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월림 입성 (1)





“저기 자고 있는 애 누구야?”



“희원이 아니야? 점심은 먹고 자는 건가….”



마치 이제야 발견한 것처럼 얘기들을 하지만, 사실 한참 전부터 교실에 있는 대다수의 남학생들이 점심시간 내내 책상 위에 엎드려 자고 있는 희원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것을 동진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는 얼굴이 더 예쁘지 않냐?”



“맞아, 더 청순해 보이고…. 아, 나 진짜 미친 척 하고 한번 들이대 볼까?



“미친 놈, 희원이는 눈이 없냐? 나라면 몰라도.”



“웃기네. 너 같은 놈이랑 만나는 여자는 눈이 아니라 뇌가 없는 거지.”



친구들의 마냥 장난이랄 수는 없는 실랑이를 조용히 듣고만 있던 동진은 말없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설핏 음흉해 보일 수 있는 웃음이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표정을 정리했기 때문에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너희들은 보고 감탄만 하는 저 청순한 서희원이 곧 내 거가 될 거라고.’



입학식 날 첫눈에 반해 필사의 작업에 들어간 것이 벌써 한 달 여. 처음으로 학교 밖에서 만나기로 한 날이 바로 내일이다. 누구에게든 자랑을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적어도 오늘 하루는 참아야했다.



- 너에 대해서 알 시간이 필요해. 너도 나에 대해서 좀 더 알아야 할 테고. 그리고 어떻게 결론이 나든지 미리부터 반 애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건 사양하고 싶어.



생각했던 반응이 아니어서 조금 당황했지만, 동진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희원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과묵하고 신중한 모습을 보여주리라 생각했다.



‘그래, 한 번에 오케이 하는 여자도 매력 없지.’



희원의 무심한 태도는 오히려 동진의 정복욕을 자극했다. 이미 인근에서는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로 유명했던 그녀에게 접근하는 남자는 저 말고도 많았다. 같은 반 친구들부터 선배들까지, 전교에 소문이 파다하게 날 정도로 요란한 대시만 해도 동진이 아는 것만 열 명이 넘었다.



항상 남자들에게 북적북적 치이는 희원이 안쓰러울 정도였으니, 구설에 휘말리기 싫어하는 그녀의 심정도 십분 이해가 갔다.



- 물론이야. 너 불편한 건 나도 싫다. 조심할게. 일단 거절이 아닌 것만으로도 고마워.



마음이 전혀 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고맙다는 말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희원은 청순하고 가녀린 외모와 달리 일말의 여지없이 매몰차게 거절하는 스타일이었다. 두어 번 정도 우연을 가장하여 엿들은 적이 있었는데, 상관없는 사람이 듣기에도 난처하고 무안할 만큼 쌀쌀맞았었다.



그런 희원이 그 자리에서 거절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성공을 확신한 동진은 끈기를 가지고 기다렸다. 희원이 좋아할만한 언행을 하기 위해 신중하게 계산하고 행동했다. 그녀는 외모만큼 부드럽지는 않았지만 경우가 바르고 배려심이 깊었다. 그런 여자를 공략하려면 항상 정도와 매너를 지켜야 했다.



드디어 이번 주말에 약속을 잡았을 때 동진은 내심 쾌재를 불렀지만 놀라워하며 감격하는 얼굴을 보이는 걸 잊지 않았다.



‘다음 주 월요일 아침에 희원이네 집 앞에서 기다리다가 손잡고 등교해야지.’



그 광경을 보고 인상이 구겨질 많은 남자들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뿌듯했다. 동진은 슬그머니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리기 위해서 괜한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자는 얼굴이 더 예쁘지 않냐?”



“맞아, 더 청순해 보이고…. 아, 나 진짜 미친 척 하고 한번 들이대 볼까?”



예비종을 듣고 막 잠에서 깨어나던 희원은 같은 반 남자애들의 수군거림에 멈칫했다. 청순이라니…. 손발이 오그라들고 목 뒤로 벌레가 기어가는 느낌이었다. 희원은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그녀가 지닌 큰 덕목 중 하나는 대단히 양심적이라는 것이다.



