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헐, 이게 뭐야? (1)



바야흐로 화사한 봄꽃이 만개하는 사월이 되었다. 운명 같은 사랑을 기대하든 새로운 꿈을 향한 도전을 결심하든 뭐든지 순조롭게 풀려나갈 것만 같은 예감이 드는 설레는 계절, 봄이었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벚꽃이 향긋한 바람결에 살랑살랑 흩어져 그 밑을 지나는 한 소년의 콧등을 간질였다.

“에취.”

꽃가루 알레르기 덕분에 봄을 싫어하는 소년이었지만, 올해는 달랐다. 들뜬 얼굴의 소년은 코를 문지르며 휴대폰을 다시 바짝 귀에 가져다댔다.

“여보세요? 준우 형? 아니, 잠깐 재채기가 나와서요. 집에 거의 다 왔어요. 짐이랄 게 뭐 있나요. 거의 몸만 온 건데요. 형 덕분이니까 한턱 제대로 쏠게요. 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해요.”

가벼운 발걸음으로 ‘별빛 아파트’ A단지를 걷는 소년은 얼핏 고등학생으로 보였지만, 사실 올해 스물일곱이 되는 성인 남자였다. 170cm라고 주장하는 키는 영혼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소중한 두 장의 깔창이 포함된 키였고 신분증을 내밀어도 좀처럼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사람들 덕분에 술집에 갈 때마다 곤욕을 치르는 동안 중의 동안이었다.

“네? 고백이요? 하하……, 잘됐으면 바로 형한테 전화했죠. 아예 고백도 못 했어요. 그만둬도 계속 연락하며 지내자고 하니까 먼저 선을 긋더라고요. 진짜 잘 웃어주고, 간식 같은 것도 챙겨주고 하길래 저한테 관심 있는 줄 알았거든요. 여자들은 진짜 이상해요.”

길고 길었던 구직 기간 동안 일식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남자는 미소가 상큼한 여자에게 호감이 있었다. 정식으로 취직하게 되면서 큰 용기를 가지고 고백을 감행했으나 어쩐 일인지 여자는 사근사근 상냥하게 웃어주던 평소와 달리 정색한 얼굴로 딱지를 놓았다.

“뭐, 뻔하죠. 여자들은 크든 작든 전부 키 큰 남자만 좋아하니까요.”

간절히 바라왔던 취직이 되지 않았더라면 남자는 코가 삐뚤어지도록 취해서 세 번째 깔창을 사러 갔을 것이다.

“진짜예요. 키 작은 여자들은 자기가 작으니까 키 큰 남자를 만나야 된다고 하고, 키 큰 여자들은 자기가 크니까 키 큰 남자를 만나야 된대요. 아, 진짜 세상은 너무 불공평해요. 웃지 마요, 형. 형은 진짜 제 마음 몰라요. 우리 키작남들의 설움을……. 흑흑.”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여자들은 먼저 관심을 보이다가도 정작 고백을 하면 두리뭉실한 핑계를 대가며 이리저리 빠져나갔고 그렇게 한 해 두 해를 보내다 보니 남자는 어느덧 스물일곱의 모태 솔로가 되어 있었다.

훨씬 작은 남자들도 여자 친구를 잘만 사귀던데 왜 자신만 번번이 퇴짜를 맞는지 용한 점쟁이라도 찾아가 굿이라도 벌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좌절이 그쯤에서 그칠 수 있었던 것은 새로 입사한 회사에 대한 기대 덕분이었다.

여성 란제리 회사인 ‘유디트(UDITE)’는 면접을 보러 갔을 당시 대충만 봐도 여자 직원이 남자 직원보다 두 배는 많았다. 설마 그 많은 여자들 중에 내 짝 하나 없을까? 취업도 하고 예쁘고 착한 여자 친구도 사귀고 올해는 두 마리 토끼를 거머쥐는 그야말로 인생의 황금기가 될 거라고 남자는 야심 찬 포부에 한껏 부풀었다.

“헐, 이게 뭐야?”

흩날리는 꽃잎을 피해 머리를 터는 남자는 마침 들어오는 문자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릴리스에서 발송한 택배를 반고흐(본인)님께 배달 완료했습니다-우체국’

남자를 괴롭히는 또 다른 콤플렉스는 바로 ‘반고흐’라는 독특한 이름이었다. 글자만 봐도 인상이 찌푸려질 만큼 자신의 이름을 싫어했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대체 받지도 않은 택배를 본인이 받았다니 무슨 소리야?

“잠깐만요, 형. 나중에 다시 통화해요. 잠깐 확인할 게 좀 있어서요. 네, 다시 전화 드릴게요.”

