뭉쳐 있는 건 자살행위다. 내가 할 수 있는건 이 고블린들을 여기에 붙잡아 놓는 것 뿐. 하지만 불안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약속할게, 꼭 살아서 같이 만나기로.”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 거는 주문. 불안함을 떨쳐내기 위하여 그 말을 끝으로 이미 지척까지 다가온 고블린들을 향해 소리친다.

“이녀석들아, 너희의 상대는 나다. 푸른 불꽃의 윌프레드가 여기에 있으니 모두 덤벼라!”

그 소리는 도발의 외침. 그와함께 무엇인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윌의 신형이 쏘아져 나가고 그의 대검과 로드의 검이 맞부디친다.

모든 고블린들의 시선은 이 둘에게 집중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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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1-25 21:59 | 조회 : 316 목록
작가의 말
응가견

다음편 쓰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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