‘젠장, 얼굴이 화끈거려서 일어날 수가 있나…. 차라리 욕을 해라, 자식들아!’



못 들은 척 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잠이 덜 깬 자신에게도 들렸으니 분명 옆자리에 앉아 있는 동진에게도 다 들렸을 것이다. 조용히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고 있을 동진을 생각하니 희원은 먹지도 않은 점심에 체하는 기분이었다.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던 입학식 날, 희원은 끈질기게 따라붙는 시선에 이미 넌더리가 나있었다. 예상 못했던 일도 아니었고 어느 정도는 각오도 했지만 실수인 척 몸을 부딪치고 도망가는 녀석까지 등장하자 희원의 짜증은 극에 달했다.



‘저 자식이, 초딩도 아니고! 첫날부터 한번 뒤집어?’



분을 삭이며 제일 뒷줄 구석에 자리를 잡은 희원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눈에 띄게 예뻤고 당연하게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른들이 예쁘다고 머리를 쓰다듬으면 그저 그런가보다 하던 어린시절을 지나 심미안이 발달하면서부터는 어느 누가 굳이 옆에서 알려주지 않더라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일이었다.



자신의 미모를 어느 정도는 자랑스러워했고 감사하게도 생각했지만 어려서부터 희원은 얼굴을 믿고 노력하지 않는 아이는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힘을 잃게 될 것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 희원은 공부도 운동도 인격수양도 열심히 해왔었다.



그녀는 명석하고 자존감이 높으며 사리분별이 정확한 사람이었다. 의협심이 강하지만 욱하는 성격이 있고, 감정이 풍부하지만 따라서 기복도 심하고, 예술성이 강한 만큼 쓸데없이 예민한 부분도 많은…. 다양한 모습을 가진 희원을 사람들은 한마디로 표현했다.



예쁜 애.



단지 보여지는 걸로 받게 되는 선망이나 시기도 희원은 다 성가셨다. 성적이 좋으면 예쁜 애가 공부도 잘 한다고 했고, 화를 내면 얼굴은 예쁜 게 성질이 더럽다고 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성격이 유순한 편은 아니었고, 굳이 감추려고 노력하는 타입도 아니었지만 입학식 첫날부터 풍파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아서 일단은 참았다. 악의에 찬 뒷담화에 크게 상처받지는 않았지만 굳이 또 찾아서 들을 이유는 없다. 같은 녀석이 세 번째로 어깨를 부딪쳤을 땐 정말 뚜껑이 열렸었지만…, 그래도 참았다.







“만나서 반갑다. 김동진이야. 너는 서희원이지? 듣던 대로 미인이네.”



제비뽑기로 짝이 된 동진은 다른 애들처럼 소란을 떨지도 않고 정중하게 악수를 청했다. 충분히 계산된 행동임을 전혀 몰랐던 희원은 호들갑스럽지도, 그렇다고 부자연스럽게 모르는 척 하지도 않는 동진의 담백함이 마음에 들었었다.



단정한 헤어스타일에 깔끔한 교복, 꽤 고급이지만 요란하지 않은 신발…. 공부도 잘 하고 얼굴도 잘생겨서 여자애들한테도 인기가 많고, 그러면서도 서글서글한 성격 덕에 남자애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은 흔치 않은 캐릭터였다.



평소에 남자한테는 관심도 없고, 거절은 단호하게 하는 것이 배려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희원에게도 그런 동진은 단칼에 잘라버리기에는 상당히 매력적인 상대였다.



입학하고 한 달이 거의 다 되어가던 날, 고백을 받았다. 입학식 날부터 노골적이지는 않아도 꾸준히 관심을 표현했었던 동진이었기에 한 달이라는 기간이 보여주는 신중함이 좋았다. 왠지 발이 땅에서 뜨는 것 같은 기분에, 희원은 어쩌면 자신이 동진의 고백을 은근히 기다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너에 대해서 알 시간이 필요해. 너도 나에 대해서 좀 더 알아야 할 테고. 그리고 어떻게 결론이 나든지 미리부터 반 애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건 사양하고 싶어.