어리둥절한 남자는 종료 버튼을 누르고 서둘러 문자를 보내온 택배 기사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

“택배 올 게 없는데 뭐지?”

채 씻어내지 못한 거품투성이의 남자는 엉거주춤 허리에 둘러맨 수건을 여미며 정체불명의 택배를 살펴보았다. 반고흐, 분명 내 이름은 맞는데.

그나저나 몇 번이나 울리는 벨 때문에 되는 대로 중요부위만 가린 채 뛰쳐나와 택배를 받았지만, 거실 안쪽에서 들려오는 기척으로 미루어 보아 집 안에 형이 있는 건 확실했다.

“아, 형! 샤워한다고 했잖아! 있었으면 문 좀 열어줄 것이지!”

불평하거나 말거나 언제나 제멋대로인 형은 대꾸를 하기는커녕 듣기 싫다는 듯 시청 중인 동영상의 볼륨을 높였고 듣기에도 민망한 미성년자관람불가의 거친 숨소리에 남자는 얼굴을 붉히며 수건으로 문짝을 때렸다.

“소리 좀 줄여! 그런 건 혼자 있을 때나 보라고!”

욕실로 들어온 남자는 툴툴거리며 세차게 물을 틀었다. 언제쯤 나가서 살 수 있을지……. 이러다간 언젠가 나까지 망신을 당하고 말 거야. 아……, 그래도 역시 온수는 끝장나게 잘 나온다니까.

뜨거운 물로 거품을 씻어내자 단순한 남자의 기분은 금세 좋아졌다. 언제 짜증이 났었나 싶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샤워를 마쳤다.

또 벨 소리가 들린 거 같았는데? 이제 막 욕실에서 나온 남자는 현관문을 주시했지만, 다시 초인종이 울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잘못 들었나? 아마도 형이 보고 있는 게이 야동에서 흘러나온 소리라고 여기고 남자는 젖은 머리를 털며 거실로 방향을 틀었다. 둔탁한 감각이 발길에 차였다.

“아, 택배.”

남자는 알몸으로 쪼그려 앉았다. 주소를 확인해봐야겠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도 못하고 일단 거침없이 택배를 뜯기 시작했다.

“헐, 이게 뭐야?”

상자 안에는 그야말로 요사스러운 여성 속옷이 가득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것 같아 남자는 튀어나올 듯 커진 눈을 질끈 감으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귓불까지 화끈거렸고 점차 빨라지는 고동 소리에 야동 소리마저 저 멀리 아득해졌다.

“세, 세상에. 혹시 샘플로 보내준 건가? 아무리 그래도…….”

남자는 꿀꺽 침을 삼키며 가늘게 눈을 떴다.

“음…….”

요즘 나온 신제품인가? 역시 세상엔 다양한 취향의 소비자가 존재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앞부분만 간신히 가릴 아슬아슬한 T팬티며 토끼 꼬리가 달린 엉큼한 슬립이며 속이 훤히 비칠 야릇한 망사 브래지어 등을 하나씩 꺼내보는 남자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졌다.

근데 이렇게 작은 게 어떻게 맞긴 맞나? 남자는 유독 도발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빨간 팬티를 조심스럽게 꺼내보았다. 무릎을 바닥에 대고 엉덩이를 살짝 들어 올린 뒤 자신의 사타구니에 대보았다. 제 골반 너비의 반도 되지 않는 크기에 깜짝 놀랐다.

진짜 작잖아? 여자들은 이런 걸 어떻게 입지? 엄청 조일 텐데. 팬티 양쪽을 잡아 무심코 당겨본 남자는 그 놀라운 신축성에 다시 한 번 눈이 커다래졌다.

아, 근데 왜 발송 문자도 없었지? 남자는 그제야 상자를 뒤집어 운송장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에? 401호? 우리 집은 501혼데? 노크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실례합니다. 401호에서 왔는데요. 제 택배가.”

“…….”

반쯤 열린 문 앞에 선 401호 남자도 빨간 여성 팬티를 중심부에 대고 있는 벌거벗은 501호 남자도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 아흣……! 기, 기모찌 이이!”

“하, 하아! 기모찌!”

동영상 속 사랑을 나누는 이름 모를 두 남자의 절정에 이른 가쁜 숨소리만이 메아리치고 또 메아리쳤다.

“저, 저기! 오해하지 마세요!”

망측한 부위를 감추려 빨간 팬티를 더욱 움켜쥐었다가 보드라운 감촉에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털어대는 501호 남자는 꾸부정하게 몸을 돌리며 황급히 두 손으로 아랫도리를 가렸지만, 이미 401호 남자는 두 눈에 테러를 당한 뒤였다.

“그러니까 이건 말이죠!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니고요!”

누가 봐도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고 빼도 박도 못할 위기에 처한 501호 남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몰라 진땀만 흘릴 뿐이었다.