냉정하게 거리를 두는 느낌을 보인 건 일종의 테스트였다. 다소 기분이 상할 수도 있는 대답이었지만 동진은 불쾌한 기색 하나 없이 그러마 했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올 때와 갈 때의 태도가 달랐다. 하지만 승낙도 거절도 아닌 애매한 대답에도 행동에 변함이 없던 동진은 희원한테 교제를 신청한 남자들 중 가장 어른스러웠다.



이 정도면 사귀어도 되겠는데? 주말 약속을 잡으며 좋아하는 동진의 모습을 보고 희원도 왠지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살짝 들떠있던 희원의 마음에 찬물을 끼얹은 건 목요일 청소시간이었다.



이번 주에는 당번을 맡은 청소 구역이 없어서 희원은 신축교사 옆 관목림으로 산책을 나갔다. 이사장이 각별히 아낀대서 관리가 잘 되고 있는 관목림은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눈요기 할 만큼은 되었다. 더구나 지금은 영산홍이 활짝 피어서 더욱 볼만했다. 희원이 특히 좋아하는 하얀 영산홍도 막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하는 참이었다.



동진이 자리에 없는 것을 확인한 희원은 조용히 교실을 빠져나갔다. 예쁜 꽃을 같이 보고 싶은 마음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굳이 학교에서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욱 컸다. ‘서희원이 김동진이랑 다정하게 꽃구경하고 있더라.’라는 소문은 부풀려지고 날개를 달아 내일이 되기도 전에 ‘둘이 꽃밭에서 좋아 죽으며 뒹굴더라.’로 변할 것이다.



희원에게 눈을 곱지 않게 뜨고 있는 일부 여자애들은 희원이 꽃을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비아냥거릴 게 분명했다. 무거운 걸 남자애들이 들어주면 공주병이라고 눈을 흘기고 혼자서 낑낑대며 들고 가면 재수 없게 청승이라고 혀를 차는 애들한테 괜한 빌미를 제공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내가 꽃을 머리에 달기를 했어, 입에 물기를 했어? 그냥 보기만 하겠다는데 니들이 보태준 거 있어? 가만히 생각해보니 다소 억울했지만,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내는 실수를 할 요령 없는 희원은 아니었다.



혼자서 한가롭게 꽃구경을 하던 희원은 최근까지 끈질기게 들러붙었던 3학년 선배를 멀리서 발견하고 재빨리 관목림 뒤편 소나무 숲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사실 숲이라기엔 민망한 수준으로, 알량하게 열 그루 남짓한 소나무가 심어져있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나름 은밀해서 커플이나 흡연자들이 애용하는 장소였다.



오만상을 찌푸린 채 몸을 숨기려던 희원은 낯익은 뒷모습이 보여서 황급히 걸음을 멈췄다. 뜻밖에 동진이 옆 반 여자애와 함께 있었다.



“음, 일단 정말 고마워. 그런데 나 좋아하는 애 있어. 미안하지만 이건 받을 수가 없겠다.”



서로 마주치기 전에 멈춰 설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고백과 거절의 현장을 목도하는 것은 심히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희원은 제가 그 장면의 등장인물이 되지 않은 것에 안도하는 한편, 상냥하지만 단호하게 다른 여자의 고백을 거절하는 동진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문제는 편지와 선물을 건네지도 못한 고백녀가 시야에서 사라진 다음에 일어났다.



“쳇, 못생긴 게.”



희원은 처음에 귀를 의심했다. 처음 들어보는 말투였다. 세 어절의 짧은 말이었지만 짜증과 경멸이 여실히 드러났다. 결국 너도 얼굴이었단 말이지. 너무 어이가 없고 실망스러워서 얼어붙은 희원의 귀로 다른 소리들도 들려왔다.



찰칵 찰칵. 후우.



‘설마…. 설마, 담배?’



기침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희원은 입을 틀어막은 채 황급히 자리를 뜨며 생각했다.