벼, 변태 새끼! 내 소중한 택배를 가지고 뭔 짓을 한 거야? 흥분해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덩치 큰 남자가 빨개진 얼굴로 몸을 일으키니 불쾌감을 넘어선 공포가 돌연 401호 남자를 덮쳐왔다.

“저, 저기, 제가 다 설명할게요. 일단 문 좀 닫고 들어와 주실래요?”

옆집에서 누가 나오기라도 할까 봐 가슴을 졸이며 소곤대는 501호 남자의 속마음을 알 길 없는 401호 남자는 오히려 문을 열어젖히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저기요?”

501호 남자는 되도록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에 굳은 얼굴로도 애써 생긋 미소 지으며 던져놓은 빨간 팬티를 주워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게이 야동의 신음소리가 새어나오는 밀폐된 집에서 185cm의 근육질 남자가 물기가 남아 번들거리는 알몸으로 수줍게 여자 팬티를 흔들어 보이는 모습은 401호 남자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벼, 변태다! 진짜 변태야! 순도 100%의 리얼 변태!

“죄, 죄송합니다. 잘못 왔어요.”

잰걸음으로 복도를 빠져나가는 401호 남자를 향해 501호 남자는 다급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저기, 잠깐만요! 진짜 오해라니까요! 전 멀쩡한 사람이에요! 이거 택배도 가져가셔야죠!”

“돼, 됐습니다! 가지세요!”

빨리 달려가고 싶은데 다리가 눌어붙은 듯 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삼킬 듯이 무섭게 덮쳐오는 섬뜩한 기운에 401호 남자는 식은땀에 젖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하, 하아! 정말이에요! 전 멀쩡한 사람입니다!”

속옷이 담긴 택배 상자로 앞을 가리고 맨발로 쫓아 나온 501호 남자가 어느 틈에 바로 뒤까지 추격해오고 있었다.

“으, 으아악!”

401호 남자는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며 젖 먹던 힘을 다해 삼십육계 줄행랑쳤다.

***

뒤숭숭한 꿈자리를 털고 일어나니 벌써 오후가 되어 있었다. 가장 먼저 문이 잘 잠겨있나 확인한 401호 고흐는 온몸이 찌뿌둥하고 불쾌했다. 늦은 밤까지 501호에게 시달린 탓이었다. 이놈의 빌어먹을 이름을 올해에는 어떻게든 개명하고 조만간 고시원이라도 알아볼 참이었다.

“하필 왜 윗집에 그런 자식이……. 이사 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401호 고흐가 얼마간의 짐만 가지고 들어온 아파트는 작은형의 집이었다. 키면 키, 얼굴이면 얼굴, 거기에 비상하게 뛰어난 머리까지 그야말로 우월한 유전자를 모조리 싹쓸이해간 형은 손에 꼽히는 대기업에 취직해 서른두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벌써 과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었고 해외 지사로 발령을 받아 잠시 외국에 나가 있었다.

집을 비우는 동안 대신 들어와 사는 게 어떻겠냐는 작은형의 제안은 큰형 집에 얹혀살며 짓궂은 형수와 잔소리쟁이 공주병 조카에게 시달리던 401호에겐 합격 전화만큼이나 기쁜 소식이었다. 무더운 여름에도 팬티 차림으로 있을 수가 없었고 더구나 모태 솔로인 신세도 서글퍼 죽겠는데 마음 놓고 성인 영화 한 편 제대로 즐길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이제야 드디어 어른다운 자유도 만끽할 수 있겠구나 싶어 쾌재를 외쳤는데 바로 머리 위에 여장을 즐기는 변태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지난밤, 501호 고흐는 포기하지 않고 택배를 챙겨 들고 몇 번이나 찾아와 초인종을 눌렀다.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아 집에 없는 척 숨을 죽여도 돌아가지 않고 문 앞에 서성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진짜 소름.”

401호는 현관문을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 얼음을 가득 채운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휴대폰을 열었다. 첫 출근을 위해 준우 형과 함께 정장과 구두를 사러 갈 참이었다.

‘형, 저 이제 일어났어요. 작업실로 갈까요?’

문자를 보내고 간단하게 요기를 하려고 주방으로 한 발을 떼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이젠 그저 벨 소리만 들려도 자동으로 소름이 끼쳤다. 서, 설마 그 변태 자식이 또 온 건 아니겠지?

401호는 휴대폰을 꼭 쥐고 발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인터폰으로 향했다.

헉……, 불길한 예감은 적중하고 말았다. 밤잠을 설치긴 마찬가지였는지 부스스한 몰골의 501호가 인터폰 앞에 기웃대며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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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3 19:30 | 조회 : 505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