‘김동진, 아웃.’



[너도 생긴 거랑 많이 다르잖아.]



“그게 같아? 나는 보기보다 좀 덜 얌전할 뿐이지만, 그 자식은 인격이 완전히 다르더라니까?”



[좀? 야, 솔직히 좀은 아니지.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두 달 전쯤인가? 내 친구 하나가 나보고 주말에 같이 영화 보러 갔던 청순한 여자가 누구냐는 거야.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주말에 청순한 여자랑 만난 적이 없거든. 상황을 잘 들어봤더니 그게 너였더라고.]



상대의 진지한 말투에 희원의 짜증이 더욱 가중되었다. 그리고 희원은 제 심리상태를 굳이 숨기는 타입은 아니었다.



“서정원, 시비 거냐?”



악문 잇새로 흘러나오는 희원의 목소리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읽은 수화기 너머의 상대가 긴장한 목소리로 낮게 웃더니 바로 성난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아니, 아우님. 그건 아니고요. 뭐, 겉보기 등급이랑 똑같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런 말이지.]



“똑같을 걸 바라는 게 아니야. 자기 좋다는 사람한테 그런 반응을 보이는 인간은 기본이 안됐다는 거지. 더구나 그 자식 담배 피워!”



[아, 그건 안 되지. 담배 알러지 환자한테 흡연자 남친이라니….]



“내 말이! 더구나 요 며칠은 완전히 고백 받아줄 것처럼 굴었단 말이야, 내가! 모레 만나서 오케이 하려고 했었다고! 내가, 이 서희원이, 그런 표리부동을 몰라보고!”



[희원아, 진정해. 사람이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표리부동 면에서는 너도….]



“오빠 너, 진짜 죽을래?”



기숙사에 있는 오빠와 밤늦게까지 통화를 한 희원은 전화를 끊고도 한참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른 건 몰라도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자부했었는데….



어쩐지 너무 그럴싸하다 했어. 17살 남자애가 그렇게까지 성품이 완벽할 리가 없지. 아, 진짜 환장하겠네. 어떻게 거절을 하지? 걔는 이미 사귀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텐데….



희원은 침대 위에서 민망함의 발버둥을 치다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냐,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야. 사귀고 나서 알 수도 있었잖아? 잘 된 거야, 암.



우씨, 그래도 뭐라고 말을 하고 거절하느냔 말이야! 그냥 다른 때처럼 단칼에 잘랐어야 했는데…. 팔자에도 없는 남자는 사귀겠다고…. 아, 내가 미쳐! 머리를 쥐어뜯으며 거의 밤을 새운 희원은 오전 수업시간을 겨우 버텼다. 아침부터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는 동진이 더 이상 곱게 보이지 않아서 더욱 속이 뒤틀렸다.



왜 그러냐고? 너 때문이잖아, 이 사기꾼아! 희원은 속말을 삼키느라 끙 소리를 내며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책상에 엎드렸다.



“웃기네. 너 같은 놈이랑 만나는 여자는 눈이 아니라 뇌가 없는 거지.”



“야, 원래 사랑이라는 건 이성이 마비가 되어야 가능….”



“꺅!”



속으로 대차게 욕을 하며 자연스럽게 일어난 척을 할 타이밍을 재던 희원이 날카로운 비명에 눈을 번쩍 떴다. 떠들썩하던 교실에도 정적이 흘렀다. 불과 3초도 지나지 않아 둔탁하고 육중한 것이 거세게 부딪히며 와그르르 무너지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수많은 아이들의 다급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 저, 저기!”



창가에 앉은 아이가 떨리는 손으로 가리킨 건 운동장 건너편 3학년 교사 쪽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창문 쪽으로 달려가는 아이들 사이에 섞여 희원은 심장이 몹시 기분 나쁘게 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지금 속내가 검은 남자애랑 하고 있는 감정놀음 따위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뭔가 사달이 났구나.’



애석하게도 희원은 감이 몹시 좋은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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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1 04:21 | 조회 : 194 